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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정당화에 대한 문제 제기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보며 우리는 여기서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여기란 죽고 죽이는 폭력 이외에 어떤 선택도 없다고 믿는 자들이 많은 이 시대를 의미한다. 러시아는 동족을 살리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우크라이나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싸운다고 응수한다. 그리고 전쟁을 관람하는 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실시간 폭력에 열광하며 다짐한다. 자존을 위해, 평화를 위해, 심지어 평화를 위해 결국 우리는 싸워야 한다고.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러시아든 다른 어떤 나라든 탱크를 앞세워 우리 동네 앞으로 진격해 오면 총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들고 싸울 것 같다. 쳐들어오는 적을 보면서 협상이니 비폭력이니 고매한 이유를 내세우며 무기력하게 앉아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길밖에 없을까. 애초에 이렇게 싸우게 될 수밖에 없었나. 아니 이렇게 싸우고 또 싸우면 결국 무엇이 남게 되나.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인류가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인류는 문명화 과정과 인도주의 혁명을 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 이젠 전쟁으로 죽은 자들의 비율이 가장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핑커가 말하는 평화의 시대란 실은 제도적 폭력, 관리된 폭력, 그리고 폭력을 통제하는 폭력의 시대기도 하다. 이 시대에 폭력을 독점하는 기구인 국가는 폭력을 정의하는 의미론마저 지배하고 있다. 평화의 시대란 놀랍게도 집회, 시위, 점거, 파업은 물론이고 증오 발언과 같은 행위도 ‘폭력적’이라고 부르며 관리하는 시대인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비폭력의 힘》을 폭력의 정당화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자기방어를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 적에게는 폭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말, 그리고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들은 모두 의심스럽다. 그는 폭력이란 어떤 행위지만 동시에 ‘해석된 상태’임을 상기시킨다. 해석된 상태로서 폭력은 흔히 도구적으로 사용될 뿐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실로 폭력은 도구라기보다 목적, 그것도 숨겨진 목적으로 작용한다. 폭력은 때로 ‘맞아도 싼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기준점으로 작동한다. 폭력이 수단인 조건에서 실제로 보호받는 대상은 ‘맞아도 싼 사람들’을 골라내는 그 기준이다.
비폭력의 힘과 폭력 금지의 폭력성
《비폭력의 힘》은 주디스 버틀러의 다른 책만큼이나 난해하다. 이 구절이 정말 그 뜻일까 자신을 의심하며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천천히 새기며 읽어 나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모퉁이에서 감동적인 구절을 만나 치인다. 다른 구절의 끝에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그래서 가장 좋은 종류의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독자는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이리저리 부딪치며 앞으로 나가는 극적 전개에 참여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최근 읽은 것들 가운데 이 책에서 가장 묵직한 지적 자극을 받았다.
버틀러는 먼저 비폭력이라고 해서 무기력한 게 아니라고 해명한다. 비폭력은 폭력만큼이나 오해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침묵시위나 준법투쟁을 벌이는 사회적 약자들의 집단적 저항을 생각해 보자. 비폭력은 개인의 윤리적 입장이라기보다 일종의 실천이다. 그런 비폭력 행동에는 신체적 움직임 또는 멈춤이 개입한다. 비폭력은 폭력과 경계를 같이 하면서 때로 모호한 폭력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 경우 비폭력은 어떤 실천의 원칙이라기보다 몸으로 진행하는 공격적인 투쟁이 된다. 공격적인 비폭력적 저항이 가능하다.
비폭력이 추상적인 원리를 넘어선 이유는 그것이 강력한 실천이 되기 때문이다.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움직임이 개입하는 실천은 자주 폭력과 비폭력 간에 애매한 경계를 드러낸다. 비폭력은 저항을 ‘폭력’이라고 이름 붙여 탄압하는 권력자의 억압적 의도를 드러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애매함과 폭로 속에서 비폭력은 관련된 자들 간의 상호의존성을 드러낸다. 폭력의 한가운데서 비폭력을 실천함으로써 폭력이 인간의 상호의존성 그 자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갈등과 폭력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홉스(Thomas Hobbes)가 정식화한 ‘자연 상태’란 태초에 개인 간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우리가 이제 겪는 전쟁마저도 결국 태초의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대응 방식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버틀러는 홉스의 자연 상태가 실은 자급자족하는 남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냈다고 지적한다. 이 환상은 폭력적 조건을 정당한 권력의 산출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버틀러는 홉스와 반대 길을 택한다. 버틀러는 일단 홉스의 정식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공격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인간의 윤리는 그 공격성을 통해서 사람들 간의 근본적 의존성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은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폭력을 금지하는 법령을 하나 생각해 보자. 이런 법령은 흔히 특정 종류의 폭력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규율이 된다. 그런데 그 경계가 작동하면서 벌어지는 일은 폭력을 다스리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경계는 흔히 우리 편에 대한 폭력은 금지된 것이기에 합법적으로 저지되고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남의 편에 대한 폭력은 개입할 수 없다고 무시하며, 적에 대한 폭력은 다른 이유를 들어 마땅히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된다. 폭력 금지 법령이란 때로 누가 우리 편인지, 그러므로 그 법령에 면책이 되는 상황인지 구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버틀러는 프로이트(Sigmund Freud)를 인용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가 살인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줄 뿐이라 말한다.
상호의존성의 윤리학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작동하는 폭력 금지 규범은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을 골라내는 작업에 이용된다. 애도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폭력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애도할 만한 삶의 급진적 평등성(the radical equality of the grievable)’을 주장한다. 폭력 금지 규범을 작동해서 더 잔인하고 정교한 폭력을 정당화하기보다 비폭력 실천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생명을 지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지점을 읽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실은 평등성을 ‘애도할 만함’에서 도출하는 일은 나도 고민하고 있기에 그랬다. 생명의 멸실은 그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며 따라서 누구의 생명이냐가 관건일 수 없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모든 생명을 가진 자들의 멸실에 대해 누군가 애도하는 이가 있다는 주장도 좋다. 그러나 이 두 관찰로부터 모종의 평등성 이념을 도출하려면 뭔가 보완적인 논변이 필요하다.
인간은 필멸한다는 사실을 해명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죽음 그 자체의 가치는 물론 죽음을 접하는 주변 사람들의 상실감과 비통함의 종류와 정도도 각각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남겨진 자의 상실감도 그렇다. 다만 이 상실이나 상실감으로부터 평등성의 조건을 도출하는 게 어렵다. 버틀러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논변의 연결고리에서 일종의 공감론을 제시한다. 상대방을 잃는
상실감이 자신에 대한 그것과 같다는 깨달음을 말한다. 그는 ‘보편적으로 애도 받을 권리’가 왜 심리적 현실이 아닌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인지 밝히지 않는다. 그저 ‘너의 애도할 만한 죽음은 실은 나에 대한 것이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버틀러가 주장한 ‘평등한 상실감 논변’을 타당하게 변호할 수 있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겠다고 고민해 본다), 이는 엄청난 윤리적 함의를 갖게 된다. 일단 합법적 처벌로서 사형 집행이 가능하다고 믿거나, 폭력이 있어야 폭력을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궁극적으로 국가가 독점한 폭력의 범위 밖에 있는 폭력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응징해야 마땅하다는 주장 등이 의심스럽게 된다.
적국의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죽음도 애도의 대상이 돼야 한다. 버틀러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죽음과 상실감을 막기 위해 공격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누구이건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한 일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비극을 지켜보면서 한탄하지 못하는 인간은 스스로 비극적 결말을 준비할 뿐이다.
좀 더 복잡하고 애매한 사례를 들어 보자. 시위자들이 길거리에 모여서 집단으로 청원하는 일은 그 자체는 물리적 타격이 아니지만 이미 소란과 분란, 그리고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소요다. 즉 문제적 현실이다. 만약 이 소요 끝에 누군가 갑자기 크게 다친다면 문제적 현실은 그저 폭력이 아닌 ‘법적 제재가 필요한 폭력’이란 현실이 된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된다. 이때 법적 집행력이 재빠르게 개입한다. 이 개입에는 애초에 왜 어떤 폭력은 다른 폭력보다 더 보호받는 것처럼 보이는지, 왜 누군가 죽거나 다쳐야 폭력으로 인정되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째서 누구라도 비통할 수밖에 없는 상해가 발생한 현실에 처음부터 무감각하게 대응했는지 등에 대한 고려는 없다. 단지 폭력의 책임자를 찾아서 처벌함으로써 같은 종류의 폭력이 재발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거추장스럽게 말을 더하자면, 폭력 시위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버틀러의 감수성은 폭력으로 치달은 시위에 무감각하게 행정적으로 대처하거나, 아니면 그런 기술적 대응 자체가 폭력이기에 시위를 준비할 때 처음부터 전투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주장 모두가 싸우고 또 싸워야 하는 비극적 현실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시위도 비폭력적 저항을 명시적으로 밝혀서 오히려 폭압적으로 반응하는 현실을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고, 시위에 대처하는 행정 권력도 위법한 조건을 찾아서 시위대를 처벌하려 골몰하기보다 시위자와 함께 폭력을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역으로 버틀러의 상호의존성 윤리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자주 폭력을 은폐하는 수사법으로 이용된다. 예컨대, 식민주의자는 식민지의 의존성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그들의 종속성을 정당화한다. 평화를 주장하는 개량주의자는 억압적 권력에 저항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이런 비판적 관점도 받아들여야 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버틀러는 누구보다 식민주의를 거부하고, 억압에 저항할 것을 권고한다. 다만 식민주의자를 모두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느니, 개량주의자의 발언권을 봉쇄해야 한다며 나서는 행동이야말로 마찬가지로 폭력이라는 사실을 경고한다.
버틀러, 소통의 윤리학자
폭력 금지는 모든 소통의 윤리학의 서문에 나온다. 싸우자며 소통의 규범을 논의하는 일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폭력을 통한 소통이 있는가 하면, 폭력보다 잔인한 소통도 있다. 때로 폭력과 소통을 분별하는 일이 과제가 된다. 내가 보기에 버틀러는 소통의 윤리학이 전제로 삼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헤쳐나간다. 폭력은 그 자체가 합리적 소통의 결과일 수 있고, 소통은 때로 무자비한 폭력을 폭로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격분할만한 발언》에서 증오를 표현하는 발언을 통제해야 한다는 규제론이 얼마나 반동적인지 성공적으로 논증했다. 그리고 대항 발언의 수행적 가능성을 밝혔다. 《비폭력의 힘》에서 그는 비폭력적인 저항의 몸짓(이는 당연히 증오와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를 동반하기도 한다)을 규율하는 제도가 실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그 생각과 뿌리를 같이한다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나는 버틀러가 수렁에 빠져드는 소통의 윤리를 구원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폭력 현장을 뉴스로 포장해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시대에 모두가 평화주의자인 척한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불사해야 하며, 실은 폭력이야말로 유일한 평화의 방책이라고 말하는 도구주의자들이 있다. 시민적 평화란 ‘동료의 따귀를 때리는 듯한 발언’을 폭력으로 다스림으로써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유에 무감각한 자들도 있다. 그런 자세와 태도가 실은 제도적 폭력을 불가피하게 보는 둔감성을 기르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응어리진 침묵을 낳고, 결정적으로 결국 모두가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새로운 자연 상태를 초래한다는 것을 무시한 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