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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방송》 독자는 저널리즘, 미디어 관련 일을 하는 분들이고, 소통 전문가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통 문제에 관해 다들 한 번쯤은 고민해봤을 것이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요인은 여럿이다. 사회 지도층의 소통 역량 부족, 계층·세대·성별·지역 간 편 가르기,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중앙과 지방 간 양극화, 그리고 이념적 대립 등. 원인이 복잡다단한 만큼, 그 해법도 간단치 않다. 나는 불통의 원인을 세 가지가 부족한 데서 찾는다. 경청, 질문, 토론이다.
듣지 않는다
나는 말귀가 밝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의 눈치를 심하게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남의 말을 들을 때 말만 듣지 않는다. 그 말의 배경, 취지, 목적을 헤아리며 듣는다. 그래야 잘 맞춰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길게 한 말을 잘 요약했다. 중요한 말과 덜 중요한 말, 주제에 부합하는 말과 벗어난 말을 구분할 줄 알았고, 이를 통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직장 상사가 서너 마디를 얘기하면 그것들을 연결해 맥락을 파악하거나, 몇 마디 사이사이의 빈칸을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상사가 한마디 운을 떼면 이어서 말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한마디만 툭 던져도 그 말을 왜 하며 무엇을 기대하는지, 숨은 의도는 무엇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말귀만 밝은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반박하고 토를 달기보다는 받아주고, 그 말대로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한마디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직장 생활을 잘할 수 있었고, 마침내 대기업 회장과 대통령의 말과 글을 쓰고 다듬는 일까지 하게 됐다. 물론 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뚜렷한 주관 없이,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 듣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말하는 사람의 감정까지 잘 받아준다는 뜻이다. 모든 말에는 감정이 묻어있다. 그 감정을 받아주지 않고, ‘너는 말하는 태도가 왜 그래?’하거나, ‘말본새가 왜 그 모양이야’하고 시비를 걸면 상대방이 말하기 어렵고, 결국 잘 듣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하나, 잘 듣는다는 의미는 말하는 사람을 존중해준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나름 일리가 있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하며 인정해준다. ‘아니야, 됐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듣기 싫어’하면서 묵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부하 직원의 말을 들은 상사, 자녀의 의견을 들은 부모가 그 말의 빈틈을 채워주고 완성도를 높여줌으로써, 그 말대로 했을 때 성사 가능성과 성공 확률을 높여주는 듣기여야 한다. 또 말대로 해서 잘 됐을 때 공을 말한 사람에게 돌리고, 잘못됐을 때는 책임까지 져주어야 잘 듣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우리 조직과 사회에는 이런 문화가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회사나 공무원 조직은 아래에서 위로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된다. 그렇지 않은 조직에서는 위에서 아래로만 말이 흐른다. 또한 공적인 말보다는 비공식적인 말이 횡행하고, 앞에서 하는 말보다는 뒤에서 수군대는 말의 비중이 크다. 공식 회의 시간에는 말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 담배 피면서,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말한다. 이런 말하기는 생산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진정한 소통이라 하기 어렵다.
묻지 않는다
대화는 질문을 통해 이어진다. 묻고 답하는 과정이 대화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이어지려면 상대의 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시비 건다고 생각할까봐 질문을 주저하면 대화는 끊어진다. 그런데 이런 우려는 기우가 아닌 경우가 많다. 반문하면 ‘지금 내 말에 토 다는 거야?’, ‘그래, 내 말 못 믿겠다 이거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긴가민가한 내용은 질문을 통해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대해 ‘내 말이 이상해? 그렇게 어려워?’라고 할까봐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오해가 생긴다.
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학교 교과과정이 질문 중심으로 짜여 있지 않은 데 원인이 있을 것이고, 뭔가를 물으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취급을 받기 싫어 묻지 않을 수도 있다. 혹여 대답해야 할 사람이 난처할까봐 그를 배려해서 질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질문하려면 손을 들고 나서야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나대거나 튄다’고 생각할까봐 꺼리게 된다.
KBS1 라디오에서 매일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이란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한 사람을 초대해서 30분 동안 대략 20개 안팎의 질문을 하는데, 정말 힘들다. 질문하기 위해서 그 사람은 물론 그 사람이 하는 일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 그 사람의 답변에 꼬리를 물고 추가 질문이나 보충 질문도 해야 한다. 상대가 초지일관 “예, 아니요”로 짧게 답하거나, 답변을 피하면 곤혹스럽다. 준비한 너덧 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뭉뚱그려 하나의 질문에 다 답해버리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그만큼 질문은 어렵다. 분명한 건 질문이 없으면 대화가 있을 수 없고, 소통도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토론이 없다
토론은 소통 그 자체이다. 토론은 승부가 아니다. 대통령 후보 토론 같은 경우는 예외지만, 토론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누구 말이 더 옳고 맞느냐를 놓고 겨루는 게 아니고 어느 말이 더 옳은지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기본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필요하면 남의 것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열린 자세와, 보다 나은 수준과 결과물에 대한 성취 욕구도 필요하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남의 것과 내 것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분석해서 서로의 장점을 연결하고 융합할 수 있는 실력도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토론을 활성화하려면 개개인의 비판 의식과 비평 역량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아내와 가끔 말싸움을 한다. 말싸움은 대부분 나의 음주가 발단이 돼 일어난다. 싸움이라고 하지만 아내의 일방적 공격에 가깝다. 공격 내용은 주로 비판이다. 아내의 공격을 받으며 나는 우리 사회의 비판적 사고 수준에 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비판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하는 비판은 푸념이나 화풀이에 불과하다. 비판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술을 끊게 만드는 게 목적인가, 아니면 술은 마시더라도 집에는 일찍 들어오게 만드는 게 목적인가. 술을 끊게 만드는 게 목적이라면 왜 술을 끊게 하려고 하는가. 술을 끊게 하려는 목적이 나의 건강 때문인가,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자신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가, 아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기 때문인가를 밝혀야 한다. “이유 없어. 그냥 끊어” 이건 아니지 않은가.
비판은 또한 합리적 근거를 갖고 해야 한다. 근거는 내가 그렇게 판단하고 주장하는 배경이나 이유, 증거 같은 것이다. 그런 객관적 기준이나 근거 없이 주관적 생각이나 느낌으로 비판해선 안 된다. 그런 비판은 저주나 야유, 음해, 모략으로 취급당할 수 있다. 근거가 있어야 납득과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근거가 빈약하면 논리가 박약하다는 소릴 듣게 된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게 문제라면 일주일에 술자리를 몇 번 정도 하는지, 술 마신 후 귀가 시간은 몇 시 정도인지, 술 마시고 기억이 끊겨 문제를 일으킨 적은 있는지, 한 달에 술 마시는 데 쓰는 돈은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를 가지고 비판해야 설득할 수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타령이라든가, 술독에 빠져 산다고 무턱대고 몰아붙이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근거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사실 근거다. 사례, 지표, 통계, 연구 조사 결과, 역사적 사실 같은 것이다. 두 번째는 소견 근거다. 전문가 의견이나 일반인의 증언, 여론, 혹은 유명인의 명언도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누구나 인정하고 동의하는 상식, 진리 같은 것인데, 어려운 말로 ‘선험 근거’라고 한다. 근거는 최근의 것일수록, 누구나 아는 내용이 아닐수록, 권위가 있을수록 좋다.
비판하는 대상을 분명히 하고 그것에 한정할 필요도 있다. 술 마시는 걸 문제 삼아 얘기를 시작해놓고 왜 내가 결혼기념일을 잊고 넘어간 일을 들추느냐는 말이다. 물론 비판받는 내 처지에서는 비판이 주제를 벗어나 논점이 흐려지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비판은 반론과 반박이 가능해야 한다. 반론이나 반박을 할 수 없는 비판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아내는 술 마시는 걸 즐기지 않는다. 아니 극도로 싫어한다. 이건 취향의 문제다. 취향은 반론이나 반박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하니 당신도 술을 끊으란 얘기는 일방적 주장이자 강요일 뿐 비판이 아니다. 비판은 반박과 반론을 통해 토론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비판과 비난을 혼동해서도 곤란하다. 비판은 헐뜯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비난이다. 사실과 감정, 생각과 느낌을 분리해야 한다. 비판은 사실과 생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감정과 느낌이 개입하면 비난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에 빠지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아내는 술을 마시면 일찍 죽는다는 확신을 갖고 말한다. 대체로 맞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주위에는 송해 선생님 같이 매일 술을 마시고도 장수하신 분이 많다. 방송에 나가진 않았지만 KBS2 <대화의 희열>이란 프로그램에서 고인이 되신 송해 선생님에게 술 예찬론을 장시간 들은 바 있다.
좋은 비판이 되려면 대안이 있어야 한다. 좋은 비판이란 목적을 달성하는 비판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술을 끊는 대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으로 술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 대안 없는 비판은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라는 볼멘소리만 유발한다. 내로남불식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도 술 마시면서 얻다 대고 지적질이야’라는 반발만 살 뿐이다. 그런 경우는 자신에 대한 비판부터 해봐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