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지난 4월 21일 미국은 커트 캠벨(Kurt Campbell) 국가안전보장회의 인도태평양조정관을 대표단으로 하는 사절단을 태평양의 소국 솔로몬 제도에 급파했다. 4월 19일 중국과 솔로몬 제도가 체결한 안보협정에 대한 긴급 대응책이었다. 양국 간 안보협정의 골자는 중국이 솔로몬 제도 내 중국인의 자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 함정 등을 파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캠벨은 머내시 소가바레(Manasseh Sogavare) 솔로몬 제도 총리를 만나, 미국의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중국이 안보협정을 이용해 솔로몬 제도에 해군기지를 만들 수 있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캠벨은 또 솔로몬 제도에 대한 의료 및 경제 지원을 약속하며 ‘차이나 머니’에 넘어간 솔로몬 제도를 달래려고 애썼다.
솔로몬 제도 바로 아래 위치한 호주 역시 전 각료가 나서 중국과 솔로몬 간 안보협정을 비판했다. 실제 솔로몬 제도는 호주 북쪽에서 비행기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어 호주의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다.
솔로몬 제도가 열강의 구애 대상이 된 이유
인구 70만 명으로 태평양의 여러 소국 중 하나에 불과한 솔로몬 제도가 세계 열강의 구애 대상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솔로몬 제도는 파푸아뉴기니 동쪽, 호주 북쪽에 있는 여러 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중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중국해로 해상력을 뻗치기 전까지는 세계 외교 무대에서 존재감조차 느끼기 어려운 나라였다. 하지만 중국이 아프리카 공략에 이어 남중국해와 연결되는 태평양의 소국에 경제원조를 미끼로 연결망(일대일로)을 넓히자 솔로몬 제도의 입지가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국이 솔로몬 제도에 군사 거점을 마련할 경우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길목을 틀어막고 동시에 호주를 위에서 봉쇄할 수 있는 형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국가의 지리적 특성은 나라의 규모에 상관없이 국제 질서와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이웃 나라가 어떤 나라며, 산·강·바다는 어떻게 연결돼 있으며, 어떤 천연자원을 갖고 있느냐는 국방, 외교, 경제 등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지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국가의 흥망과 세계 패권 전략을 분석하는 지정학적 시각을 유행시킨 주인공은 팀 마셜(Tim Marshall)이다. 영국 저널리스트 출신인 마셜은 2015년 《지리의 힘(Prisoners of Geography)》을 펴내 지정학을 유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도 이 책이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국가 흥망성쇠와 지리적 특성의 관계
《지리의 힘》 1편은 러시아·중국·미국·유럽·중동·아프리카·인도·파키스탄·일본·한국·라틴아메리카 등 지정학적 거대 블록과 지역을 지정학적으로 분석했다. 2022년에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고 1편을 다시 읽어보니 마셜은 이 전쟁을 정확하게 예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문에서 푸틴이 “신이시여, 어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산맥을 펼치지 않으셨나이까”라고 기도했을 것이라고 썼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평원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면 우크라이나의 이탈을 그리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리의 힘》 2편은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2000년대 이후 다극화 체제로 변하면서 국제 정세의 중심 무대에 오른 새로운 선수들을 다뤘다. 호주·이란·터키·그리스·영국·스페인·에티오피아 등 8개 국가가 그 선수들이다. 마셜은 8개 국가 외에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남쪽 지역을 뜻하는 사헬과 같은 권역과 우주 공간을 새로운 분석 대상에 포함했다.
마셜의 지리적 접근법의 특징은 매일 벌어지고 있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국가 간 분쟁을 지리적 특성에 대입시켜 보는 것이다. 마치 인공위성에 앉아 해당 지역의 지리를 줌인했다가 줌아웃하면서 지형을 원하는 대로 살피면서 이슈를 분석하는 듯하다.
따라서 마셜은 모든 장을 분석 대상 나라의 지리적 특성에 대해 개관하면서 시작한다. 그는 지리적 개관에서 가장 먼저 각 나라의 산, 바다, 강 모양을 외부의 적에 대한 방어적 관점에서 살핀다. 즉, 지리가 외적의 침입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지는 것이다.
이란의 경우 자그로스(Zagros)산맥, 엘부르즈(Elburz)산맥 등 거대한 산맥이 남·서·북쪽 경계선에 위치해 누구도 침략이 쉽지 않은 지형을 갖고 있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미국도 “사막은 가능하지만 산은 가능하지 않다”며 이란 본토 침략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정이 바로 이란의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두 번째 분석 요소는 이웃 나라가 어떤 나라들이며, 이들과 종교·종족 면에서 어떤 악연을 맺었는가를 살핀다. 이란은 이라크와 서로 이웃하고 있지만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 이슬람의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은 수니파가 지배했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 8년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세 번째 지리적 요소는 천연자원이다. 이집트의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에티오피아는 거대한 담수호를 갖고 있어 물이라는 전략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천연자원은 상황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나라 안팎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네 번째 지리적 요소는 위치의 전략적 성격이다. 터키는 반은 서양에, 반은 동양에 걸쳐 있다. 서쪽으로는 유럽과 이어지면서 EU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그러면서 동쪽 이슬람 지역과 연결되면서 이슬람의 패권 경쟁에서도 한몫하려는 의도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유라시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호주는 오랫동안 지리적 이점을 누려 왔지만 중국의 남하 전략으로 인해 봉쇄 위험성이 높아졌다. 예를 들어 중국이 호주의 북쪽에 위치한 섬에 해군기지를 구축해 서태평양을 장악하면 호주의 인도양 쪽 관문과 태평양 쪽 관문이 막힐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패권 전쟁의 무대였던 그리스는 특유의 전략적 위치성으로 인해 21세기에 또다시 화약고가 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시리아 내전 여파로 유럽연합(EU)으로 가려는 난민이 몰려들고, 또 지중해에 가스전이 발견되면서 터키와 갈등이 계속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라비아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호르무즈(Hormuz) 해협을 끼고 있는 이란은 세계 에너지 공급망을 언제든지 마비시킬 수 있는 지리적 무기를 지니고 있다.
지정학으로 살펴본 국제적 생존과 번영 전략
마셜의 이런 지정학적 접근법을 잘 활용하면 매일 외신을 타고 들어오는 해외 뉴스를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란·사우디아라비아·터키 편은 이슬람 문명 내 갈등과 패권 다툼을 이해하는 데 꽤 유용하다.
지정학적 접근법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유행했다가 냉전 시대에 잊혔다. 그러다가 지정학이 다시 관심을 받는 것은 흔히 미·중이 패권 다툼을 벌이는 등 강대국 간 권력 정치가 재등장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지정학은 세계 패권이든 지역 패권이든 패권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접근법인 것이다.
그러기에 마셜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속 한켠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강대국과 이웃함으로써 늘 전쟁과 학살 위험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중소국가에게 지정학은 그리 반가운 이론이 아니다. 강대국의 전략을 지정학적 관점으로 잘 이해한다고 해도 강대국의 야심을 꺾을 수 있는 수단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경우 설사 이번 침공을 물리쳐도, 러시아의 남쪽 이웃이라는 지리적 숙명으로 인해 러시아의 침략 위협을 영구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한반도 역시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등 4대 열강의 힘이 부딪히는 지역에 위치해 자력으로 지정학적 위험을 제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한반도 등 지리적 약점을 지닌 국가에게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생존 전략은 어떤 것일까. 러시아와 이웃하고 있는 핀란드,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안보 전략이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상상력을 발휘해 러시아의 침공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알리고 지구촌의 지원을 이끌어낸 우크라이나의 사이버 연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국제 정치에서 한 공동체가 생존하면서 번영을 누리려면 끊임없이 연대할 수 있는 이웃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는 지리적으로 연결된 우방을 만들지 못했지만 사이버 공간에서 수많은 연대를 이끌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