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지난 10월 18일로 창립 98주년을 맞이한 BBC가 잇따라 경영진을 교체해 관심을 끌고 있다. BBC스튜디오의 팀 데이비(Tim Davie) 최고경영자를 신임 사장으로 선출한 데 이어 최고의사결정기구인 BBC 이사회 회장의 임기 만료를 공식화하며 후임을 찾고 있다. 감독 기관인 오프콤(Ofcom)의 수장도 조만간 교체돼 조직 전체가 불가피하게 변화를 겪게 됐다.
사장 교체, 2027년 왕실 칙허장 협상까지 염두
BBC의 사장직 교체는 올 초부터 예고됐다. 2013년에 취임해 지난 7년 동안 BBC를 이끌어온 토니 홀(Tony Hall) 사장은 지난 1월부터 퇴임 계획을 밝혀왔다. 외부의 압력 때문이 아닌 자발적인 결정으로 알려졌다. BBC는 2027년까지 이어질 정부와의 왕실 칙허장 협상을 오는 2022년에 있을 중간평가 때부터 시작한다. 홀 사장은 이미 장기 집권한 자신이 2027년까지 협상을 이어가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중간평가와 왕실 칙허장 협상, 그 모든 단계를 한 사람이 이끌 수 있도록”, “새 인물을 고용하자”며 퇴임 이유를 밝혔다.1)
이번 정부와의 협상은 BBC의 미래에 있어 사실상 중요하다. 쟁점이 되는 의제가 BBC의 주요 재원인 수신료제의 존속이기 때문이다. BBC는 TV를 보유한 모든 가구로부터 수신료를 징수하는 현행 제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보수당 내각은 다매체 환경에서는 이전처럼 BBC가 보편적 서비스로 이용되지 않는다며 제도의 전면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홀 사장이 퇴임을 고심했을 2019년 연말, 니키 모건(Nicky Morgan) 전 문화부 장관은 공개적으로 현행 수신료제를 넷플릭스와 같은 가입제형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검토하겠다고 밝혔다.2) 홀 사장의 발표 한 달 후인 지난 2월에는 수신료제 미납 및 납부 회피 행위에 대해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방안에 대한 공적협의(public consultation)를 발족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 안이 현실화되면 미납률이 증가할 확률이 높아 BBC의 향후 5년간 수입은 10억 파운드(약 1조 4,824억 원)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측됐다.3) 하지만 보수당 내각은 수신료 미납을 형사 처벌하는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드물고 수신료제 존속에 대한 여론이 나쁘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2022년부터 비범죄화를 추진하는 것을 ‘기정사실’(Done deal)로 했다.4)
이처럼 수신료제를 둘러싼 BBC와 정부와의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는 상황이라 이번에 선출된 팀 데이비(Tim Davie) 신임 사장에 대한 관심이 크다. 데이비 사장은 펩시 로고를 작업한 유명 마케터 출신으로 2005년에 BBC에 입사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및 시청자 부서와 라디오국을 거쳐, 최근에는 BBC의 상업기구인 BBC스튜디오의 최고경영자직을 맡아왔다. 2012년 BBC의 국민 MC로 유명했던 지미 새빌(Jimmy Savil)의 아동 성추문이 뒤늦게 밝혀지는 과정에서 당시 사장이었던 조지 엔트위슬(George Entwistle)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사장 직무대행을 몇 달 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영진으로서 오랫동안 능력을 인정받은 그지만 2010년 이후 12년에 걸쳐 정권을 잡고 있는 보수당 내각이 쉬운 상대일 수 없다.
정당성 확보 위한 공적 가치 입증이 최우선
수신료제와 관련, 현재까지 데이비 사장은 내각이 주장해 온 ‘넷플릭스형 가입제’는 BBC의 재원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쳐 왔다. 미납 행위 비범죄화 계획에 대해서는 지난해 미납부로 형사처벌 된 경우는 다섯 건에 불과했다며 현행 제도의 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지난 10월 8일에도 오프콤에 출석해 “아직까지 현재의 모델을 능가하는 모델을 본 적이 없다”며 현행 수신료제의 유지를 주장한 바 있다.5) 기존 홀 사장의 입장에서 변화가 없어 앞으로의 협상에서 이전부터 벌어져 온 내각과의 의견 차가 쉬이 좁혀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지난 왕실 칙허장 협상에서처럼 수신료제 유지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려면 BBC 서비스의 공적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전에는 높은 수용자 도달률로 설득했지만, 최근의 미디어 환경 변화는 확실히 BBC 측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지난 2019년 상원 특별위원회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6) BBC의 수용자 도달률은 지난 10년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급락해왔다. 65세 이상의 고연령층의 시청 시간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25대 이하 시청률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House of Lords, 2019). 시청 행태에서도 이러한 젊은 세대는 TV가 아닌 VoD(Video on demand) 서비스를 이용한 영상 콘텐츠 소비를 선호해 이전 세대와 달랐다. 문제는 이들이 무료로 제공되는 BBC와 같은 공적 서비스 방송의 BVoD(Broadcast video-on-demand)는 외면하고 돈을 주고 가입해야 하는 넷플릭스나 아마존 프라임처럼 유료 SVoD(Subscription Videoon-demand)나 이용자 제작 콘텐츠와 산업의 콘텐츠가 혼합된 유튜브를 더 즐겨 본다는 것이다.7)
이처럼 다매체 환경에서 TV 시청 형태의 변화로 젊은 수용자층을 잃은 것은 보편적 서비스로서 BBC의 입지를 약화시킨다. 지난해 VoD 플랫폼인 아이플레이어 개편과 함께 가입제형 VoD 플랫폼인 브릿박스(BritBox)를 영국 시장에서 서비스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가운데 유튜브와 같은 신규 사업자들은 젊은 수용자들의 높은 이용률을 근거로 들어 “BBC보다 영국 국민을 더 잘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8) 이와 관련, 데이비 사장은 오프콤 ‘TV의 미래’ 패널에서 유튜브는 이용자 창작 콘텐츠로 세분화된 틈새시장에 종사한다며 “보편적 서비스로서 큐레이팅 되는 공적 서비스와는 다르다”고 반박한 상태다.
하지만 보수당 내각은 BBC의 정치적 중립성도 문제 삼고 있다. 니키 모건 전 문화부 장관의 후임인 올리버 다우든(Oliver Dowden) 문화부 장관은 지난 3월, BBC가 영국 내 변화하는 견해들을 반영하는 데 실패해왔다며, 브렉시트 문제 등을 언급하며 ‘편협한 관점’을 내보이는 것을 방지하려면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진정으로 불편부당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된 논란들을 의식한 듯, 데이비 신임 사장은 취임 후 BBC의 불편부당성을 재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기자들이 소셜미디어에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것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스태프를 상대로 한 카디프(Cardiff)에서의 연설에서 소셜미디어 이용과 관련한 “엄격하게 강제되는” 규칙들이 필요하고 밝히기도 했다.9)
오프콤과 이사회 회장 임기 만료도 눈앞
그런데 BBC 관련 인사 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BBC의 감독기관인 오프콤의 테리 번즈(Terry Burns) 회장과 최고의사결정기구인 BBC 이사회의 데이비드 클레멘티(David Clementi) 회장의 임기가 각각 올해 말과 내년 2월에 만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최대 규모의 공적 서비스 방송인 BBC의 거버넌스와 감독기관을 이끄는 주요 직책들이다 보니 공식적인 인사 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인 9월부터 유력 후보들에 대한 보도가 줄이었다.
그 가운데 타임스는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총리가 오프콤과 BBC이사회 회장직에 보수 논객을 선임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로 화제를 모았다. 이 기사는 “10번가(영국 총리실)의 선택”이라며 오프콤의 차기 회장으로는 데일리메일의 편집인 출신인 폴 데이커(Paul Dacre), BBC 이사회 회장으로는 데일리탤레그래프 편집인으로 마거릿 대처의 전기를 쓴 찰스 무어(Charles Moore)가 보수당 내각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전했다.10) 이 둘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한 보수 논객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평소 BBC를 강경하게 비판해온 ‘BBC 비평가들’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진 후, 다시 타임스를 통해 지난 10월 4일에 찰스 무어가 ‘개인적 이유’를 들어 BBC 회장직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한 사실이 전해졌다.11) 다른 일간지들을 통해 BBC 수신료를 내지 않아 2010년에 법정에 선 전력과 동성결혼과 무슬림에 대해 쓴 칼럼 등 무어의 과거 행적이 되짚어지면서 논란이 됐다. 이후 관련 단체들이 잇따라 반대 성명을 낸 것이 그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2)
수신료제에 부정적인 오스본 전 재무장관, BBC 이사회 회장 되나
현재 보리스 총리와 내각은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 전 재무장관에게 BBC 회장직에 출마할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스본 장관은 정치권을 떠난 후 최근 6월까지 이브닝스탠다드에서 편집인으로 일한 약간의 언론계 경력도 있어 경쟁력 있는 후보가 될 수 있다. 익스프레스는 지난 10월 17일, 총리실이 오스본 전 장관을 끌어들이기 위해 BBC 회장의 연봉을 현재의 10만 파운드(약 1억 4,819만 원)에서 28만 파운드(4억 1,479만 원)까지 올리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전했다.13) 오스본 전 장관은 BBC에게는 악연의 인물. 2015년에 수신료 협상에서 홀 전 BBC 사장을 압박해 75세 이상 노령 인구의 수신료에 대한 정부 지원을 끊는 방안에 합의하도록 한 바 있다.14) 실제로 BBC는 올해 9월부터 주력 수용자층인 노령인구에게 수신료를 징수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BBC 수신료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늘고 있다.
익스프레스는 오스본 전 장관이 BBC 회장직 물망에 올랐다는 소식에 “빕(Beep, BBC의 별명)은 죽은 목숨이다. 이번 일은 빕의 장례식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그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전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공적 서비스 방송으로서 그 가치를 입증하며 수신료제를 사수해 온 BBC다. 데이비 신임 사장이 앞으로의 인사태풍과 산적한 과제들에 어떻게 대처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1) Sweney, M., & Conlan, T., Tony Hall to step down as BBC director genera
5) Noah, S., The licence fee is best, says BBC bo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