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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열의 서방견문록: 뉴욕 편》(이하 《서방견문록》)을 2022년 11월에 처음 접했다. 한국신문협회에서 매년 갖는 송년 행사 초청 강연자로 김재열 작가를 섭외했다는 공문을 통해서다.
이름난 여행작가가 워낙 많은 탓인지, 김재열 작가의 이름은 생소했다. 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연상하게 하는 책 제목도 거창하다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강연 전 책을 구입해 첫 장을 읽으면서 김 작가의 화려한 스토리텔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김 작가는 우선 “지구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독자의 귀를 쫑긋거리게 한다. 이어 그는 한 권의 책인 지구를 읽기 위해 전 세계를 주유하면서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을 문학·역사·철학적 지식과 버무려 여문사철(旅文史哲) 방식의 여행기를 들려주겠다며 호기심을 잔뜩 자극한다.
김 작가는 먼저 책 제목을 《서방견문록》이라 정하고 부제를 뉴욕 편이라고 붙인 의미를 설명하는 데 도입부를 할애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빗대어 자신이 《서방견문록》에 담고자 하는 집필 의도를 부각하려는 의도에서다.
김 작가는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은 세월이 흘러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을 촉발했고, 마침내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해석한다. 여행기 한 권이 갖는 문명패권 전도력(顚倒力)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 작가는 서방 문명을 관광객 마인드로 겉으로 핥지 말고, 문사철의 관점에서 깊게 볼 것을 권한다. 그래야 그는 서세동점 속에서 생존하고 따라잡기 급급했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시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럼 서방 문명 첫 탐험지가 왜 뉴욕일까?
김 작가는 “뉴욕은 미국보다 더 미국다운 도시이자 ‘세계 문명의 용광로’라고 일컬어지는 ‘서양 문명의 종착지’다. 또 현대 산업자본주의 문명의 살아있는 전시장이자 수백여 개의 언어를 가진 세계인이 한데 어우러져서 모여 사는 곳”이라고 뉴욕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이어 “다양한 문화가 마법처럼 공존하는,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류 문화의 초고밀도 축소판”이라면서 “뉴욕에 싫증 난 자는 인생에 싫증 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서방 문명의 현재·과거·미래를 모두 품은, 서방 문명의 수도라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화자가 케네디 공항에 내려 차를 차고 퀸스보로 브리지(Queensboro Bridge)를 통해 뉴욕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시작해 맨해튼의 주요 관광 포인트를 차례로 돌아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친숙함’으로 끌어들여
‘놀라움’으로 빨아들이다
UN 빌딩,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 콜럼버스 서클(Columbus Circle), 5번가(Fifth Avenue), 카네기홀(Carnegie Hall), 월스트리트(Wall Street), 뉴욕공공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허스트타워(Hearst Tower)….
방문지는 흔한 뉴욕 관광 가이드 목록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김 작가의 스토리텔링 기법은 확실히 기존 여행기와 다르다. 우선 ‘친숙함’으로 독자를 끌어들인 다음 ‘놀라움(반전)’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스티븐 킹(Stephen Edwin King)의 글쓰기 기법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온 세상 음식의 용광로’ 편에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한 장면을 슬쩍 꺼낸다. 여주인공 샐리가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해리 앞에서 가짜로 오르가슴을 흉내 내는 장면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금방 기억하는 장면이다.
독자가 이 장면에 낚였을 때, 김 작가는 영화 속 식당이 1888년에 문을 연 카츠델리(Katz’s Deli)이며 메뉴는 유대 전통 음식인 패스트라미 샌드위치라고 안내한다. 전 세계 모든 민족의 음식이 모여있는 곳이 뉴욕이라는 점을 익숙한 영화 장면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다.
김 작가의 또 다른 스토리텔링 기법은 무성영화 시절 변사 역할을 연상케 한다. 변사는 마이크를 잡고 관객을 영화 속으로 안내하면서 감정선과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자극하고 영화 자체에 푹 빠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디지털 시대에 빗대면 메타버스 속 가이드와 같다고 할까.
김 작가는 여행 포인트에 독자가 도착하면 해당 포인트와 관련된 영화, 소설, 역사, 음악 등 각종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독자의 눈과 귀를 확 사로잡는다. 이어 변사처럼 자신의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으면서 독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그의 순간 이동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때로는 스토리텔링 중간 중간에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지난 역사에 개입하려는 퍼포먼스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존 레넌(John Lennon)이 총탄에 목숨을 잃은 스트로베리 필즈 메모리얼 파크에서는 저격범 마크 채프먼(Mark David Chapman)의 범죄를 막기 위해 J.D.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일부 내용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채프먼은 범행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고 있었고, 범행 직후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까지 그 책을 읽었다. 김 작가는 이를 고려해 《호밀밭의 파수꾼》 속에 “달과 뉴욕 사이에 갇혀 고뇌하고 방황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사랑에 빠지는 거야(if you get caught between the Moon and New York City the best thing that you can do is fall in love)”라는 크리스토퍼 크로스(Christopher Cross)의 노래 가사를 추가하려고 시도한다. 즉, 소설 속 주인공 홀든이 세상에서 소외돼 고독을 느낄 때 분노 대신, 사랑에 빠지라고 외쳤다면 그 대목을 읽은 채프먼이 레넌을 저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한 것이다.
전통에 시대적 요구를 더하는 것이 창의력의 핵심
저널리즘 관점에서 《서방견문록》에서 가장 주목한 포인트는 컬럼비아대를 소개하는 장이다. 김 작가는 미국의 명문 대학 컬럼비아대 도입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워런 버핏(Warren Buffett),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등 이 대학 출신 명사 이름을 나열한 뒤 컬럼비아대의 두 영웅으로 피터 파커(Peter Parker)와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를 꼽는다.
우선 피터 파커는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컬럼비아대 물리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으로 실존 인물이 아니다. 김 작가는 뉴욕 마천루를 거미줄을 이용해 타고 다니는 피터 파커가 마블 영웅 중 가장 뉴욕문화 코드를 갖고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럼, 유명 대통령과 최고 부자를 제쳐두고 왜 퓰리처를 컬럼비아대의 영웅으로 꼽았을까? 더욱이 한국 대중은 퓰리처상을 통해 그 이름을 접했을 뿐이고 언론학 전공자는 그를 황색 저널리즘을 최초로 도입한 언론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김 작가는 퓰리처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헝가리계 유대인 이민자로 10대에 미국 땅에 발을 딛고, 문장과 논리로 먹고살아야 하는 신문 기자가 된 점을 주목한다. 나아가 그는 퓰리처가 미국의 폭발적인 성장기에 지식과 정보를 원하는 대중의 수요를 정확히 읽고 자본주의 파트너로서 저널리즘 산업을 개척한 점을 높이 산다.
아울러 김 작가는 퓰리처가 컬럼비아대에 200만 달러(약 24억 7,000만 원)를 기부해 세계 최초로 저널리즘 스쿨을 열고, 오늘날 신문방송학을 탄생시킨 주인공인 점을 상기시킨다. 21세기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동전의 뒷면을 이루고 있는 언론 산업이 퓰리처의 유산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김 작가의 화려한 언변에 이끌려 허스트타워 대목에 이르렀을 때, 그의 숨은 의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와 닿았다. 허스트타워는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 (Norman Foster)가 허스트 가의 의뢰를 받아 2011년에 완공한 빌딩이다. 허스트타워의 핵심은 전통과 혁신의 공존이자 융합이다. 포스터는 1920년대에 건립된 6층 빌딩을 그대로 두고, 빌딩 위에 다시 빌딩을 올려 총 46층짜리 빌딩을 만들었다.
김 작가는 독자를 허스트타워에서 순식간에 로마 시청사로 데려간다. 시청사의 뿌리는 BC 78년에 건축된 고대 로마의 공식문서 보관소인 타불라리움(Tabularium)이다.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사이 타불라리움 기반 위에 세나토리오 궁전(Palazzo Senatorio)이 세워졌고, 이어 1870년부터 로마시가 세나토리오 궁전을 시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 작가는 이처럼 전통 위에 시대적 요구를 더하는 것이 창의력의 핵심이고 나아가 서양 문명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는 그런 문명에서 배우고 자란 노먼 포스터가 6층짜리 허스트타워를 보자마자 로마 문명의 창의력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이처럼 서방 문명의 본질을 꿰뚫을 때 비로소 한국 문명이 처한 가능성과 한계를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얻을 수 있다. 김 작가는 이런 사례를 통해 K-팝, K-드라마 등 K-트렌드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격상시킬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것이라고 본다.
김 작가는 뉴욕에 이어 런던, 파리, 로마, 아테네 순으로 견문록을 써 내려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음 작품이 자못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