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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시기 언론의 중요한 역할은 의제 설정이다. 이때가 잠재됐던 다양한 사회 현안을 공론화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선에서 우리 언론은 본연의 역할은 뒷전에 둔 채 경마식 보도, 갈등 중심 보도에 치중했다. 제21대 대선 보도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점검해 본다. 편집자 주
대통령 선거는 단연코 가장 중요한 국가 이벤트다. 이는 국가의 최고 리더를 선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간 사회 저변에 잠재됐던 주요 현안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려 국민적 토론과 검증을 거쳐 해법을 모색하고 국가적 쇄신과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정치인들이 가장 전향적인 태도와 열린 자세로 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시민들 또한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 의식이 최고조에 이르는 때인 만큼 사회적 의제를 심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된다.
선거 시기 언론의 의제 설정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언론은 수많은 이슈 중에서 어디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것인지 결정한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곳에 대중의 관심과 시선이 머물고 그렇지 않은 곳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안타깝게도 이번 대선에서도 언론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보다는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기 쉬운 정쟁과 갈등 중심의 보도에 치우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과거와 비슷하게 주요 언론의 선거 보도는 여론조사 수치를 앞세운 경마식 보도, 정쟁을 부각하는 갈등 중심 보도, 특정 후보 훈수 두기식 보도가 주를 이루며, 사회적 의제에 대한 심층적 탐구와 공론화 기능은 상대적으로 미흡했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은 불법 계엄령과 내란 혐의로 대통령이 파면된 이후, 여전히 계엄을 옹호하는 세력과 이를 비판하는 세력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특수한 정치적 환경에서 치러져 갈등 요소가 부각되는 측면이 있었다. 또한 정치권이 지속가능한 정책 의제를 공론화하고 사회 개혁 방안을 제시하기보다 상대 후보에 대한 흠집 내기, 정쟁 유도, 이슈 왜곡에 집중하면서 생산적인 선거 의제를 형성하지 못한 잘못이 컸다. 언론 또한 선거라는 국가적 전환기의 중심에서 공적 담론의 방향을 주도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정쟁 프레임에 편승하거나 정치 공방과 갈등적 요소에 매몰됨으로써 국가적으로 중대한 의제에 대한 심층적 탐구와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권력 구조 개편 논의 이끌어내지 못한 언론
제21대 대선 보도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권력 구조 개편과 선거제도 개혁 등 정치 개혁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불과 8년 전 권력 사유화, 비선 실세 개입, 정경유착 등으로 인해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파면된 데 이어 또다시 대통령이 반민주적, 반헌법적 계엄을 일으켜 파면되면서 대통령 권한 남용 방지 및 권력 배분을 위한 제도 개편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강하게 제기됐다. 현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은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검찰총장, 국정원장, 방송통신위원장, 각 군의 최고 지휘관, 각국의 대사, 한국은행 총재 등 국가 핵심 공직자들을 임명함으로써 행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 외교, 안보, 언론 등 주요 권력기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대통령령과 법률 거부권 등을 통해 입법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고,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여당의 공천 과정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등 정치 전반에 걸쳐 대통령 1인에게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번 계엄 사태처럼 극단적 행정조치를 감행해 헌법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은 현재의 권력 구조가 가진 제도적 취약성과 위험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언론은 이번 대선 과정에서 이러한 중대한 정치 개혁 의제를 주요 쟁점으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책임총리제,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분권형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 정부 형태 개편을 비롯해, 4년 중임제 도입을 통한 권력의 안정성과 책임성 확보 및 총선의 중간선거 기능 부여, 결선투표제 도입을 통한 정당성 강화, 지방분권 확대 등 실질적 개혁안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1960년 4·19혁명 이후 9개월간의 짧은 의원내각제 시기를 제외하고 줄곧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다른 정치제도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제한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체제 개편은 더욱 신중하고 풍부한 공론을 필요로 하며, 언론이 그 중심에서 균형 잡힌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의 장을 열어줄 필요가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도 함께 논의됐어야
권력 구조 개편과 함께 이번 대선에서 진지하게 논의됐어야 할 또 하나의 핵심 과제는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차기 총선까지 아직 시간이 있기는 하나, 선거를 앞두고 매번 흐지부지된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선거제도 개혁은 정치 개혁 의제로 묶여 공론화될 필요가 있었다. 현행 소선거구제하에서는 거대 양당이 정당 득표율을 훨씬 상회하는 의석을 차지하게 되는 반면, 군소정당을 선택한 표는 대부분 사표가 되는데, 이러한 ‘정당 득표율과 당선 의석 비율의 불비례성’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인 ‘표의 등가성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한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201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연동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도를 제안했고, 국회는 2020년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우여곡절 끝에 부분적으로나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창당하는 기만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선거제도가 민주적으로 개혁되기는커녕 국민적 조롱과 냉소의 대상이 됐고 정치 전반에 대한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선거제도 개편은 사표를 줄이고 국민의 뜻에 따라 당선 의석 비율을 정하는 민주주의 원칙을 실현하는 목적 외에도, 거대 정당의 독점을 막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정당들의 정치적 진입을 용이하게 만들어 다당제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민은 가치와 신념, 직업, 교육 수준, 성별, 연령, 거주지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돼 있는데, 이러한 이질성과 복합성을 정당 체계가 반영하지 못할 경우 정치적 소외와 불신은 심화되므로 다당제를 통해 ‘시민과 닮아 있는 의회’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당제 의회 구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여러 정당이 원내에 진출하게 되면 좌-우, 보수-진보라는 이분법적인 틀 안에서 극도로 양분된 정국의 긴장이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점점 더 양분돼 가던 우리 사회는 최근 계엄 사태를 전후로 이념적 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지역별로 상이한 정당 지지 기반과 결합되면서 거대 양당은 이성적 경쟁보다는 감정적 적대와 진영 논리에 의존하면서 더욱 극단화되고 있다. 거대 정당 중심의 양당제는 지금과 같은 적대적 정치 양극화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양당 구도에서는 상대 정당의 실패가 곧 자신의 성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상대를 흠집 내고 발목을 잡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정치 행태는 정당 간 상호 혐오를 조장하고, 각 진영의 극단화를 부추기며, 사회 전체의 통합을 저해한다. 실제로 수십 년간 양당 체제를 유지해 온 미국(민주당 vs 공화당)과 영국(보수당 vs 노동당)에서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정치적 감정 극화 문제를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1대 대통령 선거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정상화와 위성정당 금지를 포함한 선거제도 전반에 대한 전면적 재논의가 이뤄졌어야 할 시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비례대표 의석 확대, 중대선거구제 도입, 도농복합선거구제 개선, 권역별 비례대표제 전환, 개방형 정당명부제 시행, 석패율제 및 이중후보등록제 도입 등 대표성의 강화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대안들이 충분히 논의됐어야 한다. 선거제도 개편은 정치 개혁의 출발점이자 민주주의 심화를 위한 핵심 과제로, 향후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이고 진지한 공론을 이어가야 할 분야임은 분명하다.
정치 개혁, 정치권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어
권력 구조 개편과 선거제도 개혁을 포함한 정치 개혁 논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거대 정당의 의회 독점, 극단화된 정치 양극화가 최고조에 이른 직후였던 제21대 대통령선거 시기에 반드시 공론화됐어야 할 핵심 과제였다. 그 시점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질서의 중대한 위기를 거친 직후였으며, 대통령 권한 남용과 권력 집중에 따른 제도적 취약성이 다시금 명백히 드러난 시기였다. 정치 개혁은 성격상 복잡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해관계자들의 권한과 기득권을 위협해 회피할 만한 사안이기 때문에 일상적 국면에서 공론화되기 어렵다. 이러한 사안이 사회적 의제로 비중 있게 다뤄지려면 정치적 전환기나 충격이 계기가 돼야 하며, 제21대 대선은 그와 같은 조건을 가장 충족한 시점이었다. 실제로 탄핵 심판이 이뤄어지는 과정에서는 일시적으로 권력 구조 개편과 선거제도 개선에 대한 담론이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진입한 이후, 이러한 논의는 표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정쟁과 지지율 경쟁에 매몰된 정치권과 갈등 프레임을 반복한 언론 모두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선 종료 후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벽보를 철거하고 있다. 제21대 대선 보도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권력 구조 개편과 선거제도 개혁 등 정치 개혁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뉴스1
정치권의 소극적 태도는 일정 부분 예견된 측면이 있다. 현행 권력 구조와 선거제도의 수혜자인 정치 세력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권한의 축소를 전제로 하는 권력 구조 개편은 권력을 이미 확보했거나 확보할 가능성이 높은 세력에게는 정치적 손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일부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정치 개혁을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변경하는 등 진정성 없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선거제도 개편의 경우 그 저항은 더욱 구조적이다. 현행 국회의원 의석의 약 85%가 지역구로 구성돼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지역구를 양보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하는 개편안에 전향적으로 찬성할 정치인은 극히 드물다. 또한 견고한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기존 소선거구제의 수혜를 누려온 거대 정당들의 입장에서도 위성정당 금지 및 비례의석 확대를 통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정상화, 그리고 다당제 환경의 조성은 환영할 만한 변화가 아닐 것이다.
정치 개혁 의제 설정은 궁극적으로 언론의 역할
정치 개혁은 정치 시스템의 건강성과 대표성을 제고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핵심 과제다. 폐쇄적인 정치구조의 탈피, 권력의 과도한 집중 해소, 지역주의에 기반한 파괴적 경쟁의 완화, 정치 양극화 해소, 국민의 정치적 의사가 보다 정확히 반영되는 의회 구성,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다원적 대표성의 확보 등은 정치 개혁을 통해 추구해야 할 주요 목표들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궁극적으로 보다 안정적이고 포용적이며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성숙한 민주주의 정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필수 전제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정치 개혁 논의의 선도적 매개자로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 개혁의 필요성은 김대중 정부 이래 역대 정권을 거치는 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으나, 정치권의 기득권 지키기에 막혀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지 못한 채 번번이 좌초돼 왔다. 여러 번 경험했듯이 개혁의 대상은 개혁의 주체가 되기 어려운 만큼 정치권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추진되기 어려운 구조다. 따라서 정치 개혁을 공공의제로 공론화하고 사회적 동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적극적인 의제 설정 역할이 반드시 요구된다. 정치 개혁 이슈는 실생활 이슈가 아니면서도 복잡해 공공의제로 부각되기 어려우므로, 대통령의 불법적 계엄 시도와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를 직면한 직후 치러진 제21대 대통령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 개혁의 필요성과 긴박성이 높았던 시기였다.
물론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언론이 개혁 의제를 선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간 언론은 다양한 사안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끈 경험을 갖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연속 보도, 미투 운동의 확산을 주도한 탐사보도 등은 언론이 의제 설정을 통해 사회적 전환점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언론이 정치권 내부의 이해관계와 정략적 계산에 휘둘리는 주장에 편승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원칙에 따라 정치 개혁이 ‘왜 필요한가’,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대안이 있는가’에 대한 심층 해설, 비교 분석, 시민 참여형 여론 환기 등을 통해 의제를 설정하고 공론장을 조성하는 책임 있는 매개자의 역할을 조속히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