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저널리즘의 일차적 임무는 ‘사실(the fact)’과 ‘진실(the truth)’을 밝혀내는 일이다. 기자들은 이 두 가지 원칙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늘날 한국 기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이 두 가지 원칙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예가 지금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사실 확인과 진실 추구라는 저널리즘 원칙의 부재(不在)를 잘 보여준다. SBS가 2020년 2월 10일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지 9개월이 다 됐지만, 언론 스스로 후속 보도를 통해 밝힌 사건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충분한 증언이나 문서와 같은 증거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언론이 그동안 한 일은 누군가의 주장을 전달하거나 해석하는 일이 전부였다. 이 사기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누구인지, 관계의 내막은 무엇인지, 피해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규정의 불법성은 무엇인지, 명백한 증거는 존재하는지 제대로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대신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과 ‘사실이 빠진 해석’만 난무하다. 한국 언론이 보여주는 이런 ‘탈진실’ 사례는 숱하게 많다. 그런 점에서 한국 언론은 주장과 해석 저널리즘에 매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장이나 해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주장이나 해석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주장과 해석이 더 극성을 부리기 쉽다. 문제는 누군가의 주장과 해석이 믿을 만한 사실에 근거해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주장이나 해석에는 늘 그러하지만 오염된 정보가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누구든 자신만의 의견을 피력할 자격은 있지만, 자신만의 사실을 주장할 자격은 없다(Shirky, 2014). 기자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기자의 임무는 누군가의 주장과 해석이 옳은지를 밝혀내는데 있지, (기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거나 사실을 멋대로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근거 없는 주장을 드러내고, 터무니없는 해석을 바로잡는 일이 기자들이 해야 할 사회적 실천 의무다. 기자가 주장을 검증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일은 사회 공동체와 공공선을 위해 필수적이다. 진실이 빠진 저널리즘은 권력층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영향력을 남용할 환경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 공중이 더 큰 위험에 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McBride & Rosenstiel, 2014). 하지만 한국 기자들은 진실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사실조차 밝혀내지 못한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고 보도하거나, 이 주장에다 기자 개인의 의견과 상상을 곁들여 해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유감스럽지만, 주장과 해석에 파묻혀 진실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 언론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주장과 해석 저널리즘’은 매우 우려스럽다.
기자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이번 원고에서 기자는 왜 주장과 해석에 게으르게 안주하고, 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실천적 의무에 다가가지 못하는지 논증해 보려고 한다. 나는 여기에서 기자들이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사를 작성해 보도해야 한다는 규범적 태도를 강조할 생각은 없다. 보도의 규범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규범의 문제는 너무나 자주 강조되어 왔고 그 당위성에 대해서도 별 이론(異論)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여러 갈래로 이미 판정이 나와 있다. 이에 반해 ‘합리적 행위자(rational actor)’로서 기자의 인지적 한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기자는 존재론적으로 양면성을 갖는다. 하나는 사실을 공정하고,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규범적 존재로서 기자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를 불완전하게 처리하는 감정적 존재로서의 기자이다. 전자는 사실을 치밀하게 확인하고, 이를 객관적 규범 체계를 통해 전달하는 이성적 행위자로서 기능이 강조되는 반면에, 후자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에 따른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정보처리자로 간주한다(Simon, 1957). 전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합리적 존재’로서의 기자상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기자역시 보통의 사람과 다르지 않게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관찰자, 즉 ‘합리화하는 존재’로서의 기자상이다.
우리는 대부분 기자에게 ‘합리적 행위자’로서 사회적 역할을 기대(또는 강조)한다. 이 때문에 우 리는 기자들의 편향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관점에서 보도하는 직업적 규범을 요구한다. 또한 논쟁적 시비에 대해 불편부당한 ‘공정한 플레이어(fair player)’로서의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보다는 반대로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적인 존재로서의 모습이 더 두드러질 때가 많다. 우리는 기자들이 보도 과정에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하지 못한 이유를 주로 그들의 규범적 태도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저널리즘의 규범을 기자의 개인적 철학이나 신념에서 찾거나, 뉴스 생산 조직의 작업 관행에서 찾거나, 권력이나 자본 압력과 같은 외부 환경에서 찾거나, 기자들의 정치적 이념에서 찾는 식이다(Shoemaker & Reese, 1996). 그렇지 않으면 기자의 사고 습관을 문화적 관습과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에서 찾는다(이완수·배재영, 2017; 박재영·이완수·노성종, 2009; Zelizer, 1993).
기자들의 직업적 관행과 저널리즘의 원칙 상실은 상당 부분 위의 요인을 통해 설명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자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과정에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엇이, 어떻게 작동 하는지 확인된 바는 별로 없다(Stocking & Gross, 1989). 기자는 사실을 규범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직업인인 동시에 정보를 불완전하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감정적 인간이기도 하다(Willis et al., 2003). 여기서 “기자는 합리적 행위자인가”하는 질문은 그들이 사안(혹은 정보)을 이성적이고 분석적으로 판단해 오류를 최소화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명제와 연결된다. 한국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은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기자들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 는 모든 인지적 노력을 최대한 기울이는가 하는 점이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기자들이 지각, 주의, 기억, 계산, 판단에 있어 합리적이고, 모순이 없으며, 항상 불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학자이자 인지심리학자인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이 지적한 것처럼 그들은 ‘제한된 합리성’에 갇혀 직관과 편향의 오류를 빈번하게 범하는 쪽에 더 가깝다(Simon, 1957). 나는 기자들이 판단(취재)과 선택(보도)을 할 때 최적화된 기준보다는 적당한 수준, 즉 차선의 수준인 ‘만족화(satisficing)’하는 선에서 행동에 옮기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들의 이런 ‘제한된 합리성’은 그들이 허위 정보 생산자로 의심받거나 지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오류 정보를 생산 유포하는 매개자가 될 위험성을 만들어낸다. 증거를 찾고, 사실을 확인하고, 정보를 정교화하는 탐사적 보도와는 멀어진다(Glasser & Ettema, 2008).
직관적이고 감정적인···기자
나는 사회적으로 수없이 많이 제기돼 온 허위 정보 시비 논쟁이 기자들의 과열 보도 경쟁이나, 과도한 의혹 제기나, 부실 검증 때문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기자들이 지닌 몇 가지 인지적 한계(cognitive limit)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릇된 정보가 의도하지 않게 생산, 유포되는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기자들이 그렇게 이성적이거나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반대로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존재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 보려고 한다.
첫째, 기자들은 어떤 불확실한 정보를 마주했을 때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해 보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늘 최선의 인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자들 역시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게으른 사고자들(lazy thinkers)’이다. 그들은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저널리즘 규범의 압력을 받지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지구두쇠(cognition miser)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자주 오류의 판단이나 추론을 하는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인지절약(cognitive saving)의 습성 때문이다(Lau & Redlawsk, 2001). 그런 점에서 기자도 다르지 않다. 기자들이야말로 제한된 시간 안에 불확실한 사실을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인지절약 습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다.
둘째, 기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나 정보를 바탕으로 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기자들 역시 자신이 믿고 싶은 내용만을 중심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 자신이 쓰고 싶은 내용에 부합하는 정보원의 말을 선택적으로 채택하는 취재 관행이 대표적이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면 허위 사실조차 사실로 믿는 경향(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이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사실조차 심리적으로 거부한다. 기자들의 이런 비합리적 정보 수용 경향이 바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기자들은 자신이 선호하거나 신념에 부합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증거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거짓 정보를 생산·유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뢰성이 낮은 취재원의 말을 의심하고, 단서를 찾고, 증거를 저울질해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여지가 훨씬 많다.
셋째, 기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정보에 노출됐을 때 심리적으로 불편해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 합리화를 통해 불편한 심리를 최대한 해소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과정에 기자들은 자신의 신념과 불일치하는 정보를 수용하기보다는, 대신 여러 이유를 동원해 합리화함으로써 자신의 신념과 외부정보를 서로 일치시키려고 시도한다. 기자들에게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현상이 취재와 보도 과정에 나타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넷째, 기자들은 정보 제공자(source)가 누구인가에 따라 관련 정보를 다르게 해석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기자들은 정보원이 신뢰할 만한 것으로 인식하면 그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그 정보를 기존 관점을 강화하는 데 이용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잘 알거나 자신의 세계관(worldview)과 부합하는 사람이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더 신뢰한다는 것이다. 또 권위가 있는 사람이 제공하는 정보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제공하는 정보보다 더 믿는 심리적 편향성이 기자들에게 자주 나타난다. 비록 이치에 맞지 않는 무리한 주장이라도 그가 단순히 어떤 분야의 권위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자들은 그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기자들은 이 같은 권위자 편향(authority bias)(Dovelli, 2011) 때문에 사실을 검증 없이 수용해 전달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다섯째, 특정한 목적에 따라 정보를 처리하는 동기화 추론(motivated reasoning)이 기자들에게 특별히 강화돼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자들은 정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이나 태도에 맞춰 정보를 추론하거나 해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선택하는 확증편향, 자신의 신념에 배치되는 정보는 거부하는 반증편향,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를 일치하지 않는 정보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인식하는 사전태도 효과 등이 기자의 직무 수행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박진우, 2019).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이 정치적 논쟁 사건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다루는 것도 같은 사안을 동기화 추론에 의해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기자들 역시 정보를 수용하는 과정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력(social pressure)(Clark & Grech, 2017)으로부터 무의식중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기자들은 평소 사회적 신호나 외부 평판을 의식해 판단과 선택을 한다. 기자들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수용하고, 공유하는 것은 그 집단의 일원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령 여당 출입기자가 여당 편향적으로 되고, 검찰 출입기자가 검찰 편향적으로 바뀌는 것도 이런 이유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기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보와 생각을 공유함으로써 사회적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다. 이들은 허위 정보조차 공유함으로써 ‘생각 공동체’(강준만, 2016)를 만들거나 ‘사실 인식의 양극화’ 를 형성한다(Geary, 2019). 출입처가 이런 ‘생각 공 동체’와 ‘사실 인식의 양극화’ 문화를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일곱째, 맹목적 신념과 세계관이 비슷한 기자들은 집단의견에 동조하는데서 나아가, 그 의견을 검증하기보다는 의견을 확신하고 방어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기자들은 이 과정에 자신과 비슷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지하고, 수용함으로써 ‘내집단 편애(in-group favoritism)’에 가담한다.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 기자가 같은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른 집단적 사고(예: 언론사 조직 문화와 가치)를 하는 것도 이런 내집단 편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정보가 걸러지지 않고 사회적으로 퍼져나가는 배경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집단적 사고(group thinking)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적 사고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규범을 내면화하고 그 집단의 관점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바라보는 편향동화(biased assimilation)를 촉진한다. 한국 언론의 고질적 문제로 꼽히는 정파적 보도도 편향동화라는 심리적 요인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편향동화가 진실정보를 외면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계를 딛고 진실 추구의 원칙 실현해야
기자들이 허위 정보를 분별해내지 못하거나 허위 정보를 생산하는 이런 심리적 기저에는 그들의 정보 처리 과정이 영향을 미친다. 이중과정 이론(dual-process theory)에 따르면 사람의 인지 과정에는 크게 직감적, 연상적, 자동적, 감정적, 그리고 직관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시스템1과 분석적, 논리적, 통제적, 규칙적, 그리고 숙고적 과정을 거치는 시스템2가 작동한다(Evans & Stanovich, 2013; Kahneman, 2011; 도모노 노리오, 2007). 우리는 오랫동안 기자들이 분석과 숙고의 과정을 거치는 시스템2 사고를 하는 집단으로 여겨온 게 사실이다. 기자들이 일상에서 수행하는 사실을 확인하고 분석하는 행위가 모두 시스템2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불확실하고, 예측이 어려운 보도 현실에서 시스템2 사고를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기자들은 무엇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야 하고, 특히 마감 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직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숙고와 분석의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자들이 숙고적이고 분석적인 정보 처리를 통해 의사결정을 할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자들이 확률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자주 인지적 착각을 일으키거나(Gigerenzer, 2015), 선험적인 판단, 마음의 제약, 그리고 제한적인 정보와 자원 등으로 인지적 오류를 범하는 것(Kahneman, 2011)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류 정보는 바로 기자들의 이런 ‘제한된 합리성’으로 인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기자들이 이성적 존재로서 이상적 규범을 잘 준수하면 문제 될게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자들은 반대로 감정과 적대, 편향과 오류, 편견과 성찰 부재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가 더 타당하다. 나는 기자들이 합리적 존재로서 직업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대신 나는 기자들이 합리적이지 못하며, 많은 경우 스스로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야만 기자들이 반성을 통해 합리적, 이성적, 비판적 판단과 함께 인지적 에너지를 투입해 사회문제를 관찰, 분석, 숙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기자들은 자신이 비합리적이다거나, 감정적이다거나, 직관적인 정보 처리를 통해 취재하고 보도한다거나 하는 한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기자들은 스스로 절대적 진실 추구자라는 신념을 벗어나 진실을 밝혀내려고 노력하는 감정적 인간으로서의 기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언론학자 짐 윌리스(Jim Willis)의 지적대로 기자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기자(The Human Journalist)”임을 인정하고(Willis et al., 2003), 그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 진실 추구라는 저널리즘 원칙을 실현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