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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6개의 시선 09 - 능력주의와 언론
기획연재 | 등록일 : 2021-11-26

개항 이래 한반도에서 가장 지배적인 믿음은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믿음이다. 능력주의의 근거가 교육이므로 이것은 교육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능력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믿음은 서구인의 믿음보다 더 강하고, 민주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보다 더 강한 것 같다. 그래서 학력, 학벌을 가진 사람이 정치, 법원, 검찰, 언론, 기업, 학교 등 사회 여러 부문을 지배해 왔다.

 

이같이 교육열과 교육에 대한 신화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생의 20세까지 치열하게 전개되는 입시 경쟁을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다. 한국인은 사회 진출에 앞서 이미 학교에서 경쟁을 배운다. 이로 인해 입시뿐 아니라 (지금은 바뀌었지만) 사법시험, 공무원 시험 등 시험과 자격증에 대한 의존도도 높다.

 

능력주의는 양반, 평민, 천민 등 전통적인 신분을 타파해 사회적 이동을 낳았다. 또한 혈통이나 태생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권력, 부, 명예를 분배했다. 이같이 능력주의는 기회의 균등을 내세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반을 이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한국의 능력주의를 반드시 전근대와의 단절로 볼 수는 없다. 입학시험은 이미 존재하던 과거 시험과 친화력이 있어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쉽게 한국 사회에 수용됐다. 그리고 입학시험은 사회 진출을 위한 거의 유일무이한 관문이 됐다.

 

이 때문에 입시 경쟁으로 쟁취한 학위, 학벌이 역설적으로 경쟁을 배제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반하는 지대나 독과점을 낳아왔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대학, 그것도 상위권 대학과 전공에 진입하기 위한 노력은 그야말로 필사적이다. 지난 반세기 이상 한국에서는 어느 대학 어느 전공 졸업자라는 것이 다른 어떤 증명서보다 확실한 정보이자 출세의 기반이었다.

 

물론 동일 학력의 소유자나 동일 대학의 졸업자라도 사회 각 영역의 고유한 기준에 따라 다시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어느 부문이든 학력과 학벌은 평생 따라다니며 궁극적인 평가의 근거로 작동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에서의 공교육 붕괴와 사교육 열풍은 개인적 선호가 아니라 사회구조로부터 오는 것이다.

 

입시 등용문을 순조롭게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열패감 속에서 살게 되는 경향도 있다. 더 근원적으로 입시 교육은 사고력, 토론 능력, 그리고 판단력의 배양보다 등수 매기기를 목표로 삼아 왔다. 현실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생각하게 만들기보다 화학 주기율표와 각국 수도를 암기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시대의 입시 교육이었다. 일선의 교육자로서 판단하건대 이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런 교육은 이념 대립, 지역 갈등, 통일, 대외 관계, 성장 및 분배 등과 관련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밑거름을 제공할 수 없다.

 

입시 부정 등 입시의 절차적 합리성이 수시로 흔들려왔던 것도 입시의 이런 과도한 중요성 때문이다. 문제는 절차적 합리성을 충족하더라도 대다수 한국인이 믿는 것처럼 능력주의와 입시 경쟁이 만능일 수 없다는 점이다.

 

각자의 능력이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얻는 권력, 부, 명예는 능력, 노력, 운의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운은 각자의 권리도 책임도 아닌 반면 능력과 노력은 흔히 각자의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능력 자체가 상당 부분 추첨과 같은 운에 의해 결정된다.

 

부모가 물려주는 유전자와 각자가 태어나 성장하는 가정환경이 상당 부분 각자의 능력을 좌우한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 태어나는지가 특정 능력에 대한 수요와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운이다. 어떤 부모와 가정, 어떤 시대와 사회에 태어날지를 당사자가 선택할 수 없으므로 이런 것들이 당사자의 책임이나 권리는 아니다.

 

누구도 모차르트나 아인슈타인으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할 수 없다. BTS는 현재와 같이 대중문화가 인기를 끄는 시기에 태어나겠다고 선택할 수 없었다. 운으로 결정되는 능력은 도덕성이나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노력만큼은 흔히 각자의 것으로 간주되는데, 심지어 노력하는 성향조차도 타고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게 본다면 최소한 각자의 능력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정의에 대한 논의로 잘 알려진 존 롤스(John Rawls)와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모두 이런 점들을 지적했다. 특히 샌델은 이에 근거해 최근 미국 대학 입시 부정과 능력주의를 비판했다.

 

경제학은 토지·노동·자본 중 어떤 것을 시장경제에 제공했든 각자가 시장에 공헌한 생산성에 따라, 즉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1980년대 이후의 소득 불평등 악화를 지적하면서 CEO 등이 능력이나 공헌과 무관하게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능력주의는 시장경제의 소득분배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설령 시장경제나 사회에서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능력과 심지어 노력 자체가 각자의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자가 자신의 몫으로 당연시하는 권력, 부, 명예 중 상당 부분이 우연히 결정됐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몫일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대학 입시의 승자와 패자, CEO와 노동자 사이의 능력 차이도 상당 부분 우연이다. 이런 요인들은 기회균등의 원리를 실질적으로 약화시킨다. 나아가 부모의 소득 및 재산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기회균등과 적극적으로 배치된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는 각자의 소득이나 재산 차이로 인해 재화나 교육의 기회를 획득할 수 있는 힘의 차이가 생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방어할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본인의 소득이 아니라 부모의 소득과 재산이 사교육 등과 같은 교육 기회의 차이를 낳는 것은 방어할 수 없다.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동일한 수준의 노력을 투입하는 두 학생이 단순히 부모의 소득과 재산의 차이로 사회적 보상에 있어 차이를 겪는 것은 기회균등에 적극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같은 극단적인 시장주의자조차 이 문제를 방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출산율이 점점 줄어 노동시장, 잠재 성장률, 복지 등에 압박을 가하는 현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신화를 넘어 언론이 해야 할 일

 

서구의 능력주의는 개인을 능력의 단위로 삼는 데 비해 한국의 능력주의는 교육이 개인 차원의 학력뿐만 아니라 학연과 학벌을 낳는 특수성을 지닌다. 학연은 선후배의 인간관계를 낳고 학벌은 동창회와 같은 집단에 근거한다. 학연은 혈연이나 지연보다 근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의 연장에 불과하다. 학력은 인적 자본을 낳고, 학연과 학벌은 사회 자본을 낳는다. 동시에 학연과 학벌은 부정부패를 낳아 왔다. 한국의 엘리트층은 각자의 능력, 노력, 운 이외에도 알게 모르게 학연과 학벌의 혜택을 많이 받아 왔다.

 

자연 자원이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승계되는 신분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나아가 능력의 차이를 감추거나 억압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능력과 학벌이 상당 부분 운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입시에 대한 과도한 믿음, 그리고 이로 인한 자만심과 열등감이 둔화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능력을 지닌 사람은 운으로 받은 선물이 낳은 보상을 어느 정도 사회에 환원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준비가 돼 있다면 누진세나 복지 지출에 대한 반발도 둔화할 것이다. 학연과 학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한국의 엘리트층에게는 더욱 그런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의 입시 제도는 모든 것을 거의 한 번의 경기로 결정하기 때문에 인생의 30~50대를 위해 인생의 20대까지를 희생시키는 삶의 방식을 강요한다. 이는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생태계 보존이 화두인 이 시대에, 그것도 노벨상 수상을 갈구하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태의연함이다. 입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고 경쟁을 평생에 한 번이 아닌, 몇 차례로 나누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여유 있게 만들 수 있다.

 

능력과 교육에 대한 기대의 근저에는 국가나 조직 차원에서 사람만 잘 뽑으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사람보다 제도에 의존한다. 따라서 우리도 사람에게 거는 과도한 기대를 줄이고 제도나 체제 개선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언론사도 능력주의와 교육의 신화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선도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런 신화를 확대 재생산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와 교육의 기능은 재조정돼야 한다. 21세기 한국 사회에 필요한 능력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교육이 요구되는지를 언론이 학계 및 업계와 함께 독자들을 앞에 놓고 논의해서 공감대를 찾아가면 어떨까? 당장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 언론사가 할 일이다. 한국 언론의 현주소에 비춰 보면 요원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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