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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적·평균적으로 출생률은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 낮은 경향을 보인다.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비율이 높아진다.
발전된 세상에는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넘친다. 무엇보다 안전하다. 고소득 일자리도 많고, 먹을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다. 빨래와 청소와 요리를 도울 문명의 이기가 넘친다. 혼자 살아도 충분히 즐겁고 편하고 자유롭다.
반면 물질적 삶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많이 벌지만, 그만큼 많이 쓴다. 육아를 위한 노동과 서비스, 상품 구매에는 특히 더 큰 비용이 든다. 아이를 낳고 기르지 않으면 벌 수 있는 돈을 못 버는 기회비용을 감안하면 부담은 더 커진다. 즉, 세상이 발전할수록 혼자 살기는 편해지는데, 가족을 꾸리거나 육아하는 비용은 점점 커진다.
“출생률은 행복해서 떨어진다.”
이것이 경제학이 현대 출생률 저하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경제 이론을 동원해 통계적이고 평균적으로 세상의 모습을 추출한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개리 베커(Gary Becker) 이후, 이런 경제학의 학제 월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회·정치·역사·미디어 등 경제학과 무관하던 분야의 주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경제적 인센티브가 미디어를 규정한다
언론인들은 미디어를 ‘진실’을 수호하고 ‘불편부당한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라고 믿지만, 경제학자는 다르다. 미디어는 인센티브 즉, 경제적 유인 때문에 변화하는 산물이다. 인쇄라는 신기술이 값비싸던 시기, 미디어는 ‘기관지’였다. 인쇄비용을 감당할 정치·경제력이 있는 집단의 이익에 헌신하며 생존했다. 기술 혁신으로 싼값에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자 ‘대중지’가 등장했다. 신문은 더 싸졌고, 더 많이 팔렸고, 동시에 광고 수익이 급증했다. 이제 한쪽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면 곤란하다. 객관주의와 프로페셔널리즘을 표방한다. 미디어 비즈니스 모델이 통째로 바뀌었다.
지속적인 수요 팽창과 경쟁 속에 대중지는 ‘차별화’로 들어선다. 이를테면 영국의 더타임스는 사회 지도층 인사를 공략하는 논조로, 데일리텔레그래프는 도시 중산층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분화했다. 미국의 퓰리처는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의 시대를 열었다.
방송이 등장하자 신문은 과감한 투자로 방송이 흉내 못 낼 콘텐츠로 눈길을 돌린다. ‘탐사보도’다. 워터게이트, 베트남전 양민 학살 등 세상을 뒤흔든 강력한 특종이 나왔다.
디지털 시대가 등장하자, 비즈니스 모델은 뒤바뀐다. 온라인에서 정보 생산과 유통 비용은 ‘0’에 수렴한다. 인쇄도, 배달도 없다. 무한 경쟁 속에 뉴스는 거의 공짜가 됐다. 전통 미디어는 수익성 악화와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그러니까 “모든 저널리즘의 명멸은 변화한 뉴스 시장 여건에 적응한 뉴스미디어들의 선택의 결과였다”는 것이 《감춰진 언론의 진실》이 소개하는 미디어 경제학이다. 이렇게 경제적 인센티브를 중심으로 미디어를 재구성하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
미디어 경제학의 발견
△편향성이 공익을 증진시킨다
‘보이지 않는 손’ 효과다. 개별적 편파성은 불공정으로 인식되겠으나, 수많은 편향 보도가 서로 다른 정파를 모두 공격하면 결과는 달라진다. 각 정파는 (분하지만) 생존을 위해 ‘정당한 비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중도적 정책’으로, 가운데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극단화보다는 타협으로 향한다. 미디어의 개별적 편파성이 사회적 차원에서는 공익이 될 수 있다.
△더 경쟁하면 덜 편향된다
‘1850~1950년 미국 미디어의 정파성 연구’는 기념비적 연구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과 예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존 베이츠 클라크(John Bates Clark)상을 수상한 매튜 겐츠코우(Matthew Gentzkow) 등이 함께했다.
경쟁이 지속적으로 증가한 이 100년 동안 자기편을 추켜세우는 단어 ‘정직(Honesty)’과 상대편을 비난하는 단어 ‘중상모략(Slander)’이 신문에 등장하는 빈도가 전반적으로 줄었다. ‘경쟁이 신문의 정치적 편향을 감소시킨다’는 결론이 통계적 실증으로 도출됐다.
△독자가 미디어를 변화시킨다
미디어는 소비자(독자)가 주도한다. 더 많은 독자가 보아야 판매와 광고 수입이 확보된다. 공급자(미디어)는 자신이 원하는 뉴스가 아니라 수요자가 원하는 뉴스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선 ‘편향된 족벌 사주’나 ‘민노총 기자’, ‘조작하려는 재벌과 정부’ 등 공급자나 공급자를 포획하려는 주체를 향한 의심이 쏟아지기에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다만 경쟁이 충분히 활발할수록 그렇고, 여러 지표에서 한국의 미디어 시장은 충분히 경쟁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경제학은 이렇게 냉정하고 통계적이고 실증적이며 시장적인 눈으로 미디어를 해부한다. 때로는 몰가치적이고 역설적이어서 쉽게 수긍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다만 실증을 따라가면 규범적 인식의 한계를 살필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쪽이 흥하면 다른 쪽이 망한다
온라인 미디어 vs. 기존 미디어
미디어 업계에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론사 매출은 정체·감소 중이다. 직원의 수와 1인당 소득도 그렇다. 미디어는 성장을 멈췄다. 황금시대는 갔다. 걱정은 똑같다. 뉴스는 공짜고, 투자는 줄어든다. 클릭이 목적인 뉴스만 범람한다. 각 언론사의 디지털팀은 오늘도 제목 장사와 연성뉴스 경쟁에 몰두한다. 디지털에서 잘한다는 언론사일수록 온라인에서 낯 뜨거운 제목 경쟁을 선도한다. 미디어는 점점 비루해진다.
정치적으로는 확증편향이 걱정이다. 특히 유튜브와 페이스북은 소비자가 좋아할 것만 보여주는 알고리즘을 통해 집단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필터버블’을 형성한다. 진영 바깥 의견은 들리지 않고, 따라서 타협도 없다. 이 공간의 1인 미디어들은 진영논리에 복무하며 클릭과 슈퍼챗(후원금)을 얻으려 몰두한다. 소비자의 편향성은 강화되고 민주주의 기반이 침식된다.
어라, 이상하다.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미디어의 편향을 줄이고 중립성을 강화한다고 했는데, 도리어 경쟁이 좋은 미디어를 내쫓는다고? 또 사상의 경쟁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필터버블 속에 갇혀 민주주의가 침식된다고?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경제학자들은 경제 개념 하나를 가져온다. 대체성이다. 온라인 미디어와 기존 미디어는 같지 않다. 대체재 관계에 있다. 한쪽이 흥하면 다른 쪽이 망한다. 그래서 새 미디어가 늘 기존 미디어와 보완적 관계를 형성하며 경쟁 속에서 함께 성장하던 과거 200년 언론의 역사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래서 디지털이 범람할수록 종이신문과 전통 미디어의 기반은 위축된다.
기존 미디어는 흔히 이 위기를 ‘구독 수입’의 증가로 극복하려 몸부림치지만, 두 측면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디지털에 공짜가 넘치니 유료화 자체가 어렵다. 뉴욕타임스나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극히 일부 미디어만 성공한다. 다른 한편, 구독 수입 의존은 미디어를 다시 이른바 기관지화(化) 한다. 구독료를 낼 만큼 열혈인 독자의 취향에 복무할 인센티브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디어의 편향성이 강화된다. 다만, 경제학자들은 온라인 미디어 플랫폼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침식한다는 주장은 아직 실증되지 않았다고 믿는 것 같다.
페이스북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미디어 경제학의 지평을 열어가는 경제학자 겐츠코우가 집중하는 연구가 바로 이 분야다. 그는 많은 동료 학자와 함께 지난해 7월 네이처·사이언스지 등에 방대한 실증연구를 발표했다. 페이스북이 정말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지, 정치 성향을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연구다.
우선 실험으로 거대한 데이터를 확보했다. 페이스북에서 좋아할 것 같은 콘텐츠를 더 많이 노출시키는 알고리즘을 제거해 봤다. 친구들의 추천 콘텐츠도 제거해 봤다. 노출되는 정치 뉴스의 양이나, 생각을 공유하는 콘텐츠 노출량을 1/3로 줄여도 보았다(메타는 이 과정에 전폭적으로 협조했고, 연구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결론은 싱겁다. 페이스북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한다는 증거는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치 인물이나 이슈에 대한 양극화 정도에는 변화가 없었고, 사용자의 정치적 태도에도 변화가 없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겐츠코우는 ‘페이스북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주장은 실증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
“살펴보니 정치적 문제는 비교적 덜 걱정스럽다. 다만, 페이스북이 정신 건강과 일상적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분명하다. 잘못 사용하면 분명히 우울증을 유발하고, 행복감을 줄인다.”
그러나 경제학을 맹신하지는 말지어다
이기심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경제학의 학제 월경에는 비판도 많다. 우선은 인간은 계산기가 아니라는 항변이 있다. 게리 배커는 인간이 출산을 결정할 때 육아의 비용과 아기가 가져다줄 효용을 비교해 결정한다는 틀을 세워 비판받는다. 아기가 기쁨이라는 효용을 주는 상품이라고? 인간을 차디찬 이성과 합리적 계산만으로 정의하다니, 어떤 통찰이나 깊이 있는 분석도 기대할 수 없다는 공격이 이어졌다.
동시에 통계와 평균은 구체적 진실을 가릴 수 있다. 합계출산율이 0.7에 불과해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국가’ 한국을 바라보라. 너무나 비싼 부동산, 영혼과 시간을 갈아 넣으라는 직장, 육아휴직자를 ‘부서의 짐’으로 여기는 문화가 뿌리 깊다. 젊은이들은 성공과 생존을 위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한다. 이 슬프고 잔혹한 풍경을 단순히 더 잘살게 되어서라는 평균적 숫자만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평균이 병리적 현상을 가릴 때, 평균적 인과관계의 편협함을 의심해야 한다. 아니면 길을 잃는다.
동시에 ‘실증’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페이스북이 편향을 강화하거나, 정치 성향을 변화시킨다는 증거가 없다’는 명제는 ‘페이스북은 정치 편향을 강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특정 기간(미국 대선 전 3개월) 특정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조사했는데 증거가 없더라는 뜻일 뿐이다. ‘현시점의 최선 추정’ 정도로 간주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