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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말하는 게 가장 두려웠다. 글이 피신처였다. 말 대신 글을 썼다. 내 글도 아닌 남의 글을 썼다. 말하지 않아도 됐다. 입이 무거운 게 나의 장점이 됐다.
말수가 적으면 얻는 게 많다. 우선 말실수가 적다. 남의 비밀을 누설할 일도 없다. 험담을 하지 않으니 적을 만들지도 않는다. 말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언행일치가 돼 ‘말이 앞선다’는 소리도, 말의 농도가 진하니 ‘입만 살았다’는 말도 듣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니 호감을 사게 된다.
지금은 강연과 방송으로 먹고산다. 하루도 빠짐없이 강의하고, 라디오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렇게 살 수 있게 된 데는 두 가지가 주효했다고 본다. 말하는 분야와 방식이 그것이다. 분야는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주제, 그러니까 글쓰기와 말하기로 잡았다. 25년 정도 남의 말을 글로 써주는 일을 했으니, 글쓰기와 말하기에 관해선 말할 자격도 있었고, 자신도 있었다. 방식은 강의와 인터뷰다. 말하는 방식은 여럿이다. 연설, 토론, 대화, 강의, 발표 등등. 이 가운데 학창시절 내내 선생님에게 ‘강의’를 들었고, 직장생활 내내 누군가와 ‘대화’했다. 강의와 대화는 내게 가장 익숙한 말의 방식이다.
2023년 올해는 말하기 10년 차다. 나는 어떻게 말로 밥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말을 잘하게 됐을까.
말하면 할수록 잘하게 된다
첫째, 말할 필요가 생겼다. 2014년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잘 들으면 월급을 받았다. 직장을 나오니 듣기만 해선 먹고살 수 없었다. 말해야 했다. 강연을 들으려면 돈을 내야 하듯이, 듣는 건 돈이 드는 일이다. 돈을 받으려면 말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말하게 됐고, 말하다 보니 잘하게 됐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말은 하면 할수록 잘하게 된다. 강의 요청이 많아 강의를 많이 하게 되면 잘하게 되고, 강의를 잘하면 요청이 쇄도하는 선순환을 타게 된다. 반대의 경우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급기야 승자독식에 이르게 된다. 강의를 잘한다는 몇몇은 시간이 없고, 그렇지 않은 다수는 강의가 없다.
누구나 처음부터 기회가 주어지진 않는다.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보할 건 양보해야 한다. 나도 처음엔 강연료를 포기했다. 돈은 안 줘도 좋으니 기회만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기회에 훈련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회가 주어지면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 돈을 주는 강의는 반드시 평가가 이뤄지고, 평가가 좋지 않으면 단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은 ‘듣기’에서 시작한다
둘째, 말동무가 생겼다. 직장 다닐 적엔 아내와 말할 일이 거의 없었다. 청와대에서 일했던 8년 동안은 말은커녕 얼굴 볼 시간도 별로 없었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서 종일 아내와 붙어살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마트에 가건, 산책을 하건 함께 있는 시간 동안 할 수밖에 없는 게 대화다. 아내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누구보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다. 강의건 방송이건 아내에게 먼저 말해본다. 링에 오르기 전에 스파링 상대와 연습경기를 무수히 치른다.
나는 본시 남과 대화하는 것, 아니 남과 만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화의 즐거움을 어렴풋이나마 알기 시작한 건 KBS2 TV <대화의 희열>이란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면서부터다. 그리고 KBS1 라디오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을 진행하면서 대화의 묘미를 속속 깨달아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대화는 ‘말하기’보다 ‘듣기’라는 사실이다. 무언가 말하고자, 자신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 대화의 중심축을 놓으면 대화가 즐거울 수 없다. 하지만 상대를 알고,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는 ‘듣기’에서 출발하면 대화가 재밌어진다. 나의 호기심과 탐구욕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말을 다듬어주는 ‘혼잣말’
셋째, 혼잣말이다. 아내와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혼잣말을 즐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길을 걸으며 혼잣말을 한다. 내게 묻고 내가 답한다. ‘~에 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묻고 답한다. 그것에 관한 내 생각과 의견을 찾는다. 그 무엇에 정의를 내려 보기도 한다. 한마디로 정의 내린 후, 그렇게 규정한 이유를 말해본다. 오래전 기억을 떠올려 서사를 펼쳐보기도 하고, 예정된 강의를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한다.
혼잣말이야말로 최고의 말하기 연습이다. 연극을 보면 대사 못지않게 독백과 방백이 많다. 어떤 말이든 가리지 않고 해볼 수 있다. 또한 상대가 있는 말하기는 퇴고가 어렵지만, 혼잣말은 말하기와 고치기를 반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주 하는 혼잣말은 자기암시가 된다. 반복하는 혼잣말은 다짐이 되고, 현실로 이뤄지기도 한다. 혼잣말을 많이 해보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생사를 건 햄릿의 고뇌도 혼잣말이었다.
메모하는 습관
넷째, 메모다. 강의나 방송을 하면서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글에 가까운 말이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뺄 것도 빠진 것도 고칠 것도 별로 없는 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그렇다. 김 전 대통령의 말을 녹음해서 글로 풀면 수정할 데가 없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메모다. 메모는 말을 잘하기 위한 필수 준비물이다. 메모로 말할 거리를 수집하고, 메모하면서 말할 내용을 정리해본다.
직장에서 나오기 전까진 메모하지 않았다. 받아쓰기를 했다. 학교 다닐 적엔 선생님의 말씀을, 직장 다닐 적엔 상사의 말을 받아 적었다. 남의 말을 적으면 받아쓰기고, 내 말을 적을 때 메모가 된다. 메모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읽기, 듣기, 보기, 겪기를 많이 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내 생각이고 감상이며 철학이다. 나는 그렇게 메모한 걸 주변사람에게 말해본다. 말해보고, 말이 된다 싶으면 2차 메모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메모를 가지고 강의도 하고 방송도 한다.
글로부터 말이 나온다
다섯째, 독서다. 메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서를 즐기게 됐다. 메모 거리를 가장 많이 찾을 수 있는 데가 책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다섯 종류의 메모 거리를 얻는다. 내 말에 인용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첫 번째요, 책에 있는 저자의 생각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내 생각이 두 번째요, 책에 있는 사례와 이야기를 읽으면 기억나는 내 경험이 세 번째요, 책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감정이 네 번째요, 마지막 다섯 번째는 책의 저자가 본 것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본 것을 메모한다. 책은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 하지 않던가.
내가 그나마 지금처럼 말할 수 있었던 데는 학교 다닐 적 읽은 소설이 큰 보탬이 됐다. 나는 내가 아는 내용이나 내 생각을 설명하는 데 서툴다. 본 것을 묘사하는 것도 잘하지 못하고, 임기응변과 재치 있는 받아치기에도 능하지 못하다. 오로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 있다. 스토리텔링은 남 못지않게 한다. 이런 힘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중학교 때 즐겨 읽었던 한국 중단편 소설과 고등학생 시절 삼매경에 빠졌던 장편 연애소설 덕분이 아닌가 싶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 때 아버님이 사주신 계몽사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덕분이기도 하다.
말의 본보기를 만든다
여섯째, 롤모델이다. 나는 롤모델을 만들고, 그를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말공부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내 말의 최초 롤모델은 엄마였을 것이다. 누구나 엄마 품에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학교에 가서는 좋아하는 선생님의 말을 벤치마킹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말을 흉내 내고 그 사람 같이 말하고 싶은 마음을 먹는 게 말을 배우는 첩경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운아다.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에게 말을 배웠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글을 배운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말을 배운 것이었다. 내가 쓴 글은 그분들의 말이었으니, 그분들이 고쳐준 것은 글이 아니고 말이었다.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9년 전부터는 유튜브로 여러 사부를 모셨다. 설명하는 말하기는 유시민 작가를, 인터뷰 말하기는 유재석 씨를, 강의하는 말하기는 김창옥 씨를 모델로 삼아, 이분들의 말을 듣고 또 들었다. 한 사람의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 같이 말하게 된다. 캐나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1960년 일명 ‘보보인형 실험’을 했다. 5세 전후의 아이 앞에서 보보인형을 때리거나 집어 던지는 모습을 되풀이했더니, 아이가 혼자 놀 때도 이런 공격적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반두라는 모델링(Modeling) 이론을 주창한다. 사람은 누구나 모델이 되는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낭독을 통해 말을 갈고 닦는다
일곱 번째, 낭독이다. 글을 또박또박 잘 읽는 사람, 감정을 이입하며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말을 잘할 확률이 높다. 글을 읽는 유창성은 말의 유려함과 직결된다. 나는 이런 유창성을 KBS1 라디오 <강원국의 말 같은 말>을 1년 넘게 진행하면서 키웠다. 내가 쓴 원고를 아나운서처럼 읽는 훈련을 한 것이다. 그런 과정이 지금 말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책을 읽거나 휴대전화에서 글을 읽을 때 눈으로만 보지 말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읽어보길 권한다. 어휘와 문장에 신경 쓰며 읽으면 금상첨화다.
이밖에 모니터링과 대역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 거북하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자기 말의 문제점을 물어볼 수 있고, 남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며 반면교사 삼을 수도 있다. 나는 TV나 라디오에서 토론이나 토크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청취하면서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떻게 말할까’, ‘저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해본다. 일상이 말하기 연습이고 훈련이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말을 잘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기획연재-6개의 시선’ 코너는 2023년 2월호를 마지막으로 종료됩니다. 그동안 연재해주신 필자 여섯 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