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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이 땅의 여성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당시에도 세상의 편견에 맞서 소신 있게 자신의 길을 간 여성들이 있었다.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제작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2020년 겨울, 우연히 한 전시를 보게 됐다. ‘1920년 기억극장 <황금광 시대>’라는 전시였는데, 1920년대 신문과 잡지를 토대로 시공간을 오가는 콘셉트의 전시였다. 그곳에서 만난 100년 전 여성들의 삶이 지금과 무척 다른 듯하면서도 어딘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갈증이 생겨 신여성에 관련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때로는 분노하면서, 슬퍼하면서, 또 때로는 박수 치며 100년 전 여성들의 삶에 빠져들었다.
기획안을 쓰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소재는 넘치고 흘렀다. 누군가는 조선 최초로 단발머리를 했고, 누군가는 나쁜 피라고 손가락질 받는 중에도 소설을 써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했다. ‘사나운 세상’ 속에서도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100년 전 여성들의 이야기를 빨리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와 지금의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묻고 싶었다.
새로운 역사 토크멘터리의 탄생
‘함께 여성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달라’고 제안했을 때, 임정화 작가는 “왜 PD님은 시청률이 나오기 힘든 소재만 다루느냐”라고 말하며 웃었다. 아무리 중요하고 필요한 이야기더라도, 시청자가 외면하면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되기 힘들다. 교육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PD와 작가들이 늘 고민하는 숙제기도 하다. 지루하지 않게, 어렵지 않게 교육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 그 답을 찾는 데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썼다.
일단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기획 의도를 살리는 형식을 택했다. 과거의 인물이 나타나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포맷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의 형식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시청자들이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 일방적인 설명이나 정보 전달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청자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게끔 ‘퀴즈’의 형식도 섞었다. 당시 여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하는 ‘드라마타이즈(dramatize)’도 빠질 수 없었다. 결국 100년 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1부와 2부는 퀴즈와 토크, 드라마가 모두 섞인 ‘역사 토크멘터리’의 형식을 갖추게 됐다. ‘이 모든 걸 50분에 담아내면서 시청자의 집중력을 끌어낼 수 있을까?’ 걱정됐지만 임정화 작가의 뛰어난 구성력이 많은 고민을 해결해 줬다.
모두의 시간이 합쳐진 역사
과거와 현재의 대화인 1부와 2부, 현재와 미래의 대화인 3부 모두 “어떤 인물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마음 같아서는 52부작으로 만들어도 부족할 것 같았다. 과거든 현재든 인물 한 명 한명의 인생과 이야기가 모두 소중하고 의미 있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20~30분으로 압축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선택의 기준은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였다. 수많은 2차 가해 속에서도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던 김명순 작가, 조선 최초로 단발을 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기생 출신의 강향란, 잡지 《신여성》의 기자로 활동하며 여성해방에 관한 글을 썼던 송계월, 최초의 택시 기사 이정옥과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 등이 1부와 2부의 주인공으로 선택됐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아직까지도 우리가 미처 다루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의 삶이 숙제처럼 남아있다. 꼭 무언가의 ‘최초’가 아니더라도, 혹은 어떤 업적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그 시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모든 이들의 시간이 쌓여 여기까지 왔다는 걸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유치함’과의 싸움
모든 단계가 도전이었다
대본이 나오고, 촬영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사실 여러 번 후회했다. 한창 촬영하던 시기에 썼던 일기장에 나의 힘든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였을까. 그냥 하던 대로 취재 다큐로 만들걸…”이라고. 예능 프로그램처럼 방 탈출 퀴즈도 풀어야 하고, 교양 프로그램처럼 토크쇼도 해야 하고, 드라마처럼 재연 장면도 찍어야 했다. 여타 다른 역사 다큐멘터리처럼 자료와 전문가 인터뷰가 중심이 되는 프로그램은 만들지 말자고 결심했을 때부터 예견된 미래였지만,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방송이 나간 후 “유치하다”라는 평을 듣게 되는 것이었다. 시공간을 오가는 스토리텔링 콘셉트며, 100년 전 세상을 재연하는 장면들까지. 촬영, 연기, 조명, 소품, 의상, 음악, 편집, CG, 색 보정 등 무엇 하나라도 삐끗하면 이른바 “오그라든다”라는 평을 듣기 쉬운 상황이었다. 빠듯한 제작비는 다른 프로그램들을 흉내만 내기에도 한참 모자랐다.
이렇게 복잡한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모든 스태프가 고민을 함께 해결해 줬다. 임형은 촬영감독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영상들을 담아줬고,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제시해 줬다. 손은서 미술감독은 서울역을 배경으로 한 공간 디자인부터 만년필 같은 소품까지 디테일하게 챙겨줬다. 최의경 음악감독은 프로그램에 딱 맞는 옷을 입혀줬다. 영상을 통해 연출자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감독이라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스태프의 전문성이 모여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워낙 훌륭한 전문가들이기도 하지만, 프로그램의 콘셉트 내용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과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시청자들로부터 “마치 영화 같다”라는 평을 들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이들 덕이었다.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눠준 심용환,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의 자연스러운 진행도 프로그램을 빛내줬다. 섭외를 위해 처음 통화했을 때, 프로그램의 형식을 설명하는 데 마땅한 예시가 없어서 애를 좀 먹었다. “참여형 연극의 관객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등장인물들에게 질문도 하고 대화도 나누는 역할이다”라고 설명하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맞냐”라는 질문도 여러 번 들었다. 그렇게 다들 처음엔 시공간을 오간다는 콘셉트를 낯설어하기도 했지만 금세 적응해서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에 함께 울고 웃어줬다. 특히 심용환은 친근한 설명으로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100년 전 여성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오디션으로 뽑았다. 진행자들의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위해 NG 없이 실시간으로 연극처럼 진행해야 하는 어려운역할들이었다. 진행자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로 하여금 100년 전 여성이라고 믿게 하는 것, 그리고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동시에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까지 모두 해내야 했다. 실제 대본은 방송에 나간 것보다 훨씬 길어서 외워야 하는 대사의 양도 상당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연기력’이 뛰어나야 했고, 동시에 어딘가 ‘당차 보이는 이미지’가 있는 배우들로 섭외했다. 제작진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우리가 한 일 중 잘한 일을 꼽는다면 ‘배우 섭외’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N번방 이야기
현재와 미래의 대화인 3부에서는 디지털 성폭력 문제를 다뤘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그 얼굴을 바꿔가며 반복될 확률이 높은 범죄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목격하고, 취재하고, 해결하기 위해 연대한 사람들이 100년 후 사람들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의 형식을 취했다. 미래 세대에게도 이렇게 잔혹한 세상을 물려줄 것이냐고 묻고자 했다.
사실 해당 사건들은 수많은 미디어에서 수도 없이 다뤄진 소재였고, 심지어는 우리가 촬영하던 시기에 한 OTT에 N번방 추적기를 자세히 다룬 다큐멘터리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미 알려진,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우리가 또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새롭게 알고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백년사>라는 프로그램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었다.
3부 제작의 많은 부분은 ‘자극적이지 않게 범죄 수법을 전달하는 방법’과 ‘피해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채워졌다. 범죄 수법과 그 잔혹성은 최소한의 설명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거라 생각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건을 취재하고 목격하고 연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텔레그램 성 착취와 같은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리는 일이었다. 성 상품화가 만연한 사회, 성범죄를 충분히 벌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얼굴만 바꿔서 계속 등장하게 될 범죄라고, 그래서 주범 몇 명만을 구속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3부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인터뷰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을 추적한 사람들, 피해자와 연대하고 사건을 공론화하기 위해 힘쓴 사람들, 그리고 본인의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려서 다른 사람이 같은 피해를 입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줬다.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만한 사람들이었다. 그 용기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EBS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3부작이 방송된 후, 많은 사람의 시청 소감이 SNS에 올라왔다. 100년 전 이른바 ‘신여성’들이 받은 혐오와 당시 지식인들에 대한 분노, 또 N번방 사건의 잔혹함과 크게 변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슬픔이 뒤섞인 듯했다.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가혹한 세상을 살아낸 김명순 작가의 삶은 슬픔과 분노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남긴 소설과 시는 100년 후인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큰 의미로 남는다. 지금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는다. 내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 모여 미래를 바꿀 것이다. 프로그램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래도 100년 전에 비하면 세상 많이 좋아졌다”라고 느낄 것이다. 분명한 건 하나다. 미래 세대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100년 전 여성들의 용기를 되살려 현재에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현재의 용기가 미래의 힘이 되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 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는 기록 다큐멘터리이자, 크고 작은 차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을 증명해나가는 모든 이들에 대한 응원이며,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용기를 내는 이들에 대한 지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