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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
진심 어린 조언을 듣고도 삐딱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16년 전, 막 입사한 내가 편집국 한편에서 눈치 보며 당직 근무를 할 때마다 고참급 선배들은 어깨를 툭 치며 “잘 돼 가느냐”라고 묻고는 ‘민완 기자 되는 비법’을 들려줬다. 보통 이런 레퍼토리였다.
“출입처를 장악해야 해.”
“공무원들이 신경 쓰는 기사를 써야 좋은 기자야.”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한편으론 갸웃했다. 기사는 언론사가 파는 ‘상품’인데 이를 만들 때 왜 이용자(일반 독자)가 아닌 출입처 사람들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걸까. 시장에 내놓은 물건이 계속 외면당하면 회사가 망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신문사들은 한국 언론 수익 구조의 특수성에 기대어 생존해 왔던 터라 절박함이 덜한 게 아닌가 싶었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더 고꾸라질 곳이 없을 줄 알았던 업황은 계속 나빠졌다. ‘언론사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신화를 믿는 사람은 확연히 줄었다. 다만, 이번엔 두려움과 무기력이 언론계를 덮쳤다. 대형 포털사이트에 종속된 언론사들은 페이지뷰(PV) 급감에 대응한다며 자극적인 뉴스를 쏟아내면서 내심 ‘포털이 언제든 뉴스를 버릴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다. 레거시 미디어의 대체재도 넘쳐난다. 유튜브에는 필요한 뉴스를 짧고 쉽게 정리해 주는 큐레이션 채널이 널려 있고, 특정 정치 진영을 대변하며 수십, 수백만 구독자를 확보한 시사 채널도 많다. 볼 게 뉴스뿐인가. 시민들은 출퇴근길에서 뉴스 대신 넷플릭스를 본다.
젊은 기자들의 무력감이 더없이 커진 시점에 실천 가능한 ‘해법’을 말해온 베테랑 언론학자가 있다. 30여 년간 기자와 교수로 일해온 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다. 그는 “언론 내·외부의 난국 타개를 위해 기자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사를 잘 쓰는 것밖에 없다”라고 강조한다. 넷플릭스와 경쟁할 수 있을 만한 재밌는 뉴스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박재영은 좋은 기사에 관심이 큰 기자와 시민들을 위해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놨다. 지난 130여 년간 한국 언론의 명품 기사를 모아 작법과 취재 방법 등을 분석한 «좋은 기사의 스토리텔링»이다.
소설처럼 술술… 영화 기법 기사에 활용하기도
저자인 박재영은 기사를 보는 눈이 까다롭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하고 성실한 취재에 기반해 작성해야 한다. 또, 실명 보도 등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지켰는지도 무척 중시한다. 기자를 지망하는 대학생 제자들에게도 “(기자가 되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대충하기, 적당히 하기,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라고 타박할 정도니 기성 기자에게는 얼마나 높은 수준을 바랄지 가늠할 만하다.
«좋은 기사의 스토리텔링»에는 깐깐한 그가 인정한 100편의 ‘레전드 기사’가 담겼다. “한국에도 미국의 퓰리처상 수상작에 견줄 만한 ‘보물 같은’ 기사들이 존재한다”라고 상찬한 작품들이다. 책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의 전모를 보도한 황성신문의 <오건조약청제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부터 최근의 기사까지 다뤘다. 기사들을 읽다 보면 같은 기자로서 질투심마저 느끼게 한다.
이 책은 박재영이 2020년 냈던 «뉴스 스토리»와 쌍을 이룬다. 전작은 미국 기사 사례를 중심으로 내러티브 기사 쓰는 법을 정리했다. 나는 지난해 내러티브 작법으로 쓴 세월호 10주기 특별기획 <산 자들의 10년>1) 시리즈를 취재·보도하면서 이 책을 수시로 펼쳐보며 교과서로 삼았었다. 이후 몇 권씩 사뒀다가 스토리텔링 방식의 기사 작법에 관심 두는 후배 기자가 있으면 선물했는데 책에서 미국 기사를 주로 다루다 보니 아쉬움이 있었다. 취재 환경과 기사 작성의 문화가 우리와는 다소 다르기 때문이다. 박재영도 뉴스 스토리를 내면서 “한국에도 좋은 기사가 있다는 희망과 오기를 품었다”라고 한다. 저자가 밝힌 이 책의 탄생 배경이다.
«좋은 기사의 스토리텔링»은 소설처럼 술술 읽힌다. 만만치 않은 양(496페이지)임에도 몰입해 단숨에 독파하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한 기사들이 틀에 박히거나 딱딱하지 않은 데다 저자가 맛깔나게 분석해 가독성을 높인 덕이다. 명품 해설을 들으며 프로야구 경기를 보는 느낌이다. 예컨대 1부 1장 ‘일상에서 주제 찾기’에서는 국민일보의 <“걷다 보면 길 보일까요” 마포대교 24시간 기자가 만난 사람들>2) 기사를 소개했는데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시 한강 다리는 28개이며 짧아도 800m, 2.9㎞나 된다. 길다 보니 걸어서 건너는 대신 차나 전철로 다리를 지나면서 한강을 감상한다. 간혹 걷는 사람이 있는데 왜 저 사람은 굳이 걸어가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다리가 마포대교라면 보는 이의 마음은 궁금증을 넘어 조금 심란해진다. 마포대교는 여전히 자살 시도가 가장 많은 다리다. 누군가 마포대교 1.4㎞를, 그것도 살을 에는 한겨울에 걷고 있다면,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게 궁금해서 김판 국민일보 기자는 마포대교로 나가봤다. 12월 초순의 추운 날이었다.”
여기까지만 읽고 멈출 재간이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기자는 마포대교에서 누굴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취재한 내용은 어떤 형식으로 기사에 담았을까’라는 궁금증이 커진다. 저자는 시종일관 자신이 소개하는 기사에 대한 정보를 슬쩍 보여줘 애달게 만들고는 완급조절을 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내러티브 기사를 쓰듯 글이 끝날 때까지 독자의 관심을 끌고 간다.
책은 독자의 흥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글쓰기 기법을 사례 중심으로 소개한다. 예컨대 영화 광고에서 곧잘 활용되는 ‘티저(teaser)’ 기법을 뉴스 스토리텔링에 활용한 동아일보의 <두만강변의 배신> 기사와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 대 안타고니스트(적대적 조연) 구도를 법원 기사에 적용한 경향신문의 <고양이 n번방, ‘인천 토리’의 추적이 시작됐다>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기법은 수 편의 기사로 구성된 시리즈물 등 ‘대작’을 쓸 때만 활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건 기사 등 일상적 소재를 다룰 때도 얼마든 활용할 여지가 있다. 단독 기사가 아니더라도 스토리가 살아 있는 기사를 쓴다면 같은 소재로 글을 쓴 타사 기자는 낙종의 아픔을 겪게 될 것이다.

1920년대 체험 기사가 보여준 혁신
‘좋은 기사의 스토리텔링’에서 말하는 명품 기사 쓰기의 비결은 ‘전복’이다. 뉴스룸에서 관성적으로 주문하거나 기자들이 익숙해져 별 고민 없이 활용해 온 기사 형식, 취재 방식을 과감히 버리라고 저자는 재촉한다. 이를테면 역(逆) 피라미드 구조 속에 사건을 욱여넣는 작법과도 적절히 거리 둘 필요가 있다. “영화나 소설을 역피라미드 구조로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폭망’하고자 한다면 몰라도…”라는 저자의 지적은 뼈아프다. 역피라미드 기사에서는 기자 스스로 전체 내용을 서두에서 흘리는 ‘스포일러’ 역할을 한다. 쓰기 쉽고, 짧은 분량 안에 정보를 효율적으로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로서는 맥 빠지는 형식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또 기자들에게 ‘코멘트 중독’에서 벗어날 것을 권한다. 한국 기자들은 보통 취재원에게 질문해 얻은 코멘트를 중심으로 기사를 구성하는데 오히려 취재원 간 대화에 개입하지 않고 잘 관찰해 이를 기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자가 껴들지 않고 지켜본 대화가 사건의 본질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물증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 게이 탤리즈(Gay Talese)가 말했듯 기자는 취재 때 ‘벽에 붙은 파리’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평소 찾아보기 어려운 50~100년 전 기사를 꺼내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다. 옛 기사를 읽다 보면 편견이 깨진다. 스타일 등이 ‘올드(old)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산이다. 100년 전 기사가 더 혁신적인 착상과 작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국내 뉴스 콘텐츠의 혁신이 얼마나 지체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컨대 1920년대 조선일보의 <변장 탐방> 기사는 기자 4명이 각각 군밤 장수, 인력거꾼, 고학생, 행랑어멈 등으로 변장해 서울 시내에서 일하며 사람 사는 이야기 등을 듣고 쓴 기사다. 일종의 체험기인 셈인데 과정 중심으로 보도하며 당시 불경기나 생활고를 전한 것도 의미 있지만 독자가 변장한 기자를 찾아내면 현금 10원을 준다는 게임의 규칙을 적용한 것이 흥미롭다. 이른바 ‘독자 참여형 기사’인 셈인데 100년 전 보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혁신적이다. 박재영은 이를 두고 “(이 보도는 언론사 간 경쟁이 치열해져) 독자를 늘려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헝그리 정신’이 충만했던 때 나온 기사”라며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한국 신문의 상업적 몸부림은 오늘날 신문과 기자에게 온고지신이 될 만하다”라고 평가했다.
데스크부터 읽어보면 좋을 책
책을 다 읽고 나면 좋은 기사를 쓰고 싶은 동기부여가 되는 동시에 좌절감도 든다. 관성에서 벗어나 새롭고 재미있는 양질의 기사를 쓰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기자들은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언론사들이 속보 대응을 중시하다 보니 하루에도 여러 편의 기사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깊은 취재를 해 어떤 형식에 담을지 고민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현장 기자만큼 뉴스룸의 보도 책임자들도 꼭 읽어보길 권한다. 국내 언론사에서는 데스크들의 권한과 역할이 큰 편이기 때문이다. 아래서부터 새로운 작법을 시도하는 등 변화 노력을 했으나 위(데스크)의 생각에 막혀 현장 기자들이 좌절하는 사례를 종종 봤다. 결국 데스크의 인식 변화 없이 한국 뉴스 콘텐츠의 질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언론학자 박재영은 언론계에서 만난 누구보다도 뉴스 품질 개선에 진심인 전문가다. 그는 젊은 기자들의 공부 모임인 ‘저널리즘클럽Q’의 산파 역할을 하고, 주니어 기자들이 주말에 모여 좋은 기사를 찾고 토론하는 ‘N클럽’을 이끄는 등 현장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모래에서 바늘 찾기 격인 레전드 기사 찾기 작업은 그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많은 기자가 이 책을 읽고 스스로 갇혀 있던 틀을 부수고 나오는 해방감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1) https://www.hankookilbo.com/Collect/9110
2)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151363&code=61121111&cp=n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