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87년 체제’로 지칭되는 현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1980년 5월 광주에 뿌려진 평범한 이들의 핏값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피는 선명하다. 이 땅에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자 했던 이들과 그 민주주의를 쏴 죽이고자 했던 이들을 가른다. 통합이나 화해라는 단어가 자칫 이 선을 흩뜨리는 일에 활용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피로 인해 지역이 갈라지거나 민주적 헌정 질서 내부의 정파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안에서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지역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지역이 갈리는 것인가? 민주 정파와 반민주 정파를 통합하는 새로운 헌정 질서를 만들자는 건가?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는 화해의 대상인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례에서 명징하게 확인됐듯, 역사부정론(denialism)은 통합이나 화해가 아니라 철저한 배제 혹은 정신 치료의 대상이다.
1980년 5월 당시 전남매일의 사진기자로서 수천 장의 사진을 통해 계엄군의 만행과 광주 시민이 겪어야 했던 참상을 낱낱이 기록한 나경택 기자를 만났다.

신문에 단 한 줄도 실리지 못한 기사
“광주 폭도들 때문에 1980년 6월로 미뤄져 이렇게 더울 때 강원도에서 소년 체전을 한다는 말을 당시에 듣고 제가 중요한 사진을 다 슬라이드로 만들어서 광주 시내 대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젊은이나 학생들, 광주 시민들도 차츰 관심이 없어지고 있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비록 전두환 신군부가 철저히 광주를 고립시키고 어떠한 진실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틀어막았던 탓이었겠지만, 1980년 5월 그 비극 이후로도 한동안, 광주는 ‘폭도들’의 도시였고, “전라도 새끼들 때문에” 공연히 불편함만 생겼다는 인식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역사는 집단 기억이다. 현장을 직접 체험한 자의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자들에게 전승되는 이미지에 가깝다. 따라서 그 기억은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억하고자 하는바, 즉 역사적 감수성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합된다. 그러기 위해선 기록이 필요하고, 기록을 남기고자 노력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
탈진실은 논쟁의 대상이 아닌 것을 논란거리로 만들어 그것이 마치 동등한 당사자들 사이의 진리 게임인 양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기자 나경택은 우리의 기억 속에 선연히 각인된 진실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시민의 머리 위로 곤봉을 내려치는 적십자 완장을 찬 군인 사진이다. 후일 이 사진이 공개되자 군 당국은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 완장의 형체가 흐릿하며 그런 완장을 찬 군인은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하지만 나경택 기자는 다른 사진을 들이밀었다. 현장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 기록을 보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일 일요일 (…) 미사를 하고 있는데 지금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뛰쳐나와 보니까 가스 냄새 때문에 취재가 거의 안 돼요.(…)공수부대가 사람을 두드려 패고 그랬지만 취재도 거의 못 하고. 19일은 월요일이니까 신문 제작을 하려고 출근을 했습니다. 출근하자마자 이 전일빌딩으로 와서, 우리 회사에서는 금남로 길이 잘 안 보이거든요, 찍은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이 (…) 크로스 완장 (…) 이 잘 안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조금 보이긴 하죠. 그런데 비슷한 시점에 찍힌 또 다른 사진을 보면 완장과 십자가가 보여요. 이 군인이거든요.”
자칫하면 사진을 찍다가 계엄군 총에 맞을 수도 있었고, 실제로 나중에는 당시 찍은 사진을 찾으러 계엄 당국이 나경택 기자의 집을 수색하러 찾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먼저 누구보다 더 철저히 당시를 기록했던 그가 있었는데, 왜 우리에게는 독일 공영방송의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니 NHK 비디오니 하는 외신의 기록만 머리에 남았을까. 우리 언론이 기록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상황 탓이다.
“사진을 찍고 바로 신문 제작하러 갔는데 한 줄도 만들지 못해서…그 다음에 오후가 되니 서울에서 기자들이 막 오더만요. 사진 좀 달라고 해서 쓸 줄 알고 전부 줬죠. 그런데 중앙지도 마찬가지. 계엄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한 줄도 쓸 수가 없었어요. 우리 젊은 전남매일 기자들이 검열 필요 없이 전부 우리가 보는 대로 기사도, 사진도 쓰자고 해서 신문을 제작을 시도했었습니다. 그런데 간부들이 와서 다 엎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활자를 조판하고 사진을 동판에 찍어 신문을 만들던 시절이었는데, 간부들이 엎어버린 거죠.”
이들이 검열을 거부하고 제작하고자 했던 5월 20일 1면 머리기사는 “18·19일 이틀 동안 계엄군에 학생·시민 피투성이 – 민주화 부르짖다 숨지고·중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어느 언론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었던, 당시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다. 그렇게 젊은 기자들은 진실을 위해 몸을 던졌는데, 간부들은 그걸 몸으로 막았다. 결국 전남매일 기자들은 1980년 5월 20일에 그 유명한 집단 사직서를 쓴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무등산은 알고 있다
“당시 화순에 전남매일 주재 기자가 인쇄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이 기사랑 사진을 인쇄를 좀 해달라, 그러면 우리가 광주에 뿌리겠다고 했는데 그 주재 기자도 너무 무섭다고 해서 못 만들었죠. 그래서 전남매일 기자들이 집단 사표를 썼죠. (…) 계엄 당국에서 간부들에게 기자들을 데리고 신문 제작을 하라고 했었어요. 그렇지만 윤전기를 돌렸던 분들도 친척 집으로 피신을 해서 찾을 수가 없었죠. (…) 신문이 휴간한 다음에 6월 2일부터 신문 제작을 했었거든요. (…) 1면 톱에 무등산 사진을 넣고 김준태 시인 글을 전부 다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계엄 당국이 그 시를 다 도려낸 거예요. '가슴을 도려내고' 그런 부분을 도려낸 거죠. (…) ‘무등산은 알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무등산 사진을 냈습니다.”
사실이 탄압을 당하면 기록은 건조한 기사가 아니라 시와 같은 예술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당시 전남매일 1면에는 나경택 기자가 찍은 금남로의 참혹한 현실이 아니라 그걸 묵묵히 굽어볼 수밖에 없었던 무등산의 사진이 올라갔다. 그 아래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제하로 김준태 시인의 글이 실렸다. 그런 비유법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검열 당국은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글귀조차 들어냈고, 시구(詩句)의 대부분에 가위표를 쳤다.
“5월 16일 전에만 해도 시위를 앞에서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찰이 학생들 채증을 (했고, 그런) 다음에 어디 시위 현장에서 잡히면 사진 대조를 해서 바로 구속하곤 했었거든요. (그래서 시위대가 저희 기자들이랑 채증경찰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놓고 시위 현장 촬영을 거부했습니다. 게다가) 19일 신문에 한 줄을 못 썼으니까 시민들이 아주 혼을 냅니다. 기사 한 줄도 못쓰고 너희들이 기자냐? 그렇게 코가 작은 기자들(즉, 한국 기자들)은 환영받지 못했죠. 코가 큰 외신 기자들은 20일 이후에 들어와 환영받으며 취재하고 다니는데 저희는 가깝게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건물에 숨어서 찍었죠. 만약 그렇게 숨어서 찍는데 그때도 공수부대가 '저 자식들 어떤 놈이야?' 하면 우리는 죽게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령껏 기록했죠.”
계엄군으로부터는 사살 위협을 받고, 시민으로부터는 배척을 받았던 현장의 기자들. 그렇게 끼인 존재로서의 나경택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건물에 숨어 촬영하고 늘 옷 안에 카메라를 숨기고 다니면서 광주의 구석구석을 새겼다. 대체 무슨 힘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던 걸까?
“광주 시민이기 때문에 그랬죠. 광주 역사는 내 손으로 밝혀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사진을 전부 찍어 항상 호주머니에 찍은 필름을 넣어두었다가, 애기 엄마도 모르는 곳에 숨겨뒀습니다. 뺏기면 안 되니까. (…) 그리고 저녁 내내 현상 작업을 했습니다. (…) 당시만 해도 흑백 필름은 (…) 흐르는 물에 수세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저녁 내내. 그런데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필름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죠. 당시에 중요한 사진, 그러니까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이 담긴 건 우리 집 천장에 숨겨놓고 그랬죠.
6월 2일에 계엄군 소령이 우리 집에 와서 사진을 보여주며 ‘네가 찍은 거 아니냐’면서 사진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필름을 줬어요. 그런데 필름을 보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사진을 뽑아 달라’고 해서 내가 전부 다 빼줬습니다. 그리고 이틀 지나니까 밤 10시쯤 (…) 군용 지프가 우리 아파트로 들어온 거예요. (…) 자기가 505보안대 중령 (…) 이라면서 저한테 ‘그 사진을 전부 다 빼줄 수 없냐’고 묻더군요.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내일 아침에 동이 트면 헬기로 가서 전두환 장군에게 (…) 광주 실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하려고 하니까 다 빼달라.’ 그런데 제가 그 말을 듣겠습니까? 그 사진을 찾기 위해 그런 거로 생각해서 (모르는 곳에 미리) 놔뒀죠. “
나경택 기자는 당시 한국 기자들은 계엄군으로부터는 사살 위협을 받고, 시민으로부터는 배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희생 덕분에 민주주의가 찾아왔다
그 우직함 덕분에, 그리고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사진을 남겨준 덕분에 우리에게도 민주주의가 찾아왔다. 나경택 기자가 숨겨뒀던 사진은 광주의 희생을 역사로 만드는 밑바탕이 됐고, 이를 포함한 5·18 기록물은 ‘진실성’과 ‘보편적 의의’를 인정받아 2011년에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필름을 현상해서 다 갖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계엄군에게 필름을 뺏길까봐 하룻밤에 다 사진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진 양이 (손을 벌리며) 이렇게 됩니다. 그것을 집에 놔뒀는데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래서 책보에 싸서 성당에 같이 다니는 친구한테 너희 집 장독대에 숨겨달라고 했는데 (…) ’88년에 국회 광주 청문회 때 그 친구가 당시 노무현 국회의원, 이해찬 등에게 줘서 그 사진을 통해 자백을 많이 받아냈습니다.“
일전에 한국 언론의 독특한 관행인 따옴표 저널리즘, 특히 제목에 따옴표를 써서 진실을 비트는 악습을 비판하자, 어떤 기자가 ‘기자는 사초를 남기는 사관’이라면서 그런 관섭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초를 남기는 사관의 ‘심정’과 ‘철학’으로 철저한 취재를 하고 빈틈없는 기록을 남기는 거라면 모르겠다. 그러나 게으르고 무책임한 따옴표 저널리즘은 집단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만드는 ‘기록’이 아니라 그 기억을 굴절시키고 탈진실을 조장하는 일종의 ‘창작물’이다. 기자 나경택은 사진이라는 ‘증거’의 매체를 통해 광주를 기록했고, 그를 통해 진실에 기반을 둔 우리 민주주의의 집단 기억을 형성해줬다.
”기사도 진실하게 보도를 해야겠지만 사진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이게 바로 전일빌딩에 붙은 대자보를 시민들이 보고 있는 겁니다. 이 사진이 바로 도심 빌딩 앞에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을 일부 사람들이 옮기고 있는 것이죠. (…) 집단 발포가 이뤄진 다음 유일한 사진은 이 사진 한 장입니다. 그때 발포가 이뤄져서 금남로에 쓰러진 사람들이 있었으면, 제가 도청 안으로 피신할 게 아니라 그 사진을 찍었다면 좋았을걸. 참 지금 와도 후회스럽고 그때 왜 대담하지 못했을까 저 자신을 탓해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나경택 기자는 ‘후회’와 ‘자책’을 고백하며 잠시 말을 끊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목숨을 걸고 사진을 찍어 보관한 그 기록이 외신 기자들에게 넘어가고, 화보가 되고, 사진전이 되고, 청문회의 증거가 됐는데도, 그는 아직도 자신의 ‘대담하지 못했음’을 탓했다. 이처럼 1980년 5월 당시 우리 언론에도 참된 기자들이 있었고, 부끄러움을 말하는 양심이 살아 있다. 솔직히, 당시 신문 지면과 방송 전파를 통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을 두고 시쳇말로 기레기라 손가락질하는 것은 과할 수 있다. 탄압하는 권력과 저항하는 기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야합하는 언론인들이 있었을 따름이다.
”(전남매일 기자들이 제작 거부를 하고 집단 사직서를 낸) 20일 (이후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제가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제가 제 손으로 광주를 기록해서 진실을 밝히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실은 제가 결혼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큰딸이 아장아장 걸어 다녔습니다. 저도 집에 들어가고 싶었죠. 그렇지만 남아서 기록을 했습니다. 이런 사진이 그래서 나오게 된 거죠. (…) 젊은 기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땝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취재를 했는데, 그런데 한 줄도 못 쓰니까 '사직을 하자'고 한 거죠. 그런데 전 기록만은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기록을 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큰딸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의 나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적극적 행동은 고사하고, 절필이나 침묵 정도의 소극적 저항조차도 지구를 들어 올리는 일만큼이나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문제는 ‘꺼삐딴 리’ 저널리스트의 파렴치함이다. 강요된 침묵을 넘어 적극적으로 야합했던 언론과 언론인, 그들은 시민과 동료의 핏값으로 자기 배를 불렸다. 그런 그들이 마치 현재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얻은 양 자화자찬을 하더니, 광주의 희생을 모욕하는 반민주적 정치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40년 전에 그어졌던 선명한 피의 진실을 흐리는 탈진실의 수사법을 사용한다.
광주의 저항과 희생은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의 토대이고, 아직도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전범이다. 광주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에 반평생을 넘게 매진해온 노년의 나경택 기자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설핏 머쓱함이 실린 웃음과 함께 그는 답했다,
“아, 아닙니다. 부족한 점이 많아요.”
치장된 겸손함이 아니라 질박한 진심이 담긴 이 말, 그 숱한 ‘꺼삐딴 리’ 저널리스트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