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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가 지난 4월 세로형 영상 피드인 클립스(Clips)를 미국 등 9개국에 선보인 데 이어 7월 한국 시장에 도입했다. 디즈니플러스 역시 3월 미국에서 세로형 피드 버츠(Verts)를 내놓았다. 긴 호흡과 대형 스크린으로 영향력을 쌓아 온 글로벌 스트리밍 사업자들이 스마트폰을 세로로 쥔 이용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대화면에서 펼쳐지는 ‘에픽(epic)’한 시청 경험을 앞세우던 이들조차 세로 화면과 분절된 숏폼의 영향력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물론 모바일 기기에서 세로 영상과 짧은 호흡을 실험하는 일 자체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일상과 이동 시간을 파고들면서, 틱톡을 비롯해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로 이어지는 세로형 숏폼은 이미 모바일 체류시간 경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2020년 제프리 캐천버그(Jeffrey Katzenberg)의 퀴비(Quibi)가 17억 5,000만 달러(약 2조 3,563억 원)를 조달하고도 6개월 만에 문을 닫은 이후 줄곧 잠잠했던 세로형 드라마 시장 역시, 최근 중국발 숏드라마 확산과 함께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전개되는 변화의 본질은 ‘숏폼의 소비량이 늘었다’는 양적 팽창에 머물지 않는다. 세로형 숏폼의 자리는 더 이상 본편을 홍보하기 위한 자투리 영상이나 가벼운 곁다리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 모바일 스크린 안에서 고유한 서사 양식과 화면 연출, 독자적인 과금 모델을 갖춘 ‘완성된 이야기의 생태계’가 두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로형 영상은 지금 영상 산업의 제작·유통·소비 전반의 규칙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
짧은 회차가 모여 만드는 손안의 장편
세로형 숏드라마에서 ‘숏(short)’이라는 수식어는 형식적으론 아이러니하게도 수사학에 가깝다. 회당 분량은 1분 30초에서 2분 안팎으로 짧지만, 통상 50편에서 80편의 연속극으로 구성된다.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붙이면 총 러닝타임은 1시간 30분에서 2시간 남짓으로, 사실상 극장용 장편 영화 한 편의 길이다. 이용자들도 결코 이 콘텐츠를 ‘짧게’ 소비하지 않는다.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기며 한두 시간의 호흡을 손안의 스크린에 쏟는다.
이 지점에서 지금의 숏드라마는 지난 십여 년간 한국 모바일 환경에서 자생해 온 기존 웹드라마와 갈라선다. 유튜브 등에서 인기를 끌었던 스케치 코미디나 클립형 웹드라마는 회당 분량뿐 아니라 전체 서사의 총량 자체가 짧은 단편에 머물렀다. 반면 숏드라마는 한 편의 길이가 잘게 쪼개져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연속된 장편의 시간 축을 다룬다. 시간에 몰입하고 서사를 축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 셈이다.
이러한 분절된 장편 서사를 끌고 가는 핵심 엔진은 매 회차 배치되는 클리프행어(cliffhanger)1)구조다. 숏드라마는 지상파 방송의 광고나 스트리밍의 월정액 구독과 달리, 앞의 몇 회를 무료로 공개한 뒤 이어지는 회차는 비용을 결제해야 하는 편당 유료 결제(pay-per-view) 모델을 기반으로 설계됐다. 회차마다 결제의 문턱을 넘게 만들려면 이야기의 구조는 공격적이어야 한다. 매 에피소드는 답답한 갈등(고구마)과 통쾌한 반격(사이다)이 교차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화면이 멈추고 결제창이 떠야 한다.
이 문법은 한국의 웹툰과 웹소설이 다음 회차를 결제하게 만들며 진화시켜 온 연재 문법과 닮아있다. 세부적인 미장센이나 느린 심리 묘사보다는 즉각적으로 수용자를 끌어당기는 플롯 자체의 흡인력이 성패를 가른다. 이야기의 전개와 갈등 구도는 철저하게 장르화돼 있다. 남성향 작품은 초능력이나 부를 얻은 주인공이 현실의 멸시를 딛고 복수와 성공을 쟁취하는 ‘사이다’ 판타지가 주를 이루고, 여성향 작품은 재벌가 계약 결혼이나 신분 격차를 극복하는 관계성 중심의 로맨스가 주류를 형성한다. 타임슬립, 기억상실, 숨겨진 재벌 2세 같은 클리셰가 반복되지만, 데이터를 근거로 다듬어진 플롯의 속도감과 주연 배우의 매력으로 그 한계를 돌파한다. ‘욕하면서도 다음 편을 누르게 만드는’ 서사의 추진력이야말로 숏드라마 서사 문법의 본체다.
배경보다 인물에 집중하는 세로 프레임
9:16의 수직형 프레임을 기반으로 한 세로 영상은 전통적인 16:9의 가로형 프레임과는 촬영과 연출의 문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인 영상 문법에서 가로 화면은 공간의 깊이감과 원경, 인물이 놓인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담아내는 미장센의 무대였다. 하지만 세로 프레임에서는 배경의 정보가 좌우로 잘려 나간다. 공간의 디테일과 배경이 갖는 힘은 줄어들고, 그 빈자리를 인물의 상반신과 클로즈업된 표정이 채운다. 관객의 시선도 인물의 눈빛과 표정 변화에 밀착되면서 연기자에게 요구되는 역량 또한 달라진다. 긴 호흡의 절제된 연기보다는, 좁은 프레임 안에서 즉각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대사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표현력이 한층 중요해진다.
이러한 세로 화면의 특성은 초기 단계에서 세트 제작비와 조명, 촬영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는 비용 효율의 근거로 작동했다. 하지만 시장이 성숙하면서 최근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선두 주자인 중국에서는 이미 숏드라마 전문 배우가 팬덤을 거느리고 있으며, 촬영과 조명, 세트에 훨씬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18세 소녀는 내 증조할머니!?(太奶奶今年十八岁)〉는 높은 인기에 힘입어 시즌 4까지 이어지는 IP로 성장했다. 동일한 서사를 고장극(古裝劇)2)과 현대극으로 변주하거나 주연 배우를 달리해 제작하는 등 활용 전략도 다양하다. 세로 프레임이 저예산의 타협을 넘어, 연출 기술과 자본이 투입되는 새로운 영상 형식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숏폼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플랫폼화(platformization)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시장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핵심은 세로형 숏폼이라는 동일한 외피 아래 서로 다른 세 가지 플랫폼 문법이 공존하고 분화한다는 사실이다.
첫째, 넷플릭스의 클립스나 디즈니플러스의 버츠는 모바일 시간 점유와 롱폼 본편 연결을 위한 탐색 도구다. 이들에게 세로 숏폼은 그 자체가 종착지가 아니라, 이동 중인 이용자의 시선을 붙잡아 거실의 대화면으로 유인하기 위한 장치이자 플랫폼 점유율 확대의 수단이다.
둘째, 틱톡과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는 그 자체로 숏폼을 스크롤하며 소비하는 피드(feed) 생태계다. 여기서는 탐색 행위 자체가 곧 콘텐츠 소비다. 플랫폼은 이용자의 파편화된 시간을 흡수해 주목을 형성하고, 이를 알고리즘 광고와 결합해 주목 자체를 시장화하고 상품화한다.
셋째, 릴숏(ReelShort), 드라마박스(DramaBox)나 국내의 비글루(Vigloo) 같은 숏드라마 전용 플랫폼은 서사 자체를 결제 상품으로 판매하는 유료 콘텐츠 시장이다. 초기에는 회당 코인 결제로 제작비를 회수하고, 구작 라이브러리가 두터워지면 이를 묶어 월간 구독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처럼 세로형 영상은 저마다 다른 목표와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플랫폼들과 결합하며 다층적인 소비 문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용자들은 목적에 따라 아이맥스의 대형 스크린, 거실의 스마트 TV, 손안의 모바일 스크린을 교차하며 생활시간 안에서 영상을 소비한다. 세로 영상은 그중에서도 모바일 스크린의 자리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독자적인 진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한국의 웹툰 신화, 숏폼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콘텐츠 제작-유통-소비 구조가 모바일 플랫폼 기반으로 재편되는 지금의 광경은 과거 한국 웹툰이 걸어왔던 궤적을 환기한다. 한국의 만화 산업은 외환위기, 도서 대여점 증가와 불법 디지털 스캔본의 확산 등 악재 속에서 전통적인 출판만화 시장의 위축을 겪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폐허 속에서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세로 스크롤과 칸 사이의 여백을 활용한 새로운 형식이 싹텄고, 2014년 카카오페이지의 ‘기다리면 무료’ 모델의 성공으로 유료 시장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잡지-단행본 구조의 출판만화 시장에선 일본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한국이 웹 코믹 시장에선 새로운 형식을 선도하는 우회적 추격을 이뤄낸 것이다.
현재의 세로형 숏드라마는 웹툰이 보여준 만화의 재구성을 드라마 영역에서 재현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로형 드라마에서의 후발주자였던 중국이 세로형 드라마에서 선도국이 됐다는 점도 닮았다. 모바일 미디어에 최적화된 시각 문법, 회차별 과금 모델, 데이터에 기반한 장르적 쾌감의 극대화도 웹툰이 보여준 진화 경로와 유사하다. 다만,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웹툰은 한국이 형식과 시장을 스스로 만들어낸 선도자였던 반면, 숏드라마 시장에서 한국은 중국이 데이터와 큰 내수 시장을 통해 이미 문법을 안정화해 놓은 판에 뛰어든 후발주자라는 점이다.
더 뼈아픈 것은 산업 내부의 조건이다. 지금 한국 영상 생태계가 숏드라마에 뛰어드는 배경에는 산업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스트리밍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방송 광고 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지상파와 종편의 드라마 편성은 급감하고 있고, 코로나19 이후 침체된 영화계도 아직 온전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숏드라마 시장에 대한 관심에는 생태계의 허리가 얇아지면서 일감을 잃은 제작사와 창작 인력들이 단기 회수와 생존을 찾아 숏드라마로 옮겨 가는 ‘비자발적 이주’의 성격이 짙다.
국내 시장의 유료 이용 기반도 여전히 취약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5 콘텐츠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내 숏폼 드라마를 시청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13.5%였다. 그나마도 시청자의 92.3%는 유튜브 숏츠나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숏폼 플랫폼을 통해 접했으며, 전용 유료 플랫폼을 이용했다는 응답은 9.7%에 그쳤다. 전용 서비스 이용자 중 실제 유료 결제를 경험한 비율은 5.3%에 머문다. 이용은 조금씩 늘고 있으나 지불 습관은 아직 정착되지 않은 내수 시장의 협소함 속에서, 중국 플랫폼이 선점한 글로벌 시장으로 곧장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숏폼 또한 본질은 ‘이야기를 만드는 일’
영상 산업은 지금 ‘스크린 양극화’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한편에서는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오디세이>처럼 큰 규모의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관객이 몰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손안의 세로 모바일 스크린이 일상의 자투리 시간을 흡수한다. 상시적이고 가벼운 소비와 예외적이고 무거운 경험이 각각 강화되는 사이에서, 그 중간에 있던 것들이 가장 먼저 압박을 받는다. 광고 수익을 잃어가는 지상파 미니시리즈, 손익분기점을 맞추지 못하는 중간 규모의 한국 영화, 지난 십여 년간 자생해 온 웹드라마들이 그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한쪽에서는 숏드라마 시대가 온 것처럼 환호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도입해 봐야 위기를 타개할 길이 없다고 냉소한다. 과잉 낙관도 문제지만 지금 벌어지는 시도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숏드라마를 제작해 본 경험이 우리 영상 생태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웹툰의 진화가 남긴 또 다른 교훈이다. 초기 웹툰 역시 아마추어 중심의 일상툰과 가벼운 개그 만화로 출발했으나, 기성 출판만화 작가들과 신진 창작자들이 유입되면서 긴 서사와 세계관을 갖춘 작품으로 질적 도약을 이뤄냈다. 숏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세로 화면과 분절된 호흡이라는 낯선 규격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결국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 한국의 창작자들은 중국식 플롯 공식을 번안하는 단계를 넘어, 섬세한 감정선과 밀도 높은 캐릭터, 이른바 ‘한국식 도파민’과 결합한 오리지널 서사를 만들어내며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 있는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숏드라마를 제작해 본 경험은 모바일 호흡에 최적화된 연출 감각과 데이터 기반의 기획 역량을 축적하는 자산이 될 수 있다. 세로형 숏드라마가 우리 창작자들에게 어떤 훈련과 축적의 장이 될 것이며, 위기에 처한 전체 영상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1) 극의 전개를 고조시켜, 보는 이들의 긴장감을 높이는 연출 기법. 편집자 주
2)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과거의 의상·생활양식 등을 재현한 드라마. 편집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