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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언론계에서 ‘혁신’은 수없이 반복되는 화두다. 시대 흐름에 따라 거듭 시도됐지만 성공보다 실패가 잦다. 하지만 언론계는 멈추지 않는다. 언론은 왜 이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지, 끝없이 도전하고 고군분투하는 현업 기자의 이야기를 한국일보 H랩 사례를 통해 들어본다. 편집자 주
디지털-혁신 알레르기1)는 계절병처럼 찾아왔습니다. 디지털 부서들을 전전하며 변화의 선봉에 섰던 저에게 말이죠. ‘디지털’ 한마디가 지겨워 술자리에서 한탄했습니다. ‘이걸 계속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요. 새로운 시도, 고민은 당장 멈춰도 구멍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몇 년을 고생해도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같은 성과는 쉽사리 나오지 않습니다. 부서 선배들과 우스갯소리로 당장 오늘 전략부가 사라져도 회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조하는 이유입니다.
비관만 가득한 서문이지만, 이 글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무력감은 종종 찾아오겠지만, 고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신문사의 랩(lab) 조직에서 또다시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나름 1년의 성과도 찾았습니다. 정답 없는 망망대해에서 나만의 나침반을 찾아간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H랩 그리고 커리업, 터치유의 브랜드 성장기
한국일보에는 H랩이 있습니다. 2022년 연말 신설된 신생 조직으로, 회사의 디지털 전략에 부합하는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기사를 생산하는 부서지만, 텍스트 위주의 시도를 넘어서기 위해 뉴스룸 외곽 전략부 아래 랩을 두었습니다.
발족과 함께 커리어를 주제로 하는 ‘커리업’, 마음 돌봄·웰니스 이야기를 다루는 ‘터치유’를 담당하던 박지윤·손성원 기자가 찾아왔습니다. 두 취재 기자와 전략부의 기자들은 함께 랩의 1년 목표와 일정을 세웠고, 리브랜딩을 거쳐 지난해 4월 뉴스레터와 콘텐츠 발행을 재개하는 것으로 시작을 알렸습니다.
H랩의 지난 1년의 여정은 커리업, 터치유를 뉴스레터라는 포맷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로 키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커리업과 터치유만의 독자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팬덤과 구독자를 확보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로그인 전환을 실험하자는 방향을 세웠습니다. 마침 뉴욕타임스의 사례(푸드·퍼즐 게임)를 통해 연성 뉴스의 가능성이 재조명되던 때였습니다.
한계는 있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로 바로 로그인월을 적용할 수 없었고, 일단 뉴스레터 구독자라는 바구니 안에 독자들을 담아보기로 했습니다. 충성도 높은 뉴스레터 구독자 확보를 H랩의 첫 번째 목표로 세웠습니다.
시작에 앞서 그동안 공급하기에 급급해 들여다보지 못했던 콘텐츠의 진정한 사용자를 가려보기도 했습니다. 타사의 뉴스레터나 연재 코너 대신 같은 산업의 스타트업들을 조사해 경쟁사로 두고 경쟁사에 비해 커리업과 터치유만이 갖는 ‘유일한 가치(Unique Value Proposition)’가 무엇인지, 사용자는 누구인지를 찾아보는 린캔바스(Lean Canvas) 분석을 시행했습니다. 그렇게 설정한 타깃과 유일한 가치를 콘텐츠에 녹여내게 됩니다.
포맷의 사용률 분석으로 콘텐츠 최적의 포맷을 찾아라!
H랩에는 구독자 확보라는 첫 번째 목표 외에 한 가지 목표가 더 있었습니다. 포맷의 사용률을 실험해 최적의 포맷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실험의 수단으로 커리업은 비주얼 툴을, 터치유는 오디오 서비스를 선택했습니다.
먼저, 커리업은 <맨땅브레이커>라는 커리어계 퍼스트 펭귄(선구자)들의 서사를 다루는 시리즈 기사를 웹진 형태로 선보이고 기사 안에 △360도 이미지 △확대-축소 뷰어 △북 뷰어와 같은 비주얼 툴을 담았습니다.
커리업 기사에 들어가는 비주얼 툴의 경우 복잡한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기사 아이템에서도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는 단순한 툴을 검토했습니다. 그 예로, 사진 안에 숨겨진 중요한 요소들을 사용자가 확대해 가며 탐색하는 ‘확대-축소 뷰어’의 경우 고화질 사진만 있다면 어떤 주제의 기사에서든 활용이 가능합니다.
터치유는 △트라우마 △중독 △불면과 같은 현대인의 정신질환을 기자의 음성을 따라가며 해결하는 오디오 서비스 <에코라디오>를 기획해 연재했습니다. <에코라디오>에서는 기자의 음성을 듣고 스크립트를 읽는 ‘듣다’ 모드와 시각물을 함께 제공받는 ‘보다’ 두 가지 모드를 준비했습니다. 보다 모드에서는 손성원 기자가 직접 호흡법을 구사하거나 명상 자세를 취하는 영상이 나왔는데, 기사답진 않더라도 서비스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이후에는 구글 태그매니저(GTM)를 통해 사용자 데이터를 쌓았습니다. 데이터를 통해 어떤 비주얼 툴의 사용률이 높았고 낮았는지, 오디오 서비스의 UI(User Interface)와 클릭률, 어떤 주제와 만났을 때 콘텐츠의 생애주기가 길었는지 등을 살펴봤지요.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 이 데이터를 토대로 부족한 점을 개선했습니다. <에코라디오>의 경우 시리즈로 소비가 가능한 콘텐츠임에도 콘텐츠 간 순환율이 높지 않았습니다. 이를 높이기 위해 오디오 플레이어의 UI를 차용한 ‘트랙 리스트’를 추가했습니다. 사용자가 CD의 여러 트랙을 재생하듯이 트랙 리스트를 통해 1회부터 9회까지의 <에코라디오> 전 시리즈를 모든 <에코라디오> 페이지에서 재생할 수 있게 연동했습니다.
커리업의 경우 지나치게 스크롤이 긴 일명 ‘스압(스크롤 압박)’ 구조가 문제가 됐습니다. 아이템 성격상 롱폼이 불가피했기에 기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화면 곳곳에 네비게이터를 추가해 페이지 내부 이동성을 높였습니다. 화면 좌측 고정 네비게이터를 추가하고, 인트로에서는 비주얼 요소들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책갈피 기능을 제공했습니다. 비주얼 요소가 피로할 사용자들을 위한 읽기모드도 추가됐습니다.
‘콘텐츠’ 아닌 ‘포맷·서비스’를 겨냥한 이유
이처럼 상반기가 틀을 잡고 시리즈 연재를 안착시키는 기간이었다면, 하반기의 핵심 과제는 홈페이지 출시였습니다. 그동안 커리업과 터치유가 생산하는 △기사 △오디오 서비스 △셀프 인터뷰 키트 △뉴스레터 등의 콘텐츠들이 여러 공간에서 산발적으로 제공되고 있었고 이들을 한곳에 모아줄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홈페이지가 마련되면 장차 로그인월, 마이페이지 기능 강화 등 다양한 서비스적인 실험도 가능해집니다.
홈페이지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상반기부터 지속해서 나왔지만 출시는 하반기를 지나 연말이 다돼서야 가능했습니다. 콘텐츠가 쌓여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드민(Admin: 운영자, 관리자 페이지) 구축’에 상당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홈페이지 껍데기 화면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CMS에 관리자 기능을 함께 마련해 기자들이 홈페이지를 직접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를 추가하고, 제목도 달고, 대표 이미지를 바꾸는 경험을 통해 브랜드 운영의 경험과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요.
완성된 관리자 화면에서는 이제 새로운 브랜드를 신규 등록할 수 있습니다. 커리업과 터치유 그 다음을 고려한 설계입니다. 어드민을 구축하느라 개발 부서가 무척 고생했습니다. 개발 당시에는 ‘꼭 관리자 기능까지 만들어야 할까’ 고민도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압니다. 덕분에 H랩은 지속성과 확장성을 얻었습니다.
H랩의 활시위가 ‘콘텐츠’가 아닌 ‘포맷·서비스’를 겨냥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콘텐츠가 중심인 실험은 일회성에 그칩니다. 좋은 기사를 내보내고 기사가 흥행하더라도 그 이후에 자산이 남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느꼈던 공허감은 대개 실험 이후에 찾아온 ‘그래서 무엇이 남았느냐’는 질문에서 비롯됐습니다. H랩은 그 질문에 답해야 했고, 나름의 답을 찾았습니다.
2023년 4월~5월부터 지금까지 커리업은 <맨땅브레이커> 시리즈를, 터치유는 <에코라디오>와 기존 기사 코너들을 연재했습니다. 콘텐츠는 포털에 전부 내보내지 않고 배타적으로 커리업과 터치유의 도메인에서만 제공했습니다. 콘텐츠와 서비스 곳곳에선 뉴스레터 구독을 유도했습니다. 기사 상단과 하단에서, 고정 배너로, 뉴스레터 곳곳에서 오로지 ‘구독’을 외쳤습니다. 8개월이 지난 지금 원했던 목표 이상(500%)의 뉴스레터 구독자를 확보했습니다. GTM 데이터를 통해 실험의 결과도 얻었습니다.
‘PV(Page View)가 몇이 나왔다’는 목표와 무관한 잣대 혹은 ‘새로운 걸 꾸준히 내놓았으니 됐다’와 같은 인상평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기간 쌓은 구독자들과 데이터는 H랩의 다음 시즌에도 이어질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좋은 아이템을 준비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유통할지 혹은 홍보할지는 정답을 모르겠습니다. 마케팅은 여전히 모두가 하지만, 언론사가 가장 못 하던 것이었습니다. SNS를 운영하는 것부터 책 협찬 이벤트 하나 하는데도 쉽지 않았습니다. 홍보 멘트를 무엇으로 뽑아야 할지, 어떤 유통채널에 홍보해야 잘 될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기자는 제네럴리스트니까, 적당한 감으로 흉내내면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부서졌습니다. 대신 언론사에도 마케팅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몸에 새겼습니다.
혁신은 한 사람이 한순간에 만들어낼 수 없다
뉴욕타임스 혁신보고서 등장 이래 10년, 지면은 그대로지만 디지털 업무는 늘어나면서 기자들의 노동강도는 더해졌습니다. 해외 매체에서 새로운 것을 내놓을 때마다 모두가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몰려갔지만 한국의 특수한 미디어 환경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위한 투자는 수익 모델이라는 관점에서 유지가 되기 어려웠습니다. 담당자가 퇴사하거나 출입처로 돌아가면 시도의 결과들이 유산이 되지 못하고 무(無)가 되기를 반복한 것이 현실입니다.
여전히 포털과 조회수 중심으로 기사가 소비되는 시장에서 양질의 기사가 정답이 되지 못한 좌절의 경험도 쌓였습니다. ‘디지털’만 하다가도 때때로 무력감에 빠지는데, 이중고에 쌓인 현장 기자들의 답답함이 터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력의 늪에서 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자기암시가 있습니다. ‘혁신은 한 사람이, 한순간에 만들어 낼 수 없다’. 언론사도 변해야 하지만, 뉴스를 소비하는 시장의 체질도 변해야 합니다. 더디게만 보이는 변화의 속도는 어쩌면 아직 완벽한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알고, 때를 기다리며 꾸준히 무언가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식사 자리, 특파원을 다녀온 모 부장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2, 3년 만에 회사에 돌아왔더니 현장이나 전략 부서에서는 이루어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아우성치더라고요. 그런데 전 참 많은 것이 좋아지고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시도해도 변한 게, 얻은 게 하나 없다’ 자조했지만, 그사이 우리는 작은 변화를 쌓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H랩의 2024년 모토도 ‘꾸준히’ 입니다. 커리업, 터치유의 기자들은 얼마 전 새로운 조직을 꾸리기 위해 뉴스룸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사람이 돌아간 그 자리는 커리업, 터치유 그다음, 새로운 버티컬을 키우는 둥지가 될 것입니다. 올해 하지 못한 로그인 월 전환도, 부족했던 마케팅 시도도 해보려 합니다.
‘지속성’이 중요합니다. 전략부에는 ‘디지털 프로덕트 지속성 플랜’이라는 이름의 문서가 있습니다. 문서에 적힌 여러 방안 중 하나는 보상 플랜입니다. 뉴스레터로 예를 들자면, 출입처와의 유사도, 발행 빈도 등을 감안해 뉴스레터를 쓰는 기자에게 수당을 지급합니다. 문서에는 기자가 더 이상 새로운 시도를 지속하거나 브랜드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지속을 위한 고민을 기자 혼자가 아닌 회사가 함께 한다는 메시지도 담았습니다. 새로운 시도가 기자의 가욋일이 아니라 혁신으로 가는 주춧돌이라 느낄 수 있도록요.
조회수가 기사를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당당한 근거도 필요합니다. 여전히 공들인 기사가 뉴스 소비 시장에서 외면받는 상황에서 ‘좋은 기사만 쓰면 된다’는 외침은 공허합니다. 기자들에게 △체류시간 △로그인 전환 기여도 △독자 활동성 등의 지표를 체계화해서 제공해야 합니다. 현장의 기자들에게 ‘당신의 기사가 조회수로 보면 이 정도여도, 이 지표들로 봤을 때 이런 성과와 기여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지금 여러 부서에서 선후배들이 쌓아가고 있는 작은 변화들입니다.
혁신이라는 거대한 단어 아래에 있다 보면 방향을 잃고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나침반을 만들어 봅니다. 오늘 나의 노동이 미래의 우리를 위한 한 걸음이라는 확신을 가져보면서요.
1) ‘혁신’ 혹은 ‘디지털’ 단어만 들어도 거부감에 소름이 돋다가 이윽고 무력감에 쓰러지는 이상 과민 반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