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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포럼] 북 리뷰: 《혐오와 수치심》
미디어포럼 | 등록일 : 2020-06-01

 


 

《혐오와 수치심》 표지 ©민음사

 

우리 사회에서 혐오는 어느덧 일상이 돼버렸다. 혐오의 종류와 강도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따라 그 파급력과 대상을 손쉽게 바꿔가며 더 일상적으로 자리 잡았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급식충’ 등 혐오의 대상도 그 이유도 다채롭게 변화하며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과 대상들을 혐오의 구성물로 만든다. 2016년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는 20~50대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일상의 혐오 경험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사람들은 주로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성별, 출신 지역, 성적 기호, 인종과 민족 등에 대한 혐오 표현을 접했다고 응답했다. 설문조사 결과가 가리키는 것은 혐오의 ‘일상화’다. 여성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은 오랜 세월 여러 형태로 지속된 혐오의 양상이지만, 최근 우리 사회의 혐오는 이런 전통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일상적 감정 상태의 하나가 아닐까 우려될 만큼 광범위하고 빈번하다. 이렇듯 혐오가 우리 사회를 점령해가는 이유는 혐오가 쉽사리 확산되고 전염되는 감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를 더욱 약한 자로 만드는 혐오 

 

혐오를 숙고할 때 꼭 읽어봐야 하는 《혐오와 수치심》은 하버드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시카고대 철학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책이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누스바움은 그간 현실 정치적인 문제에도 적극적인 견해를 제시해왔다. 《역량의 창조》 같은 책에서는 인간의 행복에 주목하는 ‘역량이론’을 제시하며 '진정한 의미의 발전과 사회정의란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자유를 부여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혐오와 수치심》에서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을 분석하며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올바른 정치적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제시한다. 누스바움은 두 가지 차원의 혐오를 이야기한다. 첫째는 모든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혐오, 다시 말해 몸에서 배출되는 분비물, 노폐물에 대해 느끼는 혐오이다. 이것은 일종의 원시적인 두려움인데, 인간이 갖는 동물적인 면이 정신적 차원에서 오염된 상태라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혐오이다. 이런 혐오를 통해 위험한 대상을 멀리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누스바움은 혐오의 대상이 꼭 위험요소로 한정되진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독버섯은 매우 위험하지만 혐오스럽진 않은 반면, 바퀴벌레는 살균하면 먹을 수 있는 값싼 단백질원인데도 혐오의 대상이다. 

 

이렇게 원초적 동물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유발된 혐오, 즉 인간의 유한성에 근거한 혐오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확장돼 왔다. 누스바움은 혐오의 자연적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 후 이것이 사회적 혐오로 확장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여기에 두 번째 혐오가 있다. 그는 한 문화나 사회 속의 구성원들의 심리가 반영된 문화적 차원의 혐오를 ‘투사된 혐오’라고 부른다. 문화적으로 투사된 혐오는 부패, 냄새, 분비물 같은 역겨운 물질을 특정 부류에 투사하고, 그들을 종속시키는 전략으로 사용한다. 흔히 우리는 약한 무리를 향해 동물적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런 동물적 특성은 그들한테나 있지, 나는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문화적 혐오 현상에는 두 가지 전략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우리의 동물성을 부정하는 전략이고, 둘째는 그들을 분리해서 종속시키려는 전략이다. 전통적인 혐오의 대상이었던 흑인, 여성, 게이, 레즈비언을 동물적인 존재로 만들면서 인간이 갖는 동물성을 피하려는 전략이 그러한 예다. 

 

즉 혐오는 일종의 '사회 맥락적 개념'이라는 것인데, 그 중심에 비정상성이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회가 구성한 정상이라는 개념은 그것에 부합하는 인간을 이상적인 존재로 설정한다. 그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은 기준에서 모자라는 만큼 열등한 인간을 줄 지워 세울 수 있는 틀과 근거로 작용한다. 그렇게 혐오는 사회적 약자를 더욱 약한 자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혐오는 취약성과 불완전함을 외면하고자 그 동물성을 다른 인간에게 투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적 속성에 의존하는 존재 

 

혐오와 밀접하게 연결된 수치심은 혐오의 켤레 개념과도 같다. 수치심 역시 사회가 만들어낸 정상이라는 관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났을 때 수치심을 느끼곤 하는데, 이는 스스로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수치심은 완전한 상태, 완전한 통제를 향한 욕구에 기원하므로 타인에 대한 폄하와 공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상황이 되면 비난의 대상을 찾는다. 수치심이 타인에 대한 혐오로 이행하는 과정은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보면 혐오와 수치심은 우리가 ‘정상성’ 그리고 ‘완전성’이라고 부르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누스바움은 바로 이런 보편적인 우리의 심성과 시선이 지닌 위험성을 한번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혐오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동물성은 인간의 신체를 욕망과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인식한 서양 철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신체의 중요성을 받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누스바움은 철학적 입장의 근간으로 삼는다. 그는 우리의 신체성 즉 동물성을 회피하거나 폄하하는 대신, 그 동물성을 적극적으로 바라보면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도 ‘동물’이라는 점,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욕구를 지닌 유한한 몸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지닌 동물적인 몸은 모욕적이고 부끄러운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가지는 존엄성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누스바움은 인간이 여타 동물과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지닌 능력은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이 고수해온 ‘영혼과 이성’에만 의존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동물적 속성에 철저하게 의존하며 물질적 환경이 충분히 뒷받침될 때에만 발휘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시선이 머무는 곳 

 

전통 서양 철학은 인간이 이성과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고상한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데서 인간의 존엄과 존중의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이유를 다른 각도에서 찾는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불완전하고 취약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찾고 있다.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누구나 취약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한 각자가 지닌 역량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데서 사회정의를 찾았듯이, 품위 있는 사회란 이러한 인간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개인이 지닌 역량이 발현될 수 있도록 촉진적 환경을 제공하는 사회라 보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는 서양 철학의 전통적 영향 아래 논의된 정치 이론들에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스바움은 책에서 크게 두 가지 정치 이론적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하나는 자유로운 개인보다 전통적인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에 대한 비판이다.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와 그를 지탱하는 규범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는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해 개별적인 차이(특히 신체적인 측면)를 지닌 사람에게 사회적 낙인을 내릴 위험성이 있다. 다른 하나는 공리주의와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자유주의다. 공리주의적 자유주의는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진보를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개별성에 기초한 모든 개별적 존재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존중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자유주의는 시민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가정함으로써 장애 때문에 이른바 ‘정상적인’ 시민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우리 모두의 몸이 언젠가 퇴화하며, 누구나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장애를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자유주의 인간관을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정상성’이라는 관념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인간의 삶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한다. 

 

《혐오와 수치심》 속 누스바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자신도 언젠가 또는 언제든 취약해질 수 있으며, 사회 속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의 처지가 곧 나와 주변 사람들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게 된다. 흔히 저널리즘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우리 사회의 약자와 그들이 머무는 취약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즘의 주된 역할은 주류의 목소리를 크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목소리에 담긴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이나 사태의 실체적 진실 규명과는 다소 무관한 요소들이 기사로 등장하면서 생성되기 시작하는 혐오 재생산 과정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들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혐오의 이유와 근거를 찾아 들어가 그것이 근거 없음을 밝히고, 사회적 약자를 혐오의 방식으로 희생양 삼는 일을 고발하는 것이 저널리즘 윤리의 근본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갖는 기자들이 있다면 《혐오와 수치심》을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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