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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관련된 위기 담론은 이미 식상할 정도로 오래됐다. 언론이 위기에 처한 이유도 다양하고, 위기에 처한 언론의 양상도 다채롭다. 그렇지만 언론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흔하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 흔해지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한다. 언론이 위기에 처해 있건 아니건, 실제로 고사되는 언론이 있건 없건, 어쨌든 언론은 계속된다고. 그래서 나도 말한다. ‘오블라디, 오블라다’의 가사처럼, 그들의 삶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계속될 거라고. 물론 비틀스 노래 속에서 ‘계속되는 삶’은 평범한 이들의 나른한 행복에 가깝다면, 우리 현실 속에서 계속되는 언론과 우리의 삶이란 서로를 포기하고 무시함으로써 얻어지는 평온함에 기울고 있는 듯하지만 말이다.
이런 냉소적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언론들이 있다. 대학 언론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 신문사에 속한 학생 기자들로부터 종종 취재 요청을 받는 경우가 있다. 기성 언론과의 인터뷰에 전문가로서 성실히 응대해 봤지만 대부분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지곤 해서 이제는 대부분 사양하고 있는데, 대학 언론의 요청에 대해서만큼은 가능한 한 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 스스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고, 양질의 취재원을 확보하기 어려운 학생 기자들에게, (내가 그런 양질의 취재원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되도록 좋은 훈련의 기회와 긍정적인 취재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어서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결과는 기성 언론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나았다. 그들의 소박함과 충실함을 보며 얻는 보람도 컸다.
학보사는 권위 있는 글쓰기의 장
얼마 전에도 홍대신문 기자의 취재 요청에 응했었고, 그들의 궁금증에 답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인연 덕분에 이번 여름에 홍대신문에서 진행하는 하계 기자 연수 과정에 가서 대학 언론으로서 준수해야 할 ‘직무적 기준’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새삼 여러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나 스스로도 다시 고민해보는 시간이 됐다. 내친김에 대학 언론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간의 네트워킹(?)에 큰 역할을 해줬고, 나로 하여금 기꺼이 그들의 영역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해준 홍대신문의 박치영 기자를 인터뷰했다.
“대학 신문 기자가 되면, 평소 좋아하던 글쓰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널리즘에 대한 관심보다는 학보사가 대학 내 가장 권위 있는 ‘글쓰기의 장’이라는 판단 하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2022년 신입 기자 모집에서는 1학년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저처럼 고학년이 되어 (글쓰기에 대한 관심으로) 신문사에 지원한 경우와 다른 양상을 보이더군요. 기자 직무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사회정의 문제에 높은 집중도를 보이는 학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박치영 기자는 대개 취업 등을 목적으로 다른 곳에 집중하게 마련인 고학년으로서 학보사에 지원했는데, 언론에 대한 관심이나 언론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글쓰기를 잘 해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에 반해 다른 기자들의 경우는 저학년 때, 사회정의 차원의 이슈와 활동에 집중하면서, 언론과 기자 직무에 대한 관심을 품고 학보사에 지원하는 듯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새삼 흥미로운 요소가 있었다. 아직도 사회정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대학생들이 있다는 점과, 대학 언론이 여전히 ‘권위 있는 글쓰기의 장’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묶자면, 사회정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학생들은 그래도 언론을 유효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언론이란 무엇보다 권위 있는 글쓰기가 가능한 곳이라 생각한다는 것. 지나치게 관습적인 표현이지만, 실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자 연수 장소에서 만난 학생 기자들 역시 (미디어를 통해 흔히 재현되는, 그리고 강의실에서 마주치곤 하는 대학생들에 비해) 당대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이를 정의롭게 해결하는 방안을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들어온 학보사는 이런 학생 기자들의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켜주고 있기는 할까?
“종합적으로 보자면, 홍익대 학보인 홍대신문이 그러한 학생 기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홍대신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각 대학 신문사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당국과 대학 신문 사이에 맺어진 특수한 관계 때문이겠죠. 일례로 홍대신문의 경우 기사 소재 선정에서 행정실 측이 데스크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이로부터 종종 간섭이 발생합니다. 물론 우리 학보사와 행정실 모두 양측의 입장을 고려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고, 지속가능한 모델을 수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긴 해서, 꾸준히 지켜봐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학 언론의 구조적 한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행정실을 ‘데스크’라고 지칭하는 박치영 기자의 발언은 내심 충격적이었다. 물론 예상되지 않는 바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의 현실적 제약도 인정할만했다. 규범적으로 보자면, 기자이자 학생인 이들을 대상으로, 언론이자 교육을 동시에 구현해야 하니까. 또 실천적으로 보자면 운영비와 시설을 제공하는 학교 측이 취재와 검증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대학 언론의 구조적 한계란 게 있으니까. 게다가 홍대신문이 무조건 종속적인 지위에 놓여 있는 것만도 아니어서 딱히 의외라거나 충격이라고까지 볼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언론일진대,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의 그 공세성은 아니라 해도, 뭔가 학보사 기자로서의 결기 같은 것이 덜 느껴지는 측면은 분명히 있었다.
“대학 신문을 ‘학내’ 언론으로만 규정하는 학교 측 ‘일부’의 입장에 따르면, 학교 당국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이나 의견이 학교 신문에 게재되는 것과 관련된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홍대신문의 경우, 학교 노동자 시위 문제 등을 다루는 일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의 소모적 논쟁이 왕왕 발생하기도 했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희는 취재부 역량을 강화해 기자들의 교섭력과 실행력을 키워나가는 것에 집중했고, 방학 중에 학생 기자들의 기초 훈련 과정을 보완하는 등 다양하게 시도해왔습니다.”
아주 격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을 법한 (혹은 있어야만 하는) 갈등이 실제로 없지 않았는데, 학생 기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자로서의 역량’을 강화하는 쪽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투쟁적 운동의 방식보다는 상대를 좀 더 실력 있게 설득하는 방향에서 해답을 찾았던 것.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 놓인 지금 세대다운 접근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보사 기자들은 이른바 ‘도제식 교육’, 즉 선배 기자가 후배 기자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방식으로 교육과 인수인계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대체로 체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효과적인 OJT(On the Job Training: 직장 내 직무 훈련)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학보사마다 인수인계 절차를 기술해놓은 지침이 있긴 하나 갱신이 잘 안 돼서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데 홍대신문 역시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하겠죠. 그래서 최근에는 취재부 전체의 역량 수준을 파악해서 이들이 저널리스트로서의 소양을 강화할 수 있도록 취재부 전체 교육을 기획한 바 있습니다. 기존의 관습적 훈련을 벗어나 현재의 기자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기획해서, 즉각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교섭력과 실행력을 갖출 수 있도록, 목적적합적인 훈련과 노하우 전수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의미한 ‘청년 언론’이 되기 위해
OJT 같은 용어라든가 목적적합적 훈련 등 남다른 표현을 쓴다 싶었더니, 박치영 기자의 전공은 마케팅 쪽이었다. 내가 만난 홍대신문 기자들 역시 이른바 언론 유관 전공을 토대로 언론 유관 직종에 종사할 목적에서 학보사에 들어온 것만은 아니었다. 홍익대에는 언론 관련 학과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학보사 지원자들의 배경이 다양한 장점도 있으나, 저널리스트로서의 훈련을 뒷받침해줄 이론적, 실무적 자원이 부족해서 아쉽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박치영 기자 본인이나 다른 학생 기자들 역시, 흔히 언론 관련 전공을 배경으로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일반적인 학보사 기자들과는 조금 다른 목적과 전망을 갖고 있을까?
“신문사 기자로서 수행해본, 기사 기획, 자료 조사, 원고 작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비단 신문사라는 특수 업종에 국한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강화해 향후 선택될 진로에 필요한 기초 역량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홍대신문을 거친 선배 기자들이 졸업 후 신문, 방송 등의 직접 연관된 업종에 진출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아요. 저 역시 신문이나 방송으로 국한하지 않고, 스토리텔링 콘텐츠가 생산되는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고 싶습니다. 보도 기획서를 작성하고, 다양한 취재원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경험이 제 개인 역량 강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이고도 바람직한 생각이었다. 학보사 기자라고 해서 반드시 기성 언론사 기자를 지향해야 하고 그곳에 입사해야 비로소 성공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언론과 연관된 업종과 분야는 과거보다 훨씬 더 다양해졌고, 언론 관련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분야에서의 기초 역량을 키우는 것도 가능하다. 언론 관련 고등교육과 직업교육을 통해 잘 훈련된 고도의 ‘직업적 언론인’을 육성해낼 필요도 있지만, 다양한 수준의 언론 경험과 학습이 기타의 다채로운 영역에서 고급 역량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길을 틔워주는 것도 중요하다. 언론은, 그리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지식은 그 자체로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분과 지식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교양이자 기초 역량이 돼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언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언론이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체적인 경험을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신문의 경우 전방위적으로 소재를 다루고 그에 따라 특정 주제를 선정해서 다양한 독자층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반면, 대학 신문은 독자층이 학내 구성원, 그중에서도 일부 학생들과 교직원들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재 범위를 학교에 연관된 것으로 제한하게 되는 경향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 대학의 학보사들이 참신한 시각의 기사를 통해 그 범위를 유의미하게 확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홍대신문 역시 본교 교직원과 학생뿐 아니라, 마포구민,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 시민의 이야기를 포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 기능을 ‘학내’ 언론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청년 언론’으로 발돋움 하여 하나의 ‘기성 언론’으로 자리 잡기 위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대단히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대답이었다. 현실의 대학 언론이 유명무실한 ‘명목적 기구’ 정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겠거니 했던 내 짐작과는 다소 달랐다. 실제로, 내가 만나 본 홍대신문 기자들은 그저 명목적으로만 학보사를 운영하고자 하는 대학 당국, 그리고 특히 박치영 기자의 말대로라면, 이들이 “정치적 중립에 대한 요구”를 명분으로 “검토를 가장한 검열”을 행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이런 유무형의 압력을 극복할, 그리고 좀 더 유의미한 청년 언론이 되기 위한 이론적 무기와 실천적 대안을 강하게 열망하는 분위기였다.
“학생들이 유의미한 소재를 선정해 취재하고자 할 때 대학은, 비록 원론적인 이야기겠지만, ‘격려’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들의 역량이 미진하다는 염려(혹은 핑계)로 기획 자체를 무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사회에 전한다는 측면에서, 필요하다면 기획의 현실성을 보완해주는 선에서, 좀 더 원활하게 취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사회적으로 견해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는 소재나 담론을 대학 신문에서 다루게 되면, 오히려 우리 사회의 경직된 담론을 청년의 시각에서 완화시키고 일종의 갈등 해결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다른 한편, 신문사 내부의 자성도 반드시 필요하죠. 영웅심리에 매몰돼 균형 잡힌 보도를 수행하지 못하는 기자들도 있기 때문에 기자들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점검하고 제고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돼야 합니다. 이 부분은 외부 전문가들을 초빙해 다양한 시각에서 진단받아 보는 과정을 통해 한층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저널리즘 실천의 장애물
박치영 기자의 개인적 색채일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지금 세대의 학생 기자들에게서는 전투적 급진성 같은 것은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뚜렷한 이념적 동기라든가, 강한 도덕주의 혹은 정의감, 또는 구세대에 대한 체계적 저항의식 등에 의해 이끌리기보다는, 명분과 실질을 고루 갖춘, 균형 감각과 함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대안’이 되고 싶다는 의지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들의 눈에 기성 언론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특정 언론의 정치색을 판별해내는 일이 시민사회에서는 자주 있겠지만, 대학 언론에서는 그에 관련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는 분위기입니다. 특정 이슈를 다루는 기성 언론의 행태를 두고 (너무 정치적으로 갈리는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불필요한 갈등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다 보니, 기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의견을 교류하는 데는 위축되어 있는 편입니다. 아마도 대학 언론의 기자들이 현실 언론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주변의 일반 학생들에 비해 덜 과격하고 덜 거칠 것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언론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 그리고 그와 비슷하거나 다른 대학생들의 시선은 매우 정치적이고, 거칠고, 과격하고, 갈등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반해, 정작 대학 언론에 속한 학생 기자들은 기성 언론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평가하길 꺼리고 그에 관련된 언급을 하는 것에서, 심지어 자신들 사이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워한다는 이야기이다. 스스로 언론 행위를 하는 주체이기에 일종의 내부자적 시선을 갖게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언론 행위를 수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너무 ‘진지하게’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갈등의 대상이 되거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심리로도 받아들여진다. 어떻든 간에, 내가 만난 이들은 의외로 매우 조심스러웠고, 갈등의 중심에 놓이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온라인과 미디어를 통해 발화되는 날 선 이야기들이 서로 워낙 세게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대면과 실제의 영역에서는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그래도, 바람직한 언론과 언론인 상을 갖고 있을 텐데, 그건 무얼지 궁금해졌다.
“(만약 제가 언론인이 된다면) 뉴스도 팩트를 한 번 가공한 결과물임을 잊지 않는 언론인이 되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영화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사실 → 뉴스 → 다큐멘터리 → 영화로 이어지는 서사의 단계에 대해 배운 바 있습니다. 뉴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관점이 들어간 ‘이야기’임에 분명합니다. 나아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뉴스를 볼 때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뉴스는 팩트가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에게 각인하는 한편, 대중에게도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싶습니다. 대중은 ‘완벽한 사실’을 원합니다. 더 정확히는, 우리 사회 기저에 작동하고 있는 공명정대한 ‘절대선’에 대한 판타지가 이와 같은 수요를 견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저널리즘이 ‘정답을 요하지 않는 사회과학’의 영역 안에 있는 거라면, 뉴스 역시 (완벽한 사실이 아닌) ‘완벽에 가까운’ 뉴스로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시민사회의 인식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저널리즘에 대한 왜곡된 인식(혹은 기대)이 저널리즘의 실천에 큰 장애물로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령대의 학생 기자에게는 그래도 무언가 ‘무모한 정의감’이나 ‘편협하지만 열정적인’ 지향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던 나로서는 자못 머쓱해질 정도로 합리적이고 완숙한 시각이었다. 뉴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절대선과 완벽한 사실을 저널리즘에 기대하는 건 오히려 실제의 저널리즘을 어렵게 만든다. 언론인들도 솔직하고 겸허해야 하고, 시민들도 현실적인 기대를 품는 게 옳다. 구구절절, 언론학자로서의 내가 주장해온 바이기도 하다. 이렇게 ‘완숙한 학생 기자’라는 일종의 형용모순을 사용하게 하는 박치영이라는 한 인간이 학보사 기자로서 얻은 의미는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물었다.
“보통의 대학생으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울 대학 내외의 크고 작은 이슈를 제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저는 기자 일이 제법 마음에 들었고, 아주 오래간 뜻깊은 경험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냥, 글쓰기가 좋아서’ 신문사에 들어온 제가 처음 신문사에 적응하려 노력했던 단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명확한 소신, 타협 없는 자기주장, 그럴듯한 동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제가 신문사에서 경험한 것은 기자로서의 직(職)이었겠지만, 결국 현재 가슴에 남은 것은 기자의 업(業)이라고 생각합니다. ‘업’은 누구나 저마다의 견해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봐요. 기자로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은 ‘기자 정신’은 삶의 동력원이 될 것 같습니다. 그간 경험했던 어려움은 잠시 묻고, 기분 좋은 추억에 빠지고자 합니다.”
아, 이런, 또 한 번의 완숙함이라니. 너무 깊고 매끈해서, 조금은 심술이 날 지경이었지만, 나 역시 기분 좋은 희망에 잠시 더 빠져 있고 싶었다. 이런 그가 언론인이 된다면, 적어도 그만큼은 아주 조금 더 한국 언론이 나아질 것 같고, 그가 만약 언론 ‘직’이 아니라 그에 연관된 ‘업’을 스스로 찾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성해 나가게 된다 해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듯했다. 그의 앞날에, 그리고 불안에 처한 많은 청년들의 앞길에도, 서광이 가득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런 그들을 단순히 위기에 처한 언론 산업의 ‘예비군’ 쯤으로 취급하기보다, 각자의 조심스러움과 열정을 품고 자신만의 완숙함을 추구해가는 인간 존재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성세대이자 기성 산업의 종사자인 우리 스스로에게 묻는다. 기성 언론과 언론인에 비해 결코 더 작지 않은 위기에 마주쳐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공동체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대학 언론과 그 구성원들에게 우리가 해주어야 할 것, 해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