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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성장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쟁취했으며 교육의 발전과 문화적인 다양성을 꽃피우게 됐다. 그렇지만 근원적으로는 한반도의 여러 문제에 대해 대다수가 공유하는 인식과 행위의 기반이 충분히 형성돼 있지 않아 모종의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판단 근거가 많은 경우 우리 내부에 있지 않고 여전히 외부에 있다는 것이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다.
이는 해방된 이후 민주주의, 경제성장, 교육과 문화의 발전 등이 모두 압축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된다. 특히, 입시 경쟁과 이를 위한 중·고등 교육으로 한국인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토론과 인식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외적인 준거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물론 한반도의 분단도 이런 정체성의 부족에 기여하고 있다.
공통의 기반을 구성하는 인식의 주체이자 행위자는 전문가, 지식인, 그리고 대중이다. 전문가는 학자나 연구자이고, 지식인은 관료나 언론인 그리고 기업인과 같이 전문 지식을 선별해서 전달하거나 실천하는 사람이며, 대중은 유권자이며 소비자인 일반 국민이다.
우선 한국의 학자나 전문가가 안고 있는 약점은 이들의 문제의식이 한반도가 아니라 서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서양의 관점을 익히고 따르는 데 대부분의 노력과 시간을 보낸다. 아직도 사상과 이론의 수입국인 한국이 서양 학계와 사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한국 사회의 문제와 연결하는 학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자연과학에서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 SCI1), 그리고 사회과학에서 SSCI2) 논문 게재를 목표로 삼는 한국 대학의 현주소가 이를 말해준다. 노벨상에 대한 염원이나 외국의 기관들이 발표하는 대학 순위에 대한 집착도 같은 흐름 속에 있다. 음악가, 운동선수, 영화인이 국제적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명성과 열광의 근거가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학자들이 세계적인 수준의 지식을 창출하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수준에 이른 것도 아니다. 우리가 활용하는 지식의 뿌리와 핵심적인 줄거리는 아직도 대부분 외국의 학자들이 축적한 것이다. 정치권에 회자되는 경제 이론이나 정책도 이런 예다. 산업·재정·금융 정책, ‘소득주도성장(원래 명칭 임금주도성장)’, 기본소득, 안심소득(부의 소득세), 오염배출권, 탄소세, 성장과 기술혁신 등등이 모두 이와 같다.
이런 학습과 인식이 지닌 결정적인 문제는 선진 학문의 원리가 한국의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조건에 맞게 변형돼 정착되고 그 이후에는 나름대로 진화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에 대해 관심도 별로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한반도에서 인식과 행위의 공통분모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부분이다.
한국의 특수성 모르는 학자들, 언론인과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
과거의 예로,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이 이뤄지던 1970년대에 한국학계는 중상주의나 독일의 역사학파,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고 일방적으로 미국의 시장주의 경제학에 의존했다. 또한 산업의 기반과 생산 역량을 확충하는 총공급의 문제가 지배적이었던 같은 시기에 한국의 대학에서는 획일적으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총수요 문제를 거시경제학의 핵심으로 삼았었다.
또 다른 예로 외견상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민주주의와 비슷하지만, 그 내용이나 실체는 턱없이 다르다. 자본주의나 시장경제도 미국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나아가 한국의 의회, 기업, 대학, 언론, 검찰 등은 서양의 그것들과 반드시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이 조직들은 모두 역사적 조건 하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 전체 속에서, 혹은 다른 조직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 가치, 기능을 획득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문학자, 그리고 특히 사회과학자는 이 점에 관해 취약하다. 이것은 서양의 사상과 이론에 대한 기계적인 학습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한국의 학자들이 서양이 발전시키고 있는 지식의 나무에서 뿌리나 큰 줄기를 캐오는 것이 아니라 잔가지를 하나씩 채집해서 귀국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대다수가 공유하는 인식의 나무가 한반도에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예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양적 완화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중앙은행의 위치와 독립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은행이라는 존재와 그것의 독립성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 근원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고 현재도 별로 논의하지 않고 있다.
언론인이나 관료, 기업인 등 지식인도 서양의 것들을 숭상하고 대중에게 전파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의 준거로 OECD 국가 등의 기준이나 외국의 사례를 빈번하게 인용하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것은 이미 1960년대 경제성장기에 일인당 소득, 성장률, 수출액 등에 대한 집착으로 시작된 흐름이 확장된 것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한국의 특수성에 대해 학자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학자보다 언론인 등 지식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보편적인 원리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정착되는지에 대해 서양의 것을 우선시하는 학자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지식인이 더 밝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인식의 공통기반을 형성하는 데 서양 이론에 충실한 학자와 현실에 밝은 언론, 관료, 기업의 협업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이런 취약한 토양으로 언론의 활동 범위가 넓기 때문에 언론의 횡포도 가능하다. 공통기반이 없는 상태에서는 소위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자의적이다. ‘다름’을 말하려면 먼저 다름의 기준으로 ‘같음’을 말해야 하는데, 특히 우리의 언론은 ‘같음’은 말하지 않고 ‘다름’만 말하고 있다. 혹은 좌우로 갈리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공통분모를 확보하고 구축하는 일이 선결돼야 하는데 이 과정이 우리 사회에는 부족하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은 이념이나 정책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이합집산한다. 같은 이유로 한때 진보적이던 사람이 순식간에 보수적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 이런 토양에서 선거 때만 되면 좌우, 남녀, 지역, 학벌 등에 근거한 보도와 오보가 난무하게 된다.
무엇보다 대다수 국민의 판단과 선택이 이런 보도에 수시로 휘청거린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이 충분한 정보와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런 판단과 선택의 취약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교육 수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인식의 기반이 취약한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공론의 장, 토론의 장 역할에 소홀한 언론
한국의 주요 언론은 언제나 대중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한다고 자부했으나 이제는 바람직한 방향이라기보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방황과 횡포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언론인들에게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선거 때마다 소모적이고 졸속한 언론 보도와 비난이 계속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같은 이유로 이념, 그리고 특히 정책이 선거전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당위론은 수십 년째 한반도의 허공을 맴돌고 있다. 선거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에서도 정부의 입장과 정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별로 진행되지 않는다. 남북 관계,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인상과 아파트 가격, 탄소중립과 원자력발전소, 재벌(경영세습), 학벌, 지역 갈등, 남녀 차별 등에 대해 모두 이와 같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시민과 소비자의 역량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면 주권재민이나 소비자주권의 형식논리로 충분치 않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모두 자유로운 언론에 근거하는데 이런 자유를 지탱해 주는 보도에 대한 시민과 소비자의 건전한 판단이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공론의 장 혹은 토론장의 문제다. 이 점에서는 압축적인 경제발전보다 압축적인 민주주의, 특히 압축적인 교육이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단적으로 대학에서는 한국의 사회경제를 고민하고 논의하는 대신 단편화된 지식의 전달과 취직을 의식한 학생들의 학점취득이 압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입학시험과 학벌주의는 중고교 교실에서 사회의 현실과 관련된 문제 제기나 토론을 사소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은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이에 근거해 나름대로 판단력을 육성할 기회를 별로 가지지 못한다.
사실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한국말을 할 수 있고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외형적인 조건보다 더 많은 실체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각자 자신의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상대방의 의견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의견이 서로 다를 때 무엇이 다른지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이런 차이점들에 근거해 자신의 의견을 수정해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삼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나 입장이 개입된 토론에서 이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토론에 취약한 이유는 이런 조건들을 구비한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토론자는 토론의 조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머문다. 또한 토론장에서 다른 토론자로부터 무언가 배우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누구보다 우아하고 거룩하던 사람들도 자신의 이익이 걸리기만 하면 거의 정신을 잃는다. 이런 문제는 대부분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진해 온 대가다.
언론의 일차적 기능은 인식의 공통기반 깔아주는 것
이런 상황에서는 이념, 지식, 법규, 정책이 제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적다. 또한 선거에서 경쟁하는 후보자들은 최소한의 소통도 이루지 못한다. 이와 평행으로 시민들은 후보자의 정책을 분석하기보다 후보자가 어느 편인가를 확인하는 데 그친다. 결국 공통분모가 형성돼 있지 않아 토론이나 공론화의 장이 취약한 것이 한국 사회의 기저질환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일반 시민보다 학자와 지식인, 그중에서도 지식인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지식인과 언론의 일차적인 기능은 한국의 인간과 정치, 경제, 문화와 교육, 환경 등 제반 문제들에 대한 인식의 공통기반을 깔아주는 데 있다. 그런데 한국의 주요 언론은 이와 반대로 나가고 있다. 특히, 언론은 토론을 통해 공통기반을 조성하기 이전에 좌우나 보수와 진보를 외치면서 이런 공통기반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각 영역의 토론이 활발하지 않을수록 학자와 대중을 매개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동시에 지식인이 타락하게 되면 이들이 지식과 정보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일을 자행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것이 한국의 주요 언론이 처한 상황에 가까운 것 같다. 독재에 길들여져 있다가 풀려난 지 3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추가 요인이다.
그렇다면 언론의 현재 상태를 관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상태를 자유방임으로 방치할 수 없다. 또한 어떤 조직도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을 지니기는 힘들며 이 점에서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제공하는 제품이 말과 글이라는 특별한 성격으로 인해 언론에 대한 시민이나 소비자의 감시도 쉽지 않다.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이 반복해서 소비하다 보면 재화에 대한 선택 능력을 지니게 된다고 말한다. 언론 매체에 대해서는 이런 기대가 가능하지 않다. 나아가 한국의 언론은 구독료·시청료의 가격기구나 구독자·시청자의 숫자 등 시장의 경쟁을 통해서도 여과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통령 후보나 국회의원 후보처럼 언론인을 선거로 뽑을 수도 없다. 법과 정책을 강화해 보도 내용을 걸러내는 일도 언론의 자유라는 가치 때문에 쉽지 않다. 인구에 회자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한국 언론의 실태를 놓고 보면 당랑거철이다. 학계의 논문심사와 같이 언론인들이 기사에 대해 서로를 심사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사를 놓고 언론인들이 공개적으로 토론이나 논쟁을 벌이는 것이 가능할까? 정치인이나 학자들만 공개 토론을 벌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언론에 대한 관리나 감독은 결국 시민사회에 인식과 행위의 공통기반이 어느 정도 형성돼 진정한 의미의 토론장이 제공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어릴 때부터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이 육성돼야 한다. 주요 언론이 이 일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역시 입시 위주의 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선결 요건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