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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 보수 매체 폭스뉴스가 약 1조 343억 원의 배상금을 물게 됐다. 2020년 대선의 전자 개표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보도한 데 대해 해당 개표기 제조업체가 낸 명예훼손 소송의 결과다. 언론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내려진 이례적 판결의 전말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오바마 정부 당시 부통령을 지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와 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대결로 펼쳐진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으로 끝났다. 하지만 대선 직후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트럼프 후보는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투표 조작설을 제기했고, 각종 음모설이 난무해 전자 개표기가 조작됐다는 주장까지 펼쳐졌다. 이는 몇 달 후인 2021년 1월, 극성 트럼프 지지자들의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무장 점거 사태로 이어져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뉴스 매체들은 대선 이후 제기된 의혹에 대해 앞다퉈 보도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매체 폭스뉴스(Fox News)가 있었다. 폭스뉴스는 대선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제기한 대선 결과 조작 의혹에 힘을 보탰다.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들은 대선 결과 조작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슈의 중심에 있던 전자 개표기 업체는 결국 폭스뉴스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2023년 4월, 폭스뉴스는 해당 개표기 업체인 도미니언보팅시스템(Dominion Voting Systems)에 7억 8,750만 달러(약 1조 343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배상할 것으로 합의했다. 이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공개된 명예훼손 소송 합의금 중 가장 큰 액수다. 수정헌법 1조에 명시돼 있는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판결이 내려진 것인지 그 내막을 살펴보자.
소송은 왜 시작됐나
2020년 11월 3일, 미국에서는 59번째 대선이 치러졌다. 평소 트위터를 통해 직접 소통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한 후 트위터를 통해 바이든 후보가 투표 결과 조작으로 승리했다며 대선 결과 불복을 시사했다. 대부분의 뉴스 매체들은 전임 대통령의 재선 실패와 선거 결과 불복 소식을 보도했으나, 평소 트럼프 후보에 우호적인 논조를 취하던 폭스뉴스는 유독 전자 개표 조작 가능성을 수개월에 걸쳐 반복적으로 보도했다. 대선 당시, 50개 주 가운데 조지아(Georgia), 미시간(Michigan),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위스콘신(Wisconsin) 등 경합주(swing state)의 대부분을 포함한 28개 주에서 동일한 회사의 전자 개표기가 사용됐는데, 이는 바로 도미니언보팅시스템이었다. 폭스뉴스는 도미니언보팅시스템이 투표 결과를 조작했을 수 있다는 보도를 되풀이했다. 트럼프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도미니언이 전자 개표기를 이용해 표를 바꿔치기했기 때문이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중국 공산당이 트럼프 후보가 패배하도록 모두 조종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펼쳐졌다. 이러한 근거 없는 주장은 폭스뉴스 채널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욱 증폭됐고, 결국 도미니언보팅시스템은 2021년 3월, 폭스뉴스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도미니언보팅시스템은 2020년 1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폭스뉴스의 대표 앵커들과 출연진이 전자 개표기 조작설을 유포해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가로 16억 달러(약 2조 1,000억 원)를 배상하라는 명예훼손 소송을 델라웨어 상급 법원에 제기했다. 도미니언보팅시스템 측은 폭스뉴스의 대표 앵커 마리아 바티로모(Maria Bartiromo)1), 터커 칼슨(Tucker Carlson)2), 루 돕스(Lou Dobbs)3)를 포함한 진행자들이 개표기 조작에 대한 허위 사실을 반복적으로 퍼뜨렸을 뿐만 아니라, 시드니 파월(Sidney Powell) 변호사, 루디 줄리아니(Rudy Giuliani) 전 뉴욕 시장과 같은 출연자들이 방송에서 근거 없는 음모론을 주장하도록 방조한 점을 강조했다. 트럼프 후보의 변호인이었던 루디 줄리아니는 폭스뉴스에 출연해 도미니언보팅시스템이 선거 조작을 위해 설립된 회사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고, 이는 여과 없이 방송됐다.
쟁점은 허위 사실 유포의 고의성
도미니언보팅시스템이 소송을 제기한 뒤 2021년 5월, 폭스뉴스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1조에 근거해 소송을 각하할 것을 델라웨어 상급 법원에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해 소송은 그대로 진행됐고, 2023년 4월, 기존에 16억 달러를 요구했던 손해 배상 소송은 폭스뉴스가 7억 8,750만 달러를 배상한다는 합의로 마무리됐다. 이는 미국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공개된 합의금 중 가장 큰 금액일 뿐만 아니라, 폭스뉴스의 2022년 총 매출(140억 달러)의 약 5%, 그리고 현금 보유액(41억 달러)의 약 20%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폭스뉴스의 재정에 적지 않은 타격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재판 과정에서 폭스뉴스는 지속적으로 수정헌법 1조에 의거한 변론을 펼쳤지만, 법원은 결국 도미니언보팅시스템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표현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1조가 미국 사회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언론사가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합의로 마무리 된 해당 사건은 현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재판에서의 핵심 쟁점은 개표 조작설이 허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서 나아가서, 폭스뉴스 측이 개표 조작설이 허위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유포했느냐로 모아졌다. 이는 허위 사실 유포에 있어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가 있었는가를 입증하는 것으로, 진실을 외면한 고의성에 관한 판단이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폭스 측 내부 커뮤니케이션 기록에 따르면, 모기업인 뉴스코퍼레이션(News Corporation)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 회장과 수잔 스콧(Suzanne Scott) 폭스뉴스 CEO를 포함한 경영진뿐만 아니라, 개표 조작설을 전달한 일부 뉴스 앵커들 또한 이 주장들이 사실무근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거가 없을지라도 선동적인 방송을 고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시청률과 수익성만을 추구한 방송에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 설 곳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합의 사실이 공개된 후 폭스뉴스는 성명서를 내 일부 보도가 잘못된 점은 인정하며 이번 합의가 폭스뉴스의 저널리즘에 대한 헌신을 반영한다고 발표했다. 도미니언보팅시스템 측 변호인 저스틴 넬슨(Justin Nelson)은 “거짓에는 대가가 따른다”며 오늘의 합의가 “진실과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상징”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사건은 현재 미국 사회에 가짜뉴스가 끼치는 해악을 막는 것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보다 다급한 과제라는 것을 법원이 인정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어느 곳보다 폭넓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지만 의도를 가지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행위는 수정헌법 1조로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줬다.
판결 이후의 동향
2023년 4월 18일, 폭스뉴스는 도미니언보팅시스템 측에 거액의 합의금을 지급하기로 한 직후 스타 앵커인 터커 칼슨과의 계약 해지를 발표했다. 터커 칼슨은 폭스뉴스의 대표 정치평론가이자 앵커로서 2016년부터 본인의 이름을 건 뉴스쇼를 진행해왔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방송을 통해 개표기 조작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했기에 이에 대한 문책성 해고를 당한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그가 재판 과정에 증인으로 참석해 소속 조직인 폭스뉴스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책임을 떠넘기려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폭스뉴스에서 해고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지난 5월 9일, 터커 칼슨은 트위터에서 1인 뉴스쇼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존의 뉴스 시스템을 강력히 비판하며 진정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플랫폼인 트위터에서 새로운 형식의 뉴스를 보여주겠다고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2022년 일론 머스크가 CEO로 취임하며 언론의 자유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과감한 행보를 잇따라 보여준 트위터이기에, 논란의 중심에 있던 앵커가 플랫폼을 옮겨 전할 뉴스는 어떨지 지켜봐야 하겠다.
1) 'Mornings with Maria', 'Sunday Morning Futures with Maria Bartiromo' 진행
2) 'Tucker Carlson Tonight' 진행
3) 'Lou Dobbs Tonight' 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