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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삼는다. 그리고 신문을 위시한 언론은 여론을 조성하고 정보를 제공해 사회 구성원의 판단과 선택을 도와준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도 신문은 민주주의, 경제 발전, 그리고 문화의 다양화에 기여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신문은 우리에게 근대적인 교육만큼이나 개화의 상징이었다. 또한 과거 많은 학생이 신문 사설로 국어 공부를 할 정도로 신문은 모범적인 글을 제공했다. 그리고 한때 어떤 신문은 국민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신문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종이 신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크게 줄었다. 그러면서도 주요 일간지들은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 불균형을 낳고 있다. 심지어 어떤 기사는 특정인에 대한 수호천사나 저격수라는 인상까지 주고 있다.
이제 언론계에서 ‘정론지’라는 말은 낡은 청룡도로 들린다. 주요 신문 사이에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공통분모도 찾기 힘들다. 이 때문에 언론이 여론 형성에 공헌하기보다 오히려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 신문이 과연 민주주의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시장원리 벗어난 한국 신문
한국의 신문은 시장원리에도 벗어나 있다. 종이신문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으면 발행부수가 줄든지 구독료가 하락해야 한다. 그런데 수요 감소가 특히 발행부수에 반영되지 않은 채 종이신문이 과잉 공급되고 있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 발행부수는 100만 내외로 돼 있으나, 상당수 즉각 폐지로 전환돼 유효 부수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신문사는 구독료 수입이 아니라 광고 수입에 주로 의존한다. 2017년의 경우 일간지의 수입 중 종이신문 판매 수입은 12.9%에 불과한 데 비해 광고 수입은 60.7%였다. 광고 수입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수요에 부합되지 않는 명목상의 부수가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다.
더구나 광고 수입 자체도 수요공급이나 가격에 따라 결정된 결과가 아니다. 광고비를 지불하는 기업들은 광고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주요 일간지에 기계적으로 광고를 게재한다. 이에 더해 정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국민의 세금으로 배정해 주는 광고비도 적지 않다. 결국 현재 주요 일간지는 구독 수요나 광고 수요와 무관하게 과잉 발행돼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와 모바일 매체의 등장이 종이신문 구독자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지만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 신문과 달리 온라인 기사의 유료화 정책을 채택하면서 콘텐츠의 품질로 승부를 걸었다. 그 결과 2020년에 온라인 수요가 늘면서 오프라인까지 합해 700만 명 이상의 독자를 확보했다.
보다 근원적인 원인으로 신문사가 신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와 권력의 압박 속에서 언론의 정체성을 스스로 훼손해 왔음을 지적해야 한다. 언론사의 간부들이 끊임없이 행정·입법부에 영입되고, 신문의 콘텐츠는 정당의 기관지나 기업의 홍보물과 구분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통분모는 선택이다. 선거장에서 시민이 정치 지도자와 정당을 투표로 평가하고 선택해 정치 문제를 해결한다. 또한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제품과 기업을 선택해 자원을 배분함으로써 경제의 효율과 성장을 촉진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1987년 민주화와 1997년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민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만들긴 쉽고 가려내긴 어려운 불량 기사
시민이나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구독자도 신문사가 제공하는 기사에 담긴 정보나 지식을 평가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이 투표로, 기업이 가격이나 수요로, 각기 평가받은 데 비해 신문은 이런 식으로 평가받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의 단초는 신문의 기사가 정치인의 정책이나 기업의 제품과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는 것에 있다.
첫째, 시장의 제품에 대한 매매는 생계와 직접 연관 있는 데 비해 신문 구독은 생계와 직접 관련이 없다. 투표에 대해서는 상당수 시민이 의무감을 갖고 있지만, 신문에 대해서는 그것도 없다. 여기에 디지털 콘텐츠의 확산이 신문에 대한 무관심을 가중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각을 요구하는 딱딱한 기사보다 즐길 수 있는 부드러운 기사가 풍미하고 있다. 더구나 많은 종류의 정보 매체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심층적인 분석 기사에 집중하기도 힘들다.
둘째, 이런 무관심과 대조적으로 신문 기사가 제공하는 정보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발 없는 말과 글이 천리만리를 날아다닌다. 근원적으로 정보를 구성하는 언어는 사회적이다. 시장의 사과는 내가 사서 먹으면 다른 사람이 사서 먹을 수 없지만 정보, 지식, 기술은 나눠도 줄지 않는다. 나아가 정보를 전파하는데 추가 비용도 들지 않는다. 사회적이라는 점에서 보도는 그 결과가 개인에 국한되는 상품 구매보다 국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거에 가깝다.
셋째, 정보는 일단 퍼지면 기억에 남아 한번 소비되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회수하기도 어렵다. 이 점에서 소비되면 사라지고 회수도 가능한 제품과 다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정정하거나 사과하는 기사를 내더라도 당사자나 해당 기관은 역병에 걸린 것처럼 낙인이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같이 불량 제품보다 불량 기사의 위험이 더 크므로 보도에 더 무거운 책임이 실린다.
넷째, 기사는 추상적인 담론이므로 그것의 내용이 방만해지기 쉬우며 이에 대한 구독자의 판단도 어렵다. 기업도 언어로 된 광고에 의존하지만 정보가 아니라 제품을 판다. 정치인도 말과 글에 의존하지만 현실에서 실행될 입장이나 정책을 전달한다. 이에 비해 신문이 전달하는 정보와 지식은 거의 언어 그 자체다.
이 때문에 사건의 특정 측면에 대한 생략, 단어의 선택이나 어순, 맥락 등에 따라 기사의 실질적인 내용이 바뀐다. 심지어 단어 하나가 기사의 전체 틀을 바꿀 수도 있다. 자동차는 옆에 자전거가 있든 없든 기본적으로 자동차다. 반면 단어나 기사는 옆에 무슨 단어나 기사나 그림이 있는지에 따라 그 가치와 의미가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또한 자동차를 자전거로 규정하기는 어려워도, 예를 들어 ‘공격’을 ‘자기방어’라고 표현하기는 쉽다. 동시에 자동차와 자전거는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공격과 자기방어는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다섯째, 같은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기사는 신문사나 기자의 관점과 입장을 담게 된다. 자동차 자체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일 수 없지만 자동차에 대한 기사는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일 수 있다. 주어진 사건을 나름대로 규정하는 다양한 기사들은 언론의 자유를 나타낸다. 그렇지만 진보든 보수든 최소한 신문사와 기자가 자신의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관성을 언론사나 기자가 유지하기도 힘들고 이것을 독자가 추적하기도 힘들다.
여섯째, 제품이 원료를 변형한 생산의 결과이듯 기사도 취재를 변형한 결과이다. 제품에 대한 판단이 제품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듯이, 기사에 대한 판단은 기사에 대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 기사가 정보를 제공하므로 이것은 ‘정보에 대한 정보’를 의미한다. 제품에 대한 정보가 원료나 제조 과정이라면, 기사에 대한 정보는 출처와 편집 과정이다. 그런데 정치인의 정책이나 제품의 성분과 달리 기사에 대한 정보는 별로 제공되지 않아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불량 기사는 불량 정치인이나 불량 제품보다 만들기는 쉽고 가려내기는 어렵다. 이에 더해 신문 기사는 기업의 제품과 달리 언어의 차이로 해외 언론사의 기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기사는 제품보다 개인 차원의 합리적 선택으로 관리되기가 어려운 점들이 더 많다. 이렇게 보면 기업의 회장이 제품의 종류와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사주가 기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무리 여건이 힘들더라도 일차적인 책임은 정부, 기업, 구독자, 포털이 아니라 신문사와 언론인에게 있다. 외부의 개입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기 정화가 요구된다. 그런데 한국의 신문에 더 이상 자정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도 고교 시절 신문 사설로 국어 공부했던 시민으로서 염원해 본다. 교수들의 상호 논문 심사와 같은 언론인들의 상호 기사 심사는 불가능할까? 신문 없는 정부를 선택하느니 차라리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고 말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을 상기하면서 비현실적인 염원을 가져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