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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은 ‘교육 다큐멘터리는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돈의 얼굴> 역시 기존의 다큐멘터리 형식과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경제는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깼다. 돈의 ‘진짜 얼굴’을 찾아 나선 제작진의 후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돈의 얼굴> 제작진 대부분은 ‘경제’ 앞에 주눅이 드는 사람들이었다. ‘경제 다큐멘터리를 하자’는 제안에 모두 자신 없어 했지만, ‘돈’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바꿔 말하자 조금씩 관심을 보였다. 한 번도 재테크라는 것을 해본 적 없이 ‘차곡차곡 거지’가 되었다는 사람, 무거운 빚을 지고 사는 ‘영끌족’, 이른바 ‘빌라왕’에게 걸린 전세 사기 피해자 등 우리 스태프만 해도 각자 ‘돈’에 대한 무수한 사연을 갖고 있었다. 대체 돈이 뭐길래, 모든 이들을 웃고 울리는 걸까. 당할 때 당하더라도 알고 당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교육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모였지만 사실 우리의 경제 상식 수준은 처참했다. 나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인데, 나이를 불문하고 ‘돈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막상 으레 갖추었어야 할 경제에 관한 교양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이 한둘일까? 경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즉 우리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자!

알 듯 말 듯 어려운 경제 수업
제작진은 약 세 달간 매주 최상엽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에게 경제 강의를 들었다. 주로 제작진이 질문을 던지고 최상엽 교수가 답을 하는 형식이었는데 초반엔 서로가 서로의 말에 황당해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최상엽 교수는 경제 초보인 우리를 위해 “돈은 허망한 존재인가요?”와 같은 철학적 질문부터 “경제학자들은 재테크를 잘하나요?”와 같은 세속적(?) 질문까지 정성껏 대답해 주었다.
‘유동성’이나 ‘금리’와 같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될 때마다 “왜 이걸 이제 알았을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금리는 시간의 가치라든지, 은행은 오늘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과 내일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만나는 곳이라든지 하는 설명을 들을 때면 제작진끼리 “나만 몰랐던 거야?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 대화를 나눴다.
아마 중고등학교 경제 수업에서 배웠겠지만 그땐 아직 돈을 벌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랐던 때라 시험을 보고 돌아서면 잊었으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두 안다. 내 계좌에 들어오는 작고 소중한 돈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지. 그래서 차근차근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가 그저 먹고 사느라 잊고 있던 화폐의 의미부터 인플레이션, 금리, 전자화폐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커다란 세계 경제의 흐름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말이다.
중학교 2학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가장 큰 목표는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한다”였다. 그래서 국내 자문 교수들을 만나든, 세계 경제 석학을 만나든 우리의 첫 요구는 늘 “중학교 2학년이 알아듣는 수준으로 설명해 주세요”였다. 우리는 약 30명의 해외 경제학자를 만났는데, 폴 터커(Paul Tucker) 하버드대 교수도, 마틴 앨리슨(Martin Ellison) 옥스퍼드대 교수도 모두 우리의 요청을 어려워하면서도 흥미로워했다. 명목화폐와 실질화폐의 차이에 대해서는 길고도 길게 설명하면서, 막상 “같은 가치의 달러와 금이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짓궂은 질문에는 한참 고민하는 모습도 재밌었다.

2008년부터 이어져 온 <EBS 다큐프라임>은 이른바 ‘아카데믹 다큐멘터리의 명가’로 불린다. ‘아카데믹’이나 ‘교육’이란 단어는 때로 ‘재미없다’와 같은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BS 다큐프라임>의 제작진은 그 선입견을 깨뜨리기 위해 늘 고군분투한다. <돈의 얼굴> 역시 경제 현상을 취재하고 분석할 뿐 아니라, 고전 경제 원리와 개념까지 전달해야 하는 경제 ‘교육’ 다큐멘터리다. 이에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돈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역시 경제는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제를 잘 아는 사람도, 하나도 모르는 사람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긴 시간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먼저, 경제 원리가 전 세계 사람들의 실생활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사례들을 취재하기로 했다. 박재영 PD가 레바논에 가서 은행강도를 만나고, 엄마에게 돈을 전달하기 위해 나이지리아에서 베냉까지 긴 여행길에 오르는 소년을 팔로우한 것은 그 고민의 결과였다. 경제 원리를 CG로만 표현하지 말고, 여러 재연 장면을 통해 전달하자는 아이디어 역시, 조금이라도 더 시청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를 위해 K-POP 뮤직비디오나 티저 영상, 일인다역이 등장하는 영화 등의 레퍼런스를 많이 찾아보았다.
<돈의 얼굴> 페르소나를 찾아라!
<돈의 얼굴>이란 제목은 기획 초반에 김미란 작가가 제안했다. 처음부터 그 제목이 참 좋았다. 정말 돈에 얼굴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제작진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만난 모든 사람에게 물었다. “돈에 얼굴이 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답은 천차만별이었다. 중국 상인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사람, 친한 친구의 얼굴이라 답하는 사람, 악마의 얼굴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동성의 개념을 열심히 설명해 주던 이타이 골드스타인(Itay Goldstein) 와튼스쿨 교수는 “물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각자 상상하는 돈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해 줄 페르소나가 필요했다. 20~50대까지 다양한 연령과 취향의 제작진이 수많은 후보 리스트를 작성했지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원하는 출연자는 염혜란 배우, 단 한 명이었다. 작가는 그를 마음속에 품고 원고를 쓰고 PD들은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콘티를 짰다. “섭외에 실패하면 페르소나는 그냥 없는 걸로 하자!”는 마음이었다.

기존의 다큐멘터리들에 연예인이 등장하는 방식(내레이션이나 프리젠터)을 벗어나 프로그램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카메라를 보며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도 개념과 원리를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친절한 은행원부터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채굴자, 대출을 알아보러 다니는 복부인까지.
염혜란 배우의 연기는 ‘돈의 얼굴’을 표현하는 데 그야말로 찰떡이었다. 총 9개의 역할을 연기해 내야 했는데, 스치듯 지나가는 작은 역할에도 캐릭터를 부여해 연기하고 그에 맞는 의상과 헤어, 소품을 직접 고민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더불어 친절하고 섬세한 내레이션은 시청자가 경제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돈은 어떤 모습인가요?
<돈의 얼굴>을 제작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신기한 공통점이 있다. 돈 앞에서 무척이나 솔직했다는 점이다. 돈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어떤 때보다 취재원들과 라포 형성이 빠르게 이뤄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민망하기도 하고, 어딘가 송구스러워하지 못했을 “돈을 좋아하세요?”, “당신은 부자인가요?”와 같은 질문에도 누구 하나 대답을 피한 사람이 없었다. 돈 이야기에는 어쩌면, 우리를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플레이션이 우리 각자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찾아간 부산의 한 방열복 공장의 기사님들 역시 거침없이 대답을 해주셨는데, 그곳에서 기사님들을 인터뷰하며, 우리가 돈에 대해 흔히 하는 말들에 진짜 경제 원리가 담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에는 금리의 개념이, “돌고 돌아야 돈이다”라는 말에는 유동성의 원리가 담겨있었다. 경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수십 년간 노동자로, 또 주부로 살아왔던 그들의 돈 이야기에는 이미 체득한 경제 원리가 녹아있었고, 그들의 인생이 묻어있었다. “돈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지난날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돈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돈이 밉지는 않다”는 소박한 대답은 오랫동안 대체 돈이 뭔지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돈의 진짜 얼굴을 봤을까?
처음 프로그램의 기획을 시작하고 팀을 꾸릴 때, “경제는 몰라서 자신이 없다”는 작가님을 “1년 동안 같이 공부하면 부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로 꼬드기려 했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린다.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방송이 나간 후 가장 많이 들은 질문 역시 재밌게도 “<돈의 얼굴> PD들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투자로 돈 좀 벌었냐?”는 것이었다. 비트코인은 샀는지, 전문가들에게 얻어들은 고급 정보는 없었는지 물어왔다. 안타깝게도 딱히 임금 외의 돈을 번 사람은 없다. 제작진에게 지난 1년은 그저 “내가 왜 부자가 되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경제라는 단어 앞에서 쪼그라드는 일은 이제 없다.
<돈의 얼굴> 6부작을 모두 본 시청자들 역시 “경제가 어렵고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구나!”를 깨달았다면, 이 프로그램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일 테다. <돈의 얼굴>이 비록 핵심을 모두 짚어주고 돈 버는 방법을 확실히 알려주는 일타 강사의 역할은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왜 경제를 배워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고 학습 동기를 마련해주는 콘텐츠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