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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포럼] 북 리뷰: 《인간의 조건》
미디어포럼 | 등록일 : 2021-09-30

 

《인간의 조건》 Ⓒ한길사

 

 

대선을 앞둔 한국은 그야말로 정치의 계절이다. 자고 나면 넘쳐나는 정치 뉴스의 홍수에 거의 익사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 속에 우리 세계의 공적인 논의는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1958년 간행된 한나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 정치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비단 정치학 분야뿐만 아니라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여기저기서 말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내는 풍경과 맞물려 새롭게 읽히며,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대중에게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책이다. 이 책은 아렌트 사상의 핵심 내용인 새로운 정치관, 즉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과 정치적 행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렌트를 지식 세계에 알린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그는 거대 악의 출처를 전체주의라는 근본악에서 찾고 있다. 한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계기가 된 또 다른 저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사유의 무능력, 즉 아무 생각 없이 이뤄지는 일상에서의 평범한 행위를 이 책의 부제목인 ‘악의 평범성’으로 지칭하면서, 이것이 거대 악의 출발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때 촛불이 광장에서 넘실대던 탄핵 정국 당시 상황을 다룬 많은 글에 등장했던 개념이다. 《인간의 조건》은 어쩌면 이 두 저작의 간극을 메우면서 그의 핵심적인 주장인 ‘정치적인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은 단순히 정치학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해박한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인간의 존재 조건을 기술한다.

 

인간의 본질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조건》은 최초 출간된 영어판과 독일어판의 제목이 다르다. 출판사의 제안으로 영어판 제목이 《인간의 조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은 책의 내용과 아렌트의 저술 의도를 알아채는 데 도움을 준다. 영어판 제목은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이고, 독일어판 제목은 《비타 악티바 혹은 활동적 삶에 관하여(Vita Activa oder Vom ttigen Leben)》인데, ‘인간의 조건’이라는 말에도, 그리고 독일어판의 제목을 굳이 활동적 삶을 의미하는 ‘비타 악티바’로 설정한 것에도 이 책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 아렌트는 책의 시작 부분에서 1957년 구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린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지구에 터를 두고 살 수밖에 없던 인간의 시선이 지구를 벗어나 전혀 다른 인간의 조건인 우주에서 인간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관점의 변화를 시사하며, 아렌트의 중요 개념인 세계, 영원성, 불멸성 등의 개념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말보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말에 훨씬 익숙하다. 그동안 여러 다른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고자 하는 말들이 있었다. ‘생각하는 인간(혹은 동물)(Homo Sapiens)’, ‘정치적 인간(Homo Politicus)’, ‘도구적 인간(Homo Faber)’ 그리고 ‘유희적 인간(Homo Ludens)’ 등이 그 흔적들로, 앞에 붙은 구절이 인간의 본질적 요소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드러낸 말들이다. 철학의 역사 역시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찾아다닌 여정이다. 그 결과물로 가장 잘 알려진 본질이 ‘이성’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 본질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잘못된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근원적으로 제약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목하는 일이다.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 비단 인간의 생명 유지라는 측면에서 조건 지워진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며 만들어낸 것들로 이뤄진 세계(the world)도 인간의 조건 가운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자연적 요소는 물론 문화적·제도적 측면까지 포함하는 것이 세계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단지 지구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들고 그 제약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세계가 중요하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동과 작업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적·제도적 산물들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를 새롭게 하고 영속성을 지닌 곳으로 만드는 힘은 우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바로 정치라는 활동적 삶의 양식인 행위다.

 

비타 악티바(Vita Activa)는 활동적인 삶을 의미하고 여기에 대비되는 삶의 양식은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즉 관조적 삶을 의미한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적 삶의 두 양식, 즉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이라는 양식에 대한 아렌트의 답변이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조적 삶을 활동적 삶에 비해 우위에 놓은 것을 비판하면서 두 삶의 양식이 상보적으로 작동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세상의 존재 원리와 작동 방식에 대한 탐색은 바로 이 관조적 삶을 통해 완성된다는 뿌리 깊은 서구의 입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관조적 삶을 의미하는 다른 용어인 테오리아(theoria)가 세상을 설명하는 것들, 이론(theory)의 어원인 것을 보면 그 뿌리 깊은 역사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활동적 삶이 인간의 조건인 세계의 지속과 인간 삶의 불멸성(신체적 죽음을 넘어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성취)을 실현할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본질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노동, 작업 그리고 행위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인 삶을 설명하면서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라는 부분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고대로부터 변화해온 이 활동들을 추적하면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가를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보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인이라는 말은 생존을 위한 필요로부터 해방된 자를 의미했다. 생존을 위한 필요를 충족하는 것은 동물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 즉 노동은 인간의 인간성이 아니라 동물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돼 자유인의 활동에서 배제됐다. 필요에 의한 활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 그중 영원한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학문적 활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상의 활동으로 간주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활동, 즉 노동과 생산 활동을 사적인 영역으로, 즉 가정에서의 삶의 양식으로 유폐시켰다. 사적인 삶은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활동 공간으로서 ‘진정한’ 삶인 공적 삶, 즉 폴리스를 작동하게 하는 정치적 삶이 결여된 영역이다. 이들에게 ‘사적(private)’이라는 말은 진정한 삶인 공적인 것의 ‘결여(privation)’ 혹은 박탈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고대 그리스 세계는 사적인 삶이 공적인 영역에 의해 압도된 상황이었다.

 

아렌트에 의하면 현대는 고대에 사적 영역으로 유폐됐던 이 두 활동, 즉 노동과 작업이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런데 이 말은 역으로 생각하면, 고대에 중요한 인간적 삶의 활동이었던 정치적 행위가 그 의미를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노동은 중요한 활동 양식으로 격상되고, 이와 함께 노동은 현대에 이르러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자기실현 행위 양식이 된다. 로크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노동가치설은 인간의 활동과 사적 소유를 설명하는 핵심 이론이었다. 아렌트는 노동을 중심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데, 아렌트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가 마르크스의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을 비판하는 저술을 준비하다가, 그것을 중지하고 그 내용을 녹여낸 것이 《인간의 조건》의 제3장이라고 한다. 노동이 인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과대평가한 측면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노동 개념으로 환원해 설명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그 일의 성격과 대상물 그리고 활동의 산물 등을 고려해 다른 성격을 가진 활동들, 즉 노동, 작업 그리고 행위로 구분하고 있다. 아렌트는 이런 다양한 성격의 활동이 모두 노동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실을 문제라고 봤다.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으나, 오히려 노동 사회로, 더 나아가 노동의 산물이 소비되는 상황이 일반화된 소비 사회로 전환이 이뤄지게 된다. 노동을 통한 삶의 유지에 급급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아렌트가 주목하는 근대성 비판의 중요한 지점이다.

 

이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 부류로 범주화하고 있다.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가 그것이다. ‘노동’은 생명체를 보존하기 위한 활동으로 인간 신체의 자연적, 생물학적 과정과 일치하며, 자연 대상의 가공을 통한 직접적 소비를 지향하는 활동이다. ‘작업’은 인간 실존의 비자연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활동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외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작업은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도구나 예술작품을 산출하는 활동으로서 문명과 문화의 토대, 즉 인간적 세계 형성의 토대가 되는 활동이다. 노동은 동물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알려주는 활동이고, 작업은 신들의 주물적, 창조적 활동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신적 특성을 알려주는 활동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만 고유한 활동을 아렌트는 ‘행위’, 즉 정치적 행위라고 한다. 다수의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는 정치적 행위는 인간적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양식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행위가 일어나야 하는 대표적인 공간, 언론


아렌트는 바로 이 인간적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행위 양식의 작동을 어렵게 만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사회라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는 포괄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 사회 안에서는 온갖 일들이 다 발생하며 거기에는 사회적·정치적인 사안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이란 아렌트가 창안한 독특한 개념이다. 노동을 핵심적 활동으로 여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출현은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정당화시켜줄 어떤 영역을 필요로 했다. 그 영역이 바로 ‘사회’라는 것으로 제도화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는 현대의 자본주의 경제와 더불어 등장하게 된 현대의 발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개인들의 사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으로서, 과거에는 가정 내 유폐돼 있던 경제적인 것이 공적 영역으로 제도화됐음을 지시하는 기호이다.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한 활동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 영역이 사회라는 이름으로 공적 영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현대의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과거의 공적 영역이었던 정치적 행위가 사적 영역을 보호하는 수준으로 전락함으로써 정치의 공공성 기능이 현저하게 줄어들거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사회적인 것’의 영역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흡수하여 사적인 영역의 일도 공적인 것처럼, 공적인 영역의 일도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논리와 동일한 선상에서 다룰 수 있는 것처럼 착시 효과를 불러올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대선을 목적에 둔 우리의 정치 현실도 다르지 않다. 가장 중요한 공약이나 슬로건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내거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즉 공동체 상호성의 영역인 공공의 영역, 정치의 고유한 영역을 상실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공동체 내에서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삶이 보장된다고 고대 그리스 사회는 믿고 있었다. 공동체에서의 추방은 사형선고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와 달리 현대는 사적인 안락을 추구하고 이런 안락과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서로 경쟁하는 사회를 출현시켰다. 정치는 단지 사적 개인들의 이전투구의 장이 돼버린 사회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장치로만 간주될 뿐 공공성 자체에는 둔감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사유 진행 과정은 인간의 삶을 유용성이나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만 판단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여기저기서 조짐을 보이는 전체주의적 사고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행위가 일어나야 하는 대표적인 공간은 바로 언론이다. 이때 공간은 구체적인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 주체들의 행위를 통해 출현하는 참여자들의 사이 공간을 말한다. 취재에 의한 원천 기사는 없고 끝없이 복제되는 기사들을 만들어내는 ‘노동’만이 삶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곳에는 활동적 삶을 위한 행위는 고사하고 다음 세대의 유지를 위한 작업이라는 활동에조차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언론 현실을 보면, 언론이나 정치가 다양성을 보장하거나 또 공동의 번영을 목표로 공공성을 확장하지 않을 때, 또 언론이나 정치의 목적이 사적 영역의 보호에 국한될 때는 구성원 전체가 공멸의 과정을 갈 수 있음을 아렌트는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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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 김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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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 : 202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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