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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사기’로 불리는 코미디언 이수지가 지난 2월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 콘텐츠로 큰 화제가 됐다.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아이를 키우는 ‘제이미맘’ 캐릭터로 이 지역 엄마들을 패러디한 것. 웃음을 주기 위한 설정이었음에도 다양한 논란을 낳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 사회적 함의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지난 2월, 갑자기 명품 의류 브랜드 몽클레르가 화제의 중심이 됐다. 진원지는 코미디언 이수지의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 그는 해당 채널에서 지상파나 종편의 휴먼다큐 형식을 패러디한 ‘휴먼페이크다큐 자식이 좋다’를 통해 네 살 아들을 둔 강남 대치동 엄마 ‘제이미맘’ 캐릭터를 연기했다. ‘인간 복사기’ 수준의 모사 능력을 지닌 이수지의 연기는 여기서도 디테일이 돋보이는데, 아이의 사소한 행동에서도 영재 모먼트(moment)를 찾아내는 호들갑과 교육열, 한국어와 영어가 불특정하게 혼재된 화법, 좋은 차로 아이를 학원에 등원시킬 재력이 있어도 끼니를 차에서 때워야 하는 고단함 같은 요소들이 짧은 영상 안에 꽉 들어차 있다.
그리고, 몽클레르 패딩. 강남과 강남 아닌 곳을 구별 짓는 명품인 동시에, 강남의 젊은 학부모 사이에서 유별나게 튀지 않고 조용히 섞여 들어갈 수 있는 아이템으로서의 몽클레르 패딩은 이번 패러디에서 가장 직관적이고 가시적으로 대치동 엄마 캐릭터를 드러내는 소품이 됐다. 그래서일까. 한 달 만에 조회수 800만을 기록할 정도로 영상이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내자, 강남 지역 당근마켓에 몽클레르 패딩이 매물로 그렇게 많이 나온다는, 반쯤은 도시 괴담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토록 강력한 후폭풍을 만들어내며 이수지의 패러디는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됐다. 이것은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사교육에 대한 풍자인가, 대치동의 젊은 엄마들을 특정해 비하하는 조롱인가. 수많은 언론이 풍자 대 조롱이라는 타이틀로 네티 29즌 의견을 전하는가 하면 MBC <생방송 오늘 아침> 같은 지상파 프로그램에서도 해당 영상을 풍자와 조롱 중 무엇으로 봐야 하는지 변호사 패널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왜 이런 주제를 변호사에게 묻는 건지는 의문이다).
대치맘 패러디
무엇을 짚고, 무엇을 놓쳤나
논쟁이 벌어진다는 건 이쪽이든 저쪽이든 상당한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네티즌 의견을 적당히 긁어와 자극적인 타이틀 장사만 하는 기사나 개그는 개그로만 보자는 하나 마나 한 주장도 많지만 해당 영상과 이를 둘러싼 여러 맥락을 고려한 좋은 글들이 영상을 지지하는 관점으로도, 어느 정도 비판적인 관점으로도 등장했다. 강지원 한국일보 기자는 이수지가 모사한 대치동 엄마들에 대해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낳은 기형적 교육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간파한 입시 전문가”이며 “이수지는 대치동 엄마로 대변되는 사교육 열풍과 열풍을 불러일으킨 불공정한 사회구조를 영리하게 포착해 이를 풍자한다”고 평가한다. 이수지의 모사가 단순히 개인적 삶의 태도를 희화한 게 아닌 그 개인에 체화된 구조적 병폐의 차원을 드러냈다는 의견이다. 재밌는 건 이수지의 영상에 대해 비판적인 쪽에서도 구조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남지원 경향신문 젠더데스크는 “무슨 얘기를 하든 사교육 문제의 구조적 원인은 지워지고 ‘애 잡는 탐욕스러운 엄마들’이 문제라는 결론”이 나는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를 환기하며 “여성은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교육한다는 성 역할을 부여받아 사교육 광풍의 수행자가 되었을 뿐”임에도 이 구조적 병폐의 주체로 지목되는 것의 부당함에 대해 말한다. 이우연 한겨레 기자 역시 “교육과 돌봄은 여전히 여성의 역할이기에 대치맘과 함께 욕먹을 대치파파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씁쓸해하며 “대치맘이 사교육 광풍의 최종 악당”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이수지 영상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도 왜곡된 사교육 시장의 구조적 부조리를 인정하되, 그런 구조적 문제가 대치동 엄마로 환원되는 것에 여성 혐오라는 또 다른 구조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절충안도 있다.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저자 신성아는 한겨레21 기고를 통해 “<핫이슈지>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댓글에 있다”며 해당 영상에 뒤따른 여성 혐오적 댓글 문제를 지적하고 “여성에 대한 이 부정적 고정관념이 바로 제이미맘을 ‘지나치게 희화화’한다”고 텍스트의 내적 결함이 아닌 잘못된 소비 양상의 문제로 사태를 바라본다.
가장 큰 걸림돌은 풍자 대 조롱이라는 이분법
사실 이쯤 되면 구태여 이 논쟁에 한 줄을 보태기보단, 황희 정승이 되어 이쪽 말도 경청할 만하고, 저쪽 말도 경청할 만하다고 슬쩍 빠져나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실제로 이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할 만한 좋은 근거와 자원들은 거의 다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건 이 자원들을 통해 <핫이슈지>에 대해, 풍자와 조롱의 경계에 대해, 창작자의 책임 범위에 대해 생산적 논의를 할 교량을 재구성하는 것이리라.
이 재구성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풍자 대 조롱이라는 이분법이다. 개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마치 무결한 코미디와 아닌 코미디를 가를 기준처럼 제시되는 건 잘못이다. 어떤 종류의 허위를 비웃고 조롱하지 않고 풍자할 수 있는가? 풍자의 대상이 모욕을 느낀다는 것이 풍자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가? 두 차원은 상당히 중첩되어 있으며 특히나 이수지의 제이미맘처럼 패러디 대상에 대한 논쟁적 디테일이 살아있는 코미디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가령 꽤 많은 비난을 받았던 <SNL Korea>의 한강 작가 모사는 어떠한 구조적 차원도 환기하지 않고 그저 그의 외모와 말투를 희화화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 없는 조롱이며 창작자의 의도를 긍정적으로 살펴볼 구석이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두 차원의 경계는 불분명하며 실은 그 불분명함에 해석을 풍부하게 해줄 맥락의 복잡함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수지의 패러디가 흔한 여성 혐오로 소비되는 것에 취약하다는 의견에 백 퍼센트 동의하지만, 또한 제이미맘이 <오징어게임 2> 흥행으로 제기차기가 수행평가로 부상할 것 같아 그 전에 미리 제기차기 과외를 시키겠노라 하는 장면에선 우습기보단 등골이 서늘했다. 상위 중산층의 교육 제도 해킹을 보는 느낌이어서다. 하지만 정작 제도를 해킹하는 사교육 전문가로서의 맥락 대신 그저 제기차기라는 행위의 우스움만으로 제이미맘을 비웃는 반응 앞에서 나는 위축된다. 진짜 문제는 풍자냐 조롱이냐가 아니라 제법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한 풍자조차 동시에 엉뚱한 곳에 피해를 입히는 조롱의 오발탄이 된다는 사실이다.
해석의 공동체,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논의의 방향은 이수지의 패러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아니라, 그 해석을 나누고 공유할 해석의 공동체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느냐는 것으로 전환된다. 풍자를 맥락의 이해가 중요한 고맥락 개그로 범박하게 요약한다면, 그만큼 다양한 맥락을 충분히 공유하고 고려하는 해석의 공동체를 전제해야 풍자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이걸 결국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당연하지만 김빠지는 결론으로 귀결하려는 건 아니다. 해석의 공동체 문제라는 점에서, 나는 창작자의 의도와 텍스트보단 소비되는 경향을 비판한 신성아의 의견에 상당 부분 동의하지만 그것이 이수지의 책임을 지워주진 못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러한 해석의 공동체에 대해 고려하는 것까지가 창작자의 의무 중 하나다.
나는 이수지가 극성 엄마에 대한 여성 혐오적인 반응에 편승해 이번 영상을 만들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치동 엄마에 대한 희화화가 사교육과 계급 재생산이라는 맥락보단 돈 잘 버는 남편을 둔 강남 젊은 여성의 허영으로 받아들여지고 조롱당할 가능성에 대해선 충분히 고려해야 했으며 몰랐다면 안일한 것이다. 이수지의 패러디는 대상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디테일을 놀랍도록 잘 살리지만, 그러한 사적 차원에 내재된 구조적 차원을 서사화하는 데는 실패하거나 관심이 없다.
여기서 다시, 몽클레르 이야기로 돌아오자. 몽클레르는 계급적 허위의식 혹은 아비투스에 대한 상징적 물적 증거인가, 명품 좋아하는 여성의 허영에 대한 흔한 편견의 증거인가. 당연히 두 방향 모두 해석 가능하다. 다만 현재 이 개그를 소비하는 해석의 공동체는 후자를 재확인하고 욕하는 것에 익숙하며, 그럴수록 전자의 문제의식은 휘발된다. 이수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몽클레르라는 디테일을 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의 상징적 차원을 서사 안에서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뛰어난 연기력과 별개로 서사적으로 ‘휴먼다큐 자식이 좋다’는 안일하고 뻔한 경로로 흐른다. 풍자적 요소가 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으나 얄팍한 풍자다. 여기서 나는 성공한 풍자에 대한 옹호, 저열한 조롱에 대한 비난 대신 3번째 선택지를 제안하고 싶다. 더 나은 개그에 대한 요청. 이수지의 디테일 개그가 더 좋게 발아할 가능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더 좋은 개그와 내러티브의 제시가 결과적으로 더 성숙한 해석의 공동체를 만들리라 믿기 때문이다. 몽클레르라는 아이템 하나만으로도 현실에 대한 정말 다양한 비판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