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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이 영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동이 제한되는 상황에서도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라는 슬로건을 건 대규모 시위가 주말마다 열리며 영국 사회 전반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 미디어들의 인종차별과 다양성 문제까지 수면 위로 올랐다.
이번 시위를 계기로 영국 방송 업계에서는 그동안 논란이 됐지만 사회적 합의나 개선이 미미했던 인종차별 문제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하나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된 셈이다. 세계 공영방송의 모범사례로 여겨지던 BBC도 예외는 아니다.
BBC의 경우, 국민이 내는 세금인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적 서비스 방송임에도 지난해부터 인종차별 관련 보도의 공정성 여부가 논란이 돼 왔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0월, BBC 아침 프로그램 <브랙퍼스트(Breakfast)>의 진행자, 나가 먼체티(Naga Munchetty)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유색 인종 정치인들을 겨냥한 트위터 글에 “인종차별이 내재돼 있다”고 지적하면서부터다.
이후 먼체티는 BBC 경영진의 불평처리 기구(Executive Complaints Unit)로부터 ‘언론인으로서 특정 개인에 대한 언급을 하거나 그 동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더해서는 안 된다’는 회사의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계 처분을 받게 된다.1) 이에 반발해 44명의 흑인 배우와 방송인들이 항의 서한을 보내자 시청자들도 뒤따라 오프콤(Ofcom) 웹사이트에 먼체티의 징계 처분을 비판하는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태가 커지자 토니 홀(Tony Hall) BBC 전 사장은 공개 서한을 통해 이전의 징계 처분을 번복한다고 밝히며 먼체티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BBC는 인종차별에 대해 중립적이지(impartial) 않다. 인종차별은 논쟁거리가 아니며 의견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종차별은 인종차별일 뿐이다”라며 그녀의 발언을 지지한다고도 밝혔다. 이후 규제기관인 오프콤은 사안을 정밀히 조사한 결과, 먼체티가 BBC 저널리즘의 핵심 원리로 여겨지는 불편부당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어기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결론지었다.2)
하지만 BLM 시위와 관련해, 홀 사장의 발언이 무색하게 최근 BBC 경영진이 내부 구성원들에게 인종차별 의견을 밝히지 말라는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알려졌다. BBC의 경영진은 플로이드 사건이 BBC의 저널리즘에 “우리의 ‘적절한 불편부당성’에 기초한 편집 기준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며, 앞으로의 보도 방향에 대해 기자들이 숙지할 문제를 거론했다. 홀 사장의 지난 발언을 이메일에서 언급하면서도 그 결론은 “수용자들이 식별할 수 있는 방식들을 취해 그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기자들의 경우 BLM과 관련한 소셜미디어, 기사, 연설, 시위 참여 등 어떤 경로든 공개적으로 그 시위를 지지해선 안 된다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했다.3) BBC 경영진은 먼체티 사건에 대한 홀 사장의 발언과 상충하게, 인종차별에 대한 기자의 중립을 요구한 셈이다.

BBC의 ‘불편부당성’은 시대에 뒤떨어졌나?
‘적절한 불편부당성(due impartiality)’이라는 개념은 창사 이래 BBC 저널리즘의 원칙으로 여겨져 왔다. 종종 중립성(neutrality)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지만,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기계적 중립보다는 복잡한 개념이다. BBC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언론인이 단순히 대립하는 의견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보다는 넓은 범주에서 다양한 관점을 적절하게 반영해 특정 사건이나 의견, 논쟁의 핵심을 판단하라는 의미에서 주로 쓰인다.4)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인 만큼, 먼체티 사건에서 BBC 경영진이 처음 내린 징계 처분의 근거로 들었던 것처럼 민감한 정치적 주제에 대해 언론인이 의견 피력을 할 수 없게 하는 도구로 오용되는 문제도 있다.
영국 학계의 일부 저널리즘 연구자들은 같은 이유로 최근의 BLM 시위에 대한 BBC 보도가 공적 서비스 방송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BLM 시위가 시작된 5월 26일부터 6월 5일까지의 BBC 보도를 분석한 결과, 홀 사장의 발언이 무색하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시위 관련 사안들을 “충분히, 적절한 때에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5)
흑인 소재 예능 쇼도 도마 위에 올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BBC의 대표적인 예능프로그램이었던 <리틀 브리튼(Little Britain)>도 흑인을 희화화한 일이 논란이 돼 온라인 서비스가 중단됐다. BBC3 채널에서 2003년부터 2년 동안 네 시즌에 걸쳐 방영된 <리틀 브리튼>은 매트 루카스(Matt Lucas)와 데이비드 윌리엄스(David Williams), 두 희극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종과 사회 계급을 패러디하는 풍자극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다.
백인 남성인 매트 루카스가 연기한 10대 미혼모 캐릭터인 ‘비키 폴라드(Vicky Pollard)’는 백인 하층계급 여성을 비하하는 ‘차브(Chav)’라는 신조어의 유행까지 낳았다. 방영 당시에도 특정 인종과 계급을 희화화하고 상품화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블랙코미디라는 장르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옹호 여론도 상당했다. 미국에 포맷을 수출해 미국판 리메이크가 한동안 방영됐으며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최근까지도 ‘BBC 콘텐츠’로 분류돼 전 세계에 서비스돼왔다.
하지만 이번 흑인 인권 시위를 계기로 BBC는 해당 프로그램의 온라인 서비스를 모두 중단했다. 두 주연이 각각 흑인 여성과 아시아 여성으로 분장을 하고 극 중에서 특정 인종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비하하는 표현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이번에는 아예 서비스 중단 조치가 내려졌다. 주연들의 후속작인 <컴 플라이 위드 미(Come Fly With Me)>의 서비스도 같은 이유로 중단됐다.
BBC의 대변인은 이 문제를 최초로 보도한 데일리메일 측에 “시대가 바뀌었 다”며 이번 결정의 배경을 밝혔다. 넷플릭스는 가디언의 후속 기사에서 “공식적으로 설명할 것은 없지만 두 프로그램 모두를 플랫폼에서 제거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밝혔다.6)
방송가 전반으로 퍼진 인종차별 논란
이번 시위를 계기로 영국 방송 산업 내부의 ‘문화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BAME(Black, Asian and minority ethnic, 흑인, 아시아인, 그 외 소수인종을 칭하는 용어)에 해당하는 700여 명의 TV 노동자들은 영국 방송산업에서 무심한 듯 노골적으로 행해져 온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을 것을 촉구하는 네 쪽 분량의 공식 서한을 주요 기관에 전달했다. BBC, ITV와 같은 주요 방송사뿐만 아니라 오프콤과 영국TV프로듀서협회(PACT, Producers Alliance for Cinema and Television) 등의 국가 기관, 유료방송 플랫폼인 스카이(Sky),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넷플릭스, 아마존 등 업계의 모든 관계자에게 전달됐다.
이 서한에서 이들은 BBC의 <루터(Luther)>, <굿니스 글래이셔스 미(Goodness Gracious Me)> 등 흑인과 중앙아시아인을 주연으로 내세운 쇼들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음에도, 편성팀에서는 위험 요인으로 취급됐다고 폭로했다. 이어 그동안 백인으로만 구성된 작가진들이 다양한 인종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방송에서 다른 인종의 캐릭터들을 편견에 가득 찬 모습으로 제시하며 부적절하게 재현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지적했다.7)
이에 이들이 제안하는 것은 2020년까지 BAME 출신의 인력을 전체 제작진의 20%까지, 그리고 특히 편성팀과 작가진의 25%까지 확충하는 것이다. 방송 산업의 다양성 재현에 대한 책무성을 심사할 독립기관을 설립하는 방안도 별도로 제시됐다.
이처럼 BLM 시위가 영국에서 확산하면서 BBC는 예상치 못한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 문제는 이번에 지적된 ‘보도 불편부당성’이나 다양성을 담보로 한 제작 환경은 국민이 내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적 서비스 방송인 BBC가 지켜야 할 핵심 책무라는 데 있다.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높아지게 되면 수신료 제도를 정당화하기 힘들어진다.
공교롭게도 BLM 시위 보도가 문제가 됐을 때, 영국의 소셜미디어에서는 BBC의 수신료 제도를 폐지하자는 ‘디펀드 BBC’ 운동이 시작됐다. 지난 6월 7일, 자신을 ‘이동제한령(lockdown) 때문에 방에서 BBC를 시청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한 한 시청자가 트위터에 BBC가 가진 ‘좌파주의적 편견’에 환멸을 느낀다며,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미국에서 벌어진 ‘디펀드 폴리스(Defund police)’ 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디펀드 BBC(Defund the BBC)’ 캠페인을 시작하자고 제안하면서부터다. BBC의 핵심 재원인 수신료를 내지 않는 것으로 방송사에 타격을 주자는 것이다. 하루 만에 3만 명이 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보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8)
현행법상 TV를 보유했거나 BBC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이플레이어(iPlayer) 플랫폼을 설치한 가구가 수신료 납부를 회피한 사실이 적발되면 법정에 출두해 1,000 파운드(약 150만 원)에 달하는 벌금을 물 수 있다. 2018년 조사에서만 약 12만 명이 수신료 납부 회피 혐의로 고발됐다. 이와 관련, 디지털 시대에 구시대적 제도로 시민에 과도한 처벌을 내렸다는 비판이 이전부터 제기됐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공적 언론기관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현재까지 제도가 유지돼왔다.
지난 총선에서 ‘수신료 납부 회피의 비범죄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보수당 내각 측에는 이번 소셜미디어의 ‘디펀드 BBC’ 운동은 반가운 소식이다. 니키 모건(Nicky Morgan) 문화부 장관이 지난 2월 ‘수신료 미납의 비범죄화에 대한 협의(Consultation on decriminalising TV licence evasion)’를 출범하고 의견을 청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펀드 BBC’ 캠페인 <출처 - 디펀드 BBC 트위터 화면 갈무리>
BBC는 이러한 난관들에 어떻게 대처할까. 보수당 내각이 총선에서 압승한 직후인 지난 1월, 토니 홀 사장은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된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후 오는 9월에 취임할 신임 사장으로 BBC의 상업기구인 BBC 스튜디오의 CEO 출신인 팀 데이비(Tim Davie)가 낙점된 상태다. 뉴스 제작부서에서 잔뼈가 굵었던 토니 홀 사장과 달리, 펩시 로고 작업으로 유명한 마케팅 전문가 출신이다. 그가 인종차별과 불편부당성에 대한 논란 등 BBC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어떻게 풀지 기대가 모이고 있다.
1)
2) Freddy Mayhew,
3) Emer O’Toole,
4) BBC,
5) 현재 노스웨스턴대의 그레이스 리처드슨(Grace Richardson)과 UCL(London’s Global University)의 페니 포스트게이트(Penny Postgate), 버밍엄시티대의 그레이스 리처드슨(Grace Richardson) 등은 ‘왕실칙허장과 오프콤의 방송법(Broadcasting Code)을 적용한 결과, BBC가 BLM 시위에 대해 적절한 재현을 하지 않았다’며 이를 비판하는 공식 서한을 준비하고 있다.
6) Toby Moses,
7) Jake Kanter, <700 BAME TV Workers Write To Major UK Networks & Government Demanding Change: “There Is A Culture Problem Within Television”>, Deadline, 2020.6.19, https://deadline.com/2020/06/bame-tv-workers-write-tomajor-uk-networks-government-demanding-change-1202963792/
8) Brian Mcgleen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