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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첫 직장, 처음으로 일하게 된 곳이 대우증권 홍보실이었다. 그곳에서 7년 가까이 기자 상대하는 일을 했다. 엄밀히 얘기하면‘기자님 모시는’ 일을 했다. 기자 문의에 응하고 취재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함께 밥 먹고 술 마시는 게 나의 주된 일이었다. 보도자료를 들고 가서 기사화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안 좋은 기사는 빼달라고 애면글면 통사정도 했다.
2000년부터는 청와대에서 일했다. 공보수석 아래 있는 연설담당비서관실 행정관이었다. 주로 경제 관련 연설문을 썼지만, 부수적으로 청와대 보도자료와 김대중 대통령 회견 답변 자료 작성 업무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연설비서관이 됐을 때는 대통령 직속으로 바뀌었지만 기자들과 접촉할 기회는 더 많아졌다. 해외 순방 기간에는 청와대 출입기자와 함께 먹고 자고 했다.
대통령 연설의 취지와 배경에 관해 설명해야 하는 일도 잦았다.
청와대를 나와서는 기자 그늘에서 좀 벗어나나 싶었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어찌어찌해서 가게 된 데가 유수의 온라인 언론을 가진 그룹의 임원 자리였다. 1년 반가량 내부자로서 언론의 속살을 경험했다. 책 쓰고 강연하면서 살게 된 7년 전부터는 신문, 방송 기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고 산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소개해주고 인터뷰도 잡아주고 하니 말이다.
꼴불견 기자의 유형
30년 가까이 언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면서 많은 기자를 만났다. 이 가운데 가뭄에 콩 나듯이 꼴불견 기자도 있었다. 유형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갑질하는’ 기자다. 기자라는 완장을 안 찼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기자직을 벼슬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무관의 제왕’이란 의미를 잘못 알고, 이를 오남용하는 사람이었다.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이고, 출입처에서 낙종이라고 할라치면 ‘나를 뭐로 알고 물을 먹였느냐’고,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느냐’며, ‘어디 한번 두고 보자’면서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소리에 겁먹을 홍보 담당자는 없다. 고래고래 소리 질러대는 모습이 가관일 뿐이다.
물론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개인이 아니다. 자신이 속한 언론사를 대표한다. 당당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자부심도 넘쳐나야 한다. 출입하는 기관의 장이 제아무리 높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물며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이어도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고분고분해서는 곤란하다.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힘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에 인간 된 도리와 예의가 있어야 한다. 지켜야 할 게 본분만은 아닌 것이다.
또 하나 꼴불견 유형은 ‘묻어가는’ 기자다. 미국 CBS의 전설적인 뉴스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는 “세상에는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으려는 많은 대중이 있으며 그 비율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선동정치의 제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대중이 가짜뉴스에 현혹되지 않도록 이끌 책임이 언론인에게 있다. 정확한 사실 전달은 물론 책임 있는 대안 제시는 언론의 기본적인 책무다. 그런데 실력도 열의도 없는 기자가 적지 않다. ‘뭐가 야마죠?’, ‘이걸 어떻게 봐야 합니까?’, ‘새벽까지 술 마셔서 그런데 뭐라도 쓸거리 하나 없나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왜 기자가 됐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런 기자일수록 출입처 발표나 보도자료를 ‘받아쓰기’ 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기자실 안에서 목소리 큰 언론사 기자의 말을 ‘따라 쓰기’ 바쁘다. 통신사나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베껴 쓰기’함으로써 닮은꼴 기사를 양산한다. 국어사전에 기자(記者)는 “신문,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받아쓰고, 따라 쓰고, 베껴 쓰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꼴불견 세 번째는, 기자직을 출세의 발판으로 생각하는 유형이다. 이른바 ‘폴리널리스트(polinalist)’도 여기에 속한다. 이 부류는 언론인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얼마든지 언론에 종사하다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문제는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정치권을 기웃거리고 재벌의 비위를 맞추면서 잔머리를 굴리는 경우다. 그런 사람일수록 언론 사주에게도 충성한다. 사주의 민원도 잘 해결하고 광고 수주도 잘한다. 이렇게 정치력 있는 부하(?)를 사주도 총애한다.
기삿거리 제공의 즐거움
청와대 참모들의 면면을 보면 그 정부와 언론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청와대는 언론계 출신 비중이 꽤 높다. 홍보수석 산하 조직은 특히 그렇다. 정부마다 이들의 색깔이 다르다. 사주의 천거를 등에 업고 청와대에 들어온 경우. 이들은 사주의 인정을 받으면서 잘 나가던 사람이다. 그다음은 사주의 눈 밖에 났거나 사주 눈에 들지 않아 언론사에선 변두리에 머물렀지만 대통령 눈에 들어 입성한 경우. 마지막으로 메이저 언론에 몸담은 적이 없고, 오히려 그런 언론을 비판하고 성토한 부류다. 이 세 부류 가운데 어떤 사람의 비중이 높은가에 따라 해당 정부의 청와대와 언론의 관계가 좌우된다.
내가 만난 기자 중에는 본받고 배울 만한 사람이 월등히 많았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전문성을 갖춘 기자, 내 글이 부끄러울 만큼 필력이 대단했던 기자, 약자를 향한 측은지심과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이 차고 넘쳤던 기자, 맹렬한 기자정신으로 집요하게 파고든 기자, 균형감을 갖춘 기자 등등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다. 특히 어려웠던 시절 내게 도움을 줬던 기자들이 많았다. 글을 쓰는 지금 그런 사람이 하나둘 머리를 스친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기자를 꿈꿨다. 그래서 홍보실을 자원했다. 신문을 열심히 보다가 언론사 시험을 칠 요량이었다. 그런데 웬걸, 첫 번째 맡겨진 임무가 《대우증권 20년사》 집필이었다. 처음에는 집필하는 분 심부름을 했다. 요청하는 자료를 챙겨서 갖다 드리고 쓰신 원고를 받아오는 단순 업무였다. 그런데 퇴직 언론인이었던 그분이 다른 회사 사사(社史)를 베껴서 준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상사에게 얘기했다. 계약을 해지하라고 해서 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신입사원인 내게 20년사를 쓰라는 것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20주년 기념일까진 책이 나와야 하고 책에 담길 내용을 ‘당신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내가 책을 써야 하는 이유였다. ‘이 책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 책은 나오자마자 책꽂이에 꽂힌다’는 상사의 말에 용기가 났다. 그래서 그냥 썼다. 이 책을 쓰면서 기자의 꿈은 좌절됐다. 그해가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이였기 때문이다.
홍보실에서 일하면서 기자의 일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 우선 어떻게 하면 기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술 사주고 밥 사준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찾아낸 방법이 기삿거리 제공이었다. 당시는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는 시대였다. 기자들은 데스크에 보고할 기삿거리가 궁했다. 아침마다 ‘오늘은 무엇을 취재해보겠다’고 데스크에 보고해야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 회사 도서관에 갔다. 그곳에 지난 신문이 나무 막대에 한 달 단위로 철해져 있었다. 어느 날은 일 년 전 오늘 신문을, 또 어느 날은 이 년 전 오늘 신문을 봤다. 기사는 돌고 돌았다. 1~2년 전 오늘 신문을 참고해 기삿거리를 만들었다. 관련 내용을 취재하는 일은 기자들보다 더 수월했다. 입사 동기나 친한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배경과 의미, 속사정까지 얘기해줬다. 기자들에겐 얘기하지 않는 것까지 속속들이 말해줬다. 매일 기삿거리를 한두 개 들고 있다가 ‘기삿거리 없느냐’는 기자에게 풀었다. 소문은 금세 퍼졌다. 내 기삿거리를 찾는 단골(?)이 생겼다. 기삿거리를 찾는 일 자체가 재미있었고, 기삿거리 제공을 통해 홍보 일도 잘 풀렸다. 무엇보다 내가 제공한 내용이 실제 기사화될 때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그거면 됐다.
기자로서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회한이나 미련은 없다.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틀림없이 꼴불견 기자가 됐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도 새로운 기삿거리를 하나라도 더 싣기 위해 발로 뛰며 취재하는 대다수 기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