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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한 책 혹은 주장을 담은 강연 등을 통해 본인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한편 세상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로 선택하는 양식은 선언문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44~)는 선언문으로 자기 생각을 알린 선언의 사상가라 할 수 있다. 물론 정치적 선언문과는 달리 그의 선언문은 생물학, 철학, 테크놀로지의 전문적인 내용이 뒤범벅된 다소 난해한 것이라는 점에서 선언문이라는 제목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긴 하다. 《해러웨이 선언문(Manifestly Haraway)》은 해러웨이의 대표적인 저작물로 받아들여지는 ‘사이보그 선언’(1985)과 ‘반려종 선언’(2003), 그리고 그 배경과 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영문학자 캐리 울프(Cary Wolfe)와 2014년 진행한 인터뷰가 실려있는 모음집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 해러웨이의 선언문들은 발표 당시 이미 상당한 주목을 받았고, 논쟁을 만들어냈다. 두 선언문은 각기 다른 맥락에서 충분히 주목받을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두 선언문을 함께 읽으며 그의 사상이 변화해온 흔적과 각 선언이 발표되던 당시의 중요한 고민을 비교해 볼 수 있고, 이 선언들의 배경을 해러웨이 본인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여신보다 사이보그가 되고 싶었던 페미니스트
생물학을 연구한 학자이자, 각종 기술의 발달사와 최신 기술에 큰 관심이 있으며, 유전체 연구에 대해서도 흥미가 가득한 이 페미니스트의 성향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의 연구 분야 및 결과물 역시 전통적인 분류 체계에는 잘 들어맞지도 않는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와 같은 잡종적 존재들을 내세우며, 기존 서구 사상의 지배적인 이분법적 구도에 도전한 사람이다. 사실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를 페미니스트 혹은 기술철학자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걸어온 길과 그의 주장에 비춰 적절한 것은 아니다. 서구의 사상사 그리고 학문적 여정들이 공고하게 만들어 온 분류의 역사에 저항하는 해러웨이의 사유는 그의 지적 여정,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그의 글에는 여러 영역이 뒤섞여 등장하고 그래서 선언문인데 문장은 ‘선언적!’이지 않다. 명쾌함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지만, 무척이나 발랄하고 생동감 넘치는 사례들로 이뤄진 글을 대면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의 선언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인간이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적절할 것이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사유해온 인간 중심주의적 사유 구조를 전복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라는 의미다. 인간/비인간, 남성/여성, 인간/신, 인간/사물, 인간/동물 등 인간과 관련된 이런 전통적인 구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를 위해 처음 초대받은 존재는 사이보그였고, 이후 사이보그를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들을 ‘반려종’으로 개념화하면서 인간이라고 불려왔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해보자고 초대한다. 자연과 인간의 몸은 물론 주어진 것들 모두를 일종의 문화적 구축물로 보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이 붕괴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기존의 유기체적, 자연적 입장들 역시 재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뿐만 아니라, 여신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이미지는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학 기술 환경 속의 인간 존재를 해명하기는커녕, 과학 기술은 물론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반려종들과의 관계를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여신보다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말로 첫 선언문을 끝맺고 있다.
사이보그, ‘인간’이라는 신화에 대한 질문
인간을 말살하러 미래에서 넘어오던 테크놀로지의 결정체들이 만들어내는 암울한 상상들이 한 시절을 풍미하더니, 심지어 신체적 모방물도 없는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상상도 어렵지 않게 호응을 얻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는 사이보그는 더 이상 신기하거나 혹은 괴기스럽지 않고, 앞으로 도래할 인간의 모습 혹은 포스트휴먼 시대를 예약한 듯이 보인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사이보그의 다양한 변형들에 대해 ‘인간’에 대한 위협과 인간 말살에 대한 공포가 넘나들던 시기, 해러웨이는 인간과 과학기술의 상호 침투가 가져온 공진화 과정을 거부나 공포가 아니라 하나의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였다.
해러웨이가 말하고자 하는 사이보그는 무엇보다 서구 이분법의 경계 허물기에 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인간/기계/코요테/뱀파이어/몬스터/여신처럼 온갖 이종(異種)들의 결합이자 잡종들의 짜깁기다. 이런 잡종 사이보그는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인 질료형상설에 입각한 순수한 ‘인간 형상’설을 비웃고, ‘순종’ 백인이 인간의 본질적 ‘형상’을 확보하고 있다고 믿는, 백인 인종주의를 실없는 농담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시각을 지닌 해러웨이에게 그동안 지배적 힘을 행사해 온 (남성)과학은 보편적 진리라기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된 담론이자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세상 질서의 근거로 자임하던 종교를 대신해 진리를 독점한 근대과학은 자신의 논리에 고착된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한편 (남성)과학의 시점에서 볼 때 버려진 자 혹은 패륜아로서 잡종 사이보그는 퀴어와 친족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이보그 정치는 동질성에 바탕을 둔 정체성의 정치가 아니라, 차이에 바탕을 둔 친밀성, 연대 가능성의 정치다. 생각이 진행되는 결이 뭔가 친숙하지 않은가? 이미 오래전 발표된 ‘사이보그 선언’이 오늘날 퀴어들과 소수자들의 선언문이라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이 선언문의 중요한 지점이자 힘이다.
반려종: 관계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
서구가 지탱해온 형이상학적 남성-인간-중심주의에 사이보그가 되겠다며 도전 선언문을 던진 이후,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으로 더욱 확장된 사고의 지평을 보여줬다. 그는 불완전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제 사이보그뿐만 아니라 동물들까지도 친족으로 끌어들여 함께 공동전선을 구축하자고 외쳤다. 친족이라고 말하면 반려동물과의 의인화된 가족 관계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개와 고양이의 부모를 자임하는 사람을 찾기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심지어 스스로 반려동물의 집사라 부르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물론 이런 관계를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반려종은 반려동물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종들 사이의 공진화 관계에서 형성되는 반려종은 해러웨이가 만들어낸 범주다. 이전 선언에서 (남성)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선봉장이던 사이보그는 반려종 가족 중 일원으로 자리한다. 인간/동물/곤충/바이러스/AI(인공지능)/AI(조류독감)/퇴비에 이르기까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모든 존재를 반려종이라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물학적 분류에는 어디에도 반려라는 종은 없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반려종은 동물 아닌 것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반려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하기 십상이다. 애완동물이라는 것이 마치 장난감과 같은 것으로 동물을 보면 안 된다는 측면에서, 정서적인 유대와 교감을 나누는 존재로 보겠다는 의미를 담아 반려동물로 부르는 것은 1970년대 수의학과의 의학-사회심리사적 연구에서부터라고 하는데, 해러웨이가 말하는 반려종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창안된 것이다. 반려동물의 반려 개념이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라는 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반면, 반려종이라는 것에서의 반려는 인간적 중심이 없고, 여러 존재들의 관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반려와 종이 이어진 반려종이라는 새로운 종에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종 개념은 사실상 설 자리가 없다. 반려종의 구성원은 말 그대로 ‘서로 짝하는 존재’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무조건 둘 이상의 관계가 최소 단위가 된다. 그래서 개, 늑대, 비버, 쥐 등의 동물과 인간이 만남을 통해 형성해온 이종 협동의 역사는 인간만의 역사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인 관계의 역사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를 반려종의 아직 어린 친족으로 넣은 것도 앞으로 만들어갈 관계 속에서 인간과 엮이면서 공동의 역사를 만들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은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 포스트휴먼, 다가오는 미래 인류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인간중심주의는 다양한 변주의 형태로 사라지지 않고 그 힘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크놀로지의 지배적 영향력 아래 인간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는 무척이나 윤리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 향취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각이 지닌 난점과 다가오는 상황에 대처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반려종 선언’은 되씹어 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처한 인간 조건: 더불어 되기(becoming with)
그렇다면 이 수많은 이종의 존재들과 만들어내는 공동전선을 어떻게 구축해나갈 것인가? 해러웨이는 한 존재의 ‘주체성’이란 미리 내재된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맺는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효과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과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전제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다른 이종과 동등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매 순간 서로 뒤엉켜 갈등을 일으키고 풀어가며, 때때로 갈등 해결에 실패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반려종으로서의 존재들이 겪는 일반적인 과정이고, 변하지 않는 하나의 종으로 분류 가능한 고정성을 지니며 살아가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해러웨이의 다른 글에서 부제목으로 붙여졌던 것처럼, ‘우리는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가 말하던 ‘인간’은 이데올로기이자 신화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철학적 사고의 문제로 그렇게 주장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봐도 수많은 세균과 박테리아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압도적으로 우리 몸을 장악하고 있고, 실제 우리의 삶을 둘러봐도 인간은 인간들끼리가 아니라, 기계, 동물, 복제생물들과 역사와 문화를 함께 만들어 왔다. 테크놀로지와 생명 공학 등에 힘입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복잡하게 얽히며 진행될 것이고, 반려종의 범위와 구성원은 더 다양해질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 당연히 포함된 것이 반려종이라는 존재라고 할 때, 죽이기와 돌보기의 모순적인 상황은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여전한 힘을 놓지 않고 있는 ‘인간’이라는 신화적 구성물로는 턱없는 일처럼 보인다. ‘사이보그 선언’으로 시작해서 ‘반려종 선언’에서 확장된 문제의식을 되짚어 보고,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반려종 되기’를 고민하는 것은 해러웨이의 소중한 제안이자 하나의 실천적 방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믿어온 존재 규정이었던 ‘인간’을 뒤로하고 떠나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