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상세
[기획연재] 6개의 시선 11 - 고프만과 함께 SNS를 생각하며
기획연재 | 등록일 : 2022-01-28

새해가 되면 누구나 해가 바뀌는 것을 계기로 달라진 내가 되고 싶고 나아가 그 변화가 긍정적이기를 바란다. 달라지되 나아질 방법은 사뭇 간단하다. 못된 습관은 줄이고 그 자리를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습관으로 채우면 된다. 2021년의 마지막 날, 없어지면 좋을 습관과 생기면 좋을 습관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만들다가 SNS는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답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은 사회를 연극 무대에 비교했다. 세상이 연극 무대라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연극 무대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라 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고프만의 비유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우리의 행동거지는 혼자 있을 때와는 분명 다르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엔 때로 세수를 오후 늦게까지 안 하기도 한다. 타인이 세수도 안 한 내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사회적 체면이 손상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타인의 눈길이 도처에 깔린 집 외부로 나가는 순간, 지난밤의 숙면을 표시하는 뒷머리의 까치집을 방치할 수는 없다. 최소한 모자라도 써서 산발한 머리를 감춰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연출된 행위가 거짓이란 가면을 의미하진 않는다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우리의 사회적 행동에는 타인의 눈길을 의식한 연출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적절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성인일수록 자기 연출을 능숙하게 해낸다. 좋거나 싫은 감정을 절대 속일 수 없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성인은 사회생활에서 포커페이스 관리를 차질 없이 해낸다.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익혀 대인관계 기술이 노련해질수록 타인의 특정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특정한 행동이 무엇인지 잘 알고, 그 행동을 TPO(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맞춰 적절하게 연출해낸다. 의도된 대로 사회생활이 이뤄지는 인생의 타율은 이런 방식으로 높아진다.

 

우리가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연출된 행위를 한다고 해서 거짓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기꾼이 아닌 이상 이런 연출은 악의가 아닌 선의에서 출발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연출의 목적은 효과적인 거짓말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을 기만하기 위해 자기 연출을 수행하지 않는다. SNS에 올린 맛있는 음식 포스팅은 돈을 받고 바이럴 마케팅을 하기 위해 올린, 사실상은 거짓말인 블로거의 후기와는 다르다. SNS에 내가 올리는 포스팅엔 나름 진심이 담겨 있다. 단지 나는 산발한 머리, 정리 정돈되지 않은 집안 풍경, 눈곱을 떼지 않은 얼굴 사진을 찍어 포스팅하지 않을 뿐이다. 설거지 안 된 부엌 사진은 SNS에 올리지 않지만, 모처럼 근사하게 차려진 저녁 식사는 최선을 다해 조명의 효과와 사진 애플리케이션의 놀라운 테크놀로지까지 동원해 연출한다.

 

자기 관리는 필수다. 연극배우가 무대 뒤편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관객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객이 볼 수 있는 무대의 전면에서 배우는 관객이라는 타인과의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자기를 관리해야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억제하지 않고, 혹은 연출하지 않고 드러낸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거대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라는 영화 속 혼란을 생각해보자. 우연한 사고로 타인의 혼잣말을 다 알아듣게 된 상황은 그 자체로 끔찍하다. 차라리 우리는 진실과는 좀 거리를 두고 있더라도 검열되지 않은 속마음을 아는 것보다는 연출된 사회적 언어를 접하는 게 낫다.

 

타인은 무대의 후면인 개인의 내밀한 비밀스러운 공간에서의 행위를 알 필요 없다. 아니 알아서도 안 된다. 연출되지 않은 행동은 보호받아야 하는 사생활인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내밀한 공간에서 무엇을 하는지 타인에게 알릴 의무도 없고, 타인은 다른 개인의 내밀한 공간을 탐색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무대 후면, 즉 사생활 탐지는 현대의 커다란 범죄 중 하나다.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한 완벽한 무대 후면은 없다

 

무대 전면에서의 감정 연출로 인해 피로가 느껴져도 무대 전면으로부터 무대 후면으로 물러나면 감정의 피로를 통제할 수 있다. 격식을 차리기 위해 넥타이를 온종일 매고 구두를 신어야 했던 날 집에 돌아오면 유독 제멋대로 옷을 편하게 입고 싶어진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 연출로 인한 감정의 긴장도를 해소할 수 있는 무대 후면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법에 의해 그리고 도덕에 따라 보호받았던 개인의 무대 후면이 SNS를 통해 무대의 전면에 전시되기 시작하면 공인도 아니며 더더욱 연예인도 아닌 우리 평범한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 평범한 우리도 공인처럼, 인기 스타처럼 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무대 후면을 찾지 못한다. 삶에서 완벽하게 보호되는 무대 후면이 없는 사람은 감정의 긴장감을 풀 수 없다. 연예인이나 셀레브리티처럼 주목 경제에 의존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그 대가로 치르는 감정의 동요는 누구나의 것이 된다.

 

고프만은 고작해야 우리가 일생생활에서 사용하는 미디어가 라디오와 텔레비전만 있던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생활을 연극에 비유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일방향 미디어다. 우리는 그저 시청자이거나 청취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는 SNS의 시대에 고프만의 이론은 수정돼야 한다. 고프만의 연극 비유는 대면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 SNS는 대면 상호작용의 빈도를 우리의 인생에서 보잘것없는 것으로 축소한다. 코로나19 시대는 이 경향을 더욱 강화했다.

 

우리는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사교 활동 대부분을 대면하지 않은 채 수행한다. SNS 애플리케이션이 기본 장착된 스마트폰을 깨어 있는 동안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상, 우리는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사생활의 공간 속에서도 SNS를 통해 타인과 연결돼 있고, 타인과 연결돼 있기에 감정 연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 있으면서도 감정을 연출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조차 SNS의 틀을 빌려 이뤄지면, 무대 후면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한 무대 후면은 완벽한 무대 후면이 아니다.

 

SNS에선 집단 희열보다 집단 증오가 증폭되기 쉽다

 

대면 상호작용에서 우리는 때로 연출로도 감추지 못하는 타인의 실제 감정을 눈치챌 수 있다. 괜찮다는 표정을 무대 전면에서 연출하고 있는 사람에게 진짜 감정을 묻기도 한다. 하지만 SNS에서는 본래의 감정과 연출된 감정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재간은 누구에게도 없다. SNS상 ‘나는 괜찮다’는 메시지는 그대로 사실이 된다. 이것을 알아채고 있는 사람들은 영리하게도 SNS를 자신의 연출된 감정을 세련되게 전시하는 장소로 이용한다. 농담처럼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인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이라는 SNS를 사용한다는 말은 진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SNS는 또한 사람의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SNS를 매개로 하여 무대 전면이 강화되는 사회는 다른 말로 하자면 ‘대도시적 무관심’이 폭증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모두가 모두에게 무관심한 상황, 하지만 이 무관심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 감정을 증폭한다. 무관심이 몸에 밴 시대에서 관심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극의 증폭이다. 자막으로 도배되고 자극적인 효과음으로 가득 찬 텔레비전 프로그램, 호들갑을 떨어야만 편집되지 않고 잠시라도 화면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리얼리티 쇼에 패널로 참여한 연예인의 조마조마한 심정에 기인한 매우 독특한 텔레비전 퍼스낼리티의 심성을 모두가 따라 한다. 누군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트위터에서 관심을 끄는 방법은 고양된 감정, 증폭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SNS의 이런 논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득한 우리는 다소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어느새 슬며시 주목 경제에 목을 매는 ‘관종(관심받고 싶은 사람)’이 돼 간다.

 

혼자의 감정과 공유된 감정은 다르다. 기쁨이라는 감정은 공유될 때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공유될 때, 우리를 우울에서 건져낼 수 있다. 하지만 증폭된 감정이 집단 희열이 아니라 집단 증오 방식의 회로를 따라 움직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SNS라는 미디어 회로에서는 집단 희열보다는 집단 증오가 증폭되기 쉽다. 한때 새로운 미디어라는 기대로 SNS를 시작했던 나라는 사람은, SNS에서 감정이 증폭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특히 그 감정이 희열보다는 증오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새해 어느 날 스마트폰에서 SNS 애플리케이션을 지워버렸다. 새해에는 이 반복적인 감정의 회로에서 절실히 벗어나고 싶었다. 소박한 나의 새해 소망이다.

저자의 다른 미디어
  • 필자 : 노명우
  • 소속 :
  • 직함 :
  • 발행 : 2022-01-28
  • 조회수 : 6
  • 키워드 :
블로그 공유 트위터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