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단독’이 넘치다 못해 지천으로 깔린 한국 저널리즘의 비극적인 풍경. 통신사로부터 받은 단신성 뉴스를 계약에 따라 전재하는 것 외에, 언론사의 모든 기사는 기본적으로 ‘단독 취재’의 결과물이어야 한 다고 수백 번 말한들, 이 개탄스러운 행태는 쉬이 사라지지 않을 성싶다. 그런 와중에 ‘특종’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거의 자취를 감춰버렸다. 기사의 출고와 함께 스스로 이름표를 붙이는 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단독’과는 달리, 그래도 ‘특종’은 기사 출고 이후에 얻어진 언론계와 사회의 반향에 바탕을 두어 남들이 붙여주는 일종의 상찬이었다. 그때도 무리한 특종 경쟁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지금의 단독 경쟁보다는 퍽 우직하고 낭만적인 구석이 없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희상 시사IN 선임기자를 만났다. 한국전쟁 후 민간인 학살 은폐 문제,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조희 팔 다단계 사기 사건, 검사와 스폰서의 어두운 관계, 친일파 재산 상속 문제 등 근현대 한국사의 굵직굵직한 이슈를 파헤치며 명실상부한 특종을 쏟아낸 정희상 기자에게, 이 하찮고 시답잖은 단독 경쟁 속에서 그가 30년 넘게 천착해 온 탐사보도가 갖는 의미는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희상 시사IN 선임기자 <출처 – 필자 제공>
아직 풀지 못한 숙제
“긴 호흡의 심층 분석 내지는 심층 발굴 같은 보도들에 대해서 수요층이 탄탄했던 시대가 있었죠. 군사독재 시절, 언론자유가 약했던 시대, 월간지가 흥하던 시대에는 그야말로 투사처럼 보도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 2000년대 넘어서면서 특히 인터넷 미디어가 점점 세를 확장하고 수용자들도 그쪽으로 이동하게 되자, 언론 기자들도 기자 덕목으로서의 탐사 정신을 중시하지 않게 된 측면이 있죠. (…) 그런 것들이 언론사의 생존 방식과 결합하면서 사주부터, 그리고 편집 간부들부터 자극적이고 마초적이고 즉자적인 것을 더 독려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 물론 <뉴스타파>나 JTBC 등의 몇몇 언론에서 탐사 저널리즘을 살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월간지 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후, 주간지 시사저널을 거쳐, 지금은 주간지 시사IN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설핏 지난 30년의 주요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진실을 찾아 나선다는 자부심과 의지를 품고 ‘불독 기자’라는 별명답게 수년간 한 가지 사안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그가 이뤘던 성취, 인쇄 매체와 영상 매체에 걸쳐 양질의 탐사보도가 다변화된 모습으로 융성하던 시절, 그리고 문득 찾아온 변화, 독자적 탐사성을 지향해온 기자 덕목의 유명무실화, 아니 ‘무명’ 무실화. 그런데도 그는 묵묵히 탐사보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여전히 발로 뛰며 취재하는 현직 기자로서의 ‘행복’을 이야기했다. 때문에 그의 표정은 미묘했지만, 거기에는 허탈보다는 해탈에 가까운 웃음이 포개져 있었다.
기억을 짚어가던 그가 “잠깐만요” 하며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자신의 책상에 가서 인쇄된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정희상 기자님께” 보낸 한 제보자의 이메일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공교롭게”도 이 대담이 시작되기 직전에 들어온 과거사 문제 관련 제보였는데, 그가 지금 이 시각에도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과거사 관련 취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증언자들과 소통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 책은 내가 언론계에 발 디딘 이래 지난 17년간 숙명과도 같이 맞닥뜨려야 했던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매 사건을 보도할 때마다 나는 ‘진실’과 ‘국민에 대한 국가의 본분’을 둘러싼 질곡을 파헤쳐 밝은 빛 아래 드러내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저널리즘의 한 영역이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적 사회적 사건을 발굴해 볕을 쪼이는 데 있는 한 나는 앞으로도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길을 고집할 것이다.”
2005년 정희상 기자가 펴낸 책 《대한민국의 함정》의 일부분이다. ‘숙명’,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기록’, ‘진실’, ‘밝은 빛’과 같은 열쇳말이 눈에 꽂힌다. 국가라는 권력체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본분을 망각했을 때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진실을 파헤쳐 볕을 쪼임으로써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을 그는 기자의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듯하다. 탐사보도 기자로서 32년 동안 정희상에게 ‘남은 것’은 무언지 물었을 때도 그는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도 끊임없이 놓지 않고 있는 것은, 기자 초년 시절부터 붙들었던 주제, 못다 한 숙제인 과거사 문제입니다. 해방에서 건국 전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역사전쟁이라고 할 정도의 문제, 그것을 끊임없이 추적해야 한다는, 그런, 아직 남아 있는 사명감 같은 거.”
질문을 던지면서 내심 속으로 기대했던 건, 평생을 탐사보도 기자로서 헌신하면서 뚜렷하고도 지속적인 성취를 해온 그만의 ‘노하우’랄까, 그가 쌓아 올린 어떤 독보적 역량 같은 것을 (다소간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은 것’이란 질문을 듣고 ‘자신이 다 풀지 못한’ 숙제를 먼저 떠올린 듯하다.
“이를테면 제가 5·18 문제에 대해 굉장히 많이 떠들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취재도 하고, 5·18재단에서 하는 강연에 언론인으로서 나가기도 하고 그러 는데요. (…) 5·18은 그렇게 먼 과거사도 아니고, 비록 불충분하긴 했지만 국가적으로, 공적으로, 사법적으로 검증이 된 사건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살아 있는 장본인 전두환의 행태를 포함해서, 지지하는 세력들이 조그맣게 뭉쳐서 우글우글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가짜뉴스를 유포하면서 특정 지역까지 장악해 들어갔더라고요. 그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동네 미장원에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우리 남편이 5·18 때 공수부대로 갔잖아. 그때 한 20명쯤은 빨갱이들, 광주 빨갱이들을 총으로 조준해서 쐈대.’ 그러니까, ‘우와~!’ 하며 다른 아주머니들이 박수를 치더라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그냥 단순히 들리지 않았어요. 지금 세상에도 일반인들이 그런 거짓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고 상당히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건데, 그런 해악의 원조가 저는 (북한군 개입설 등을 처음 퍼뜨린) 언론에게도 있다고 봐요. (…) 전두환 추종 세력들이 전두환이 죽기 전에 명예회복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는데, 그러려면 ‘5·18은 죽일 만하니까 죽였다’는 식의 정당성이 필요하고, 그래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들어왔다는 가짜 사실과 의도적 프레임을 만들어낸 거죠. (…) 어느새 노(老)기자가 됐지만, 계속할 일이 많구나, 그만하고 싶어도 그만할 수 없는 일이구나라고 느껴요.”
그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역사전쟁’이라고까지 말한, 최근의 학술적 용어로 표현하면 탈진실적 역사부정론(denialism)이 횡행하는 이 비극적인 현실. 32년을 넘어 아직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이 ‘노기자’에게는 온몸으로 부딪쳐야 할 또 하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이 묵직하게 전달됐다. 초년 기자 시절부터 매달렸던 과거사 문제는 그와 동료들이 발견한 사실과 파헤쳐낸 진실의 힘으로, 여전히 부족하나마,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고된 여정의 끝에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뻔뻔한 거짓말과 그에 호응하는 세력이던 게다.
“제가 천착해온 민간인 학살 문제 같은 건 (단박에 진실이 드러나고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형태가 아니라) 10년 묵고, 15년 묵고 나서야 마치 새로운 것처럼 비로소 세상에 퍼뜨려지는 것이더라고요. 제가 1989년부터, 4·19혁명과 5·16쿠데타 이후로는 처음으로 (파헤치기 시작해서) 매주 전국을 누비면서 한 2년 동안 다뤘는데, 말 잡지를 본 일부 독자층에서는 메아리?가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전부 조심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였죠. 쉬쉬하는. 저러다 저 기자 다치지 않나 하는 그런. 피해자들조차도 걱정돼서 말을 못 털어놓을 정도였어요. (…) 그렇게 처음에는 인권 문제로 어젠다(agenda)를 던진 측면이 있었고, 계속 부딪히면서 책도 내고, 시사저널로 옮겨서도 이 문제를 다뤘죠. 그러니까 우선 역사학계와 사회학계가 좀 받아주고,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피해 민중이 많았던 지역에서 반향이 생겼어요. 우리 지역사회가 왜 이런 원한과 갈등을 갖게 됐는가, 그 모순의 근원을 파고들어 가는 연구가 나오게 된 거고, 그즈음 지역 언론도 폭발적으로 다루게 된 거죠. 그게 모아지면서 2000년대 들어 학자, 법률가, 또 아직은 두려웠지만 용기 있게 나서준 유족들이 힘을 합쳐서 피해 구제를 할 수 있는 법도 만들어지고 하게 된 거예요.”
끝까지 현장에서 뛰고 싶다
수십 년의 호흡을 통해 확장하고 끈질기게 쌓아 올라가 마침내 사회 개혁의 실마리를 마련하는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속을 찌르고 들어 오는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전공’이라는 이름하에 어떤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쌓아 올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덕이자 기본적인 행위 양식일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 연구자인 나로서도 쉽지 않은 일을, 정희상 기자는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해왔다. 그런 그에게, 이른바 ‘데일리 뉴스 생산’이라는 산업적 관습과 시장 구조 속에서 출입처 중심으로 기사를 생산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자 심지어 거기서 묘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대다수 기자의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각자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게 있다면, 호흡이 짧은 일반 뉴스를 생산하는 경험을 하다가도, 언젠가는 특정 주제에 천착해 전문성을 길러가고, 그 결과로 호흡이 긴 기사를 쓰면서 탐사성이 높은 기획을 세워 기자 자신의 독자적인 취재 방법론과 관련 지식을 쌓아가는 게 ‘기자의 원형’이라고 보는 언론학의 시야와 이 ‘불독 기자’의 견해가 어느 정도나 일치할지 궁금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약간의 머뭇거림과 동시에 단호함이 읽혔다.
“일간지가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탐사취재를 할 때 일간지의 국방부 출입처 기자들하고 매일 만나고 그래왔는데, 굉장히 좀 (…) 동종업무에 종사한다고 하지만 참 (…) 모멸감이나 자괴감 같은 것을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이를테면 한 출입처 간사 기자가 양심고백을 해서 알려진 건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장관이 예산을 몇 억 더 타내서 기자실을 새롭게 꾸며주고, 해외에도 같이 나가고, 군단장 및 군사령관과 동행하는 골프 미팅도 주선해주고 한 거죠. (…) 문제를 보고도 그냥 침묵해주는 것까진 뭐 그렇다고 쳐요. 근데 심지어는 군 의문사(疑問死) 건에 관련해 아예 국방부 편을 들면서 들러리 서는 경우까지 있었어요. 군이 자신에게 유리한 전문가를 동원해서 결과를 몰고 가는 공작을 하면서, 고급 정보랍시고 특정 기자에게 흘려주면 그걸 넙죽넙죽 받아 군에 유리한 기사를 써주는 거죠. 지금 봐도 악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를 만들어내는 주요 조건 가운데 하나로 출입처 제도, 특히 출입처의 취재 대상과 취재 기자가 유착하는 문제를 지적하곤 한다. 그에 대해 의외로 많은 기자가 출입처 제도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자신들은 다각적인 검증 취재를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도 보았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모든 제도는 결국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그 의미가 판명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논의를 빌려오자면, 일종의 장(場: field)으로서의 특정 제도는 행위자가 특정 행위관습(habitus)을 갖도록 유도한다. 더 무서운 건, 그런 행위관습에 매몰되다 보면 자신이 어디서부터 어긋나 있는지를 성찰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
“출입처 제도가 언론에게 편의성을 제공하는 면이 있죠. 하지만 역으로 보세요. 그건 취재 대상이 언론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에서도 효율적인 수단이기도 해요. (…) 그 결과로 암묵적인 카르텔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출입처 제도의 장점을 살리려 한다 해도, 그를 위해선 출입처 이상의 것이 필요해요. 기자들이 출입처에 의해 관리되고 있고 통제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해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취재보도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건 출입처를 두고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결국 출입처 바깥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그, 취재 대상이 되는 국가 기관이나 같은 곳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곱게 봤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어땠는지 물었다.
“사람들은 저를 아예 내놓고, ‘아, 쟤는 유별난 애, 별종 기자’라고 봤어요. 자타가 인정한 거죠. 그렇다 보니 저도 얽매일 것 없었고, 다른 쪽에서도 저를 특별하게 (구워삶거나) 할 필요가 없어서 자유로웠죠.”
기자의 ‘본분’에 가까운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오히려 ‘별종’이 돼야 하는 이 아이러니,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나아가 저널리즘이 권위와 신뢰를 잃고 기자들이 ‘기레기’ 취급을 받게 된 이 조건에서, 만약 기자가 되겠다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 걸까, 궁금해졌다.
“저는 하라고 할 거예요. 언론 직업인으로서의 사명감, 보람을 생각했을 때는 어느 정도의 자기만족이 중요하죠. 지금 언론이 굉장히 잘못 가고 있기 때문에 욕을 먹고 있긴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언론을 없애버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수단과 행위 방법이 달라질 뿐인 거죠. (…) 군인은 끝까지 전장에 남는 걸 가장 명예롭게 여기잖아요. 심지어 (중간에 군인을 그만두고 권력을 탐한) 박정희, 전두환도 ‘나같이 불행한 분은 더 없어야 한다’고 그랬잖아요. (…) 옛말로 표현하자면 제게는 지사적 언론관이 맞는 거 같아요. 제1차 이라크전에서 한 노기자가 수염을 날리며 방송하는 걸 보고 ‘아, 미국 사회의 언론인이 부럽다. 70대 넘어서까지 취재수첩을 들고 사건사고 현장에서 뛸 수 있다면, 그리고 마지막 죽음이 거기서 이뤄진다면 그건 언론인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냐’라고 기자 초년 시절에 생각했어요. 그때 다른 기자들도 다 공감했거든요. ‘맞아. 우리는 그래야 돼’라면서.”
사실을 추적해 진실에 다가섰던 언론인
그는 대화 가운데 종종 그는 ‘꼰대’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런 고색창연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면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꼰대라고 생각할 것 같다면서. 하지만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된 걸까. 그런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끼고, 울컥하는 감정을 자주 품었다.
“흔히 탐사보도를 특종에 연결시키는데, 단순한 특종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적으로 우리 공동체가 더 바람직하고 개선된 방향으로 기여를 하는 특종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두운 곳에 빛을 쪼여서 여러 가지 제도 변화라든지 개혁이라든지 이런 것을 이뤄내는 데 불쏘시개가 되는 기사, 나아가 법적·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끝을 보려는 태도.”
이 말을 하면서도 그는 다시 스스로가 꼰대로 비칠지 모르겠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말했다. “그래서 저는 꼰대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쓰는 걸 싫어합니다.”
“근데 가끔 후회도 되는 게, 주요한 증언을 영상으로 남겨놓지 못한 거예요. 제 강점이라면, 사실에 접근을 해봤고, 그렇게 발굴한 사실에 기반을 두어 논평할 수 있다는 점인데, 누군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의견을 내거나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킬 때 (그것을 결정적으로 공박할 무기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예컨대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와 제가 두 시간에 걸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만약 그때 그걸 녹화해두었더라면, 최근 이용수 할머니와의 문제에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벌어질 경우, 그걸 그대로 틀어주기만 해도 많은 것이 해소됐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때의 취재가 그냥 기사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뉴스로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일.”
기자로서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루고, 그 많은 사실을 스스로 찾아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작업에 매진해온 그를, 그러면서도 여전히 반성하는 것이 있고 아직도 더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진실 찾기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그를 ‘꼰대’라는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단어로 덮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폭력을 행하는 자이고 탈진실로 진실을 흐리고자 하는 자가 아닐까. 필경 그런 족속들의 대부분은, 긴 대담을 마치고 나서 제보자가 보내온 이메일이 인쇄된 종이를 들고 바삐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는 정희상 기자의 발끝이라도 따라올 의지나 능력도 없는 치들일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