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상세
[기획연재] 신문과방송이 만난 사람 - 이조훈 감독
기획연재 | 등록일 : 2020-09-01

<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umbine)>,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 <인사이드 잡(Inside Job)>. 다큐멘터리 영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이라도 한 번쯤 접해봤거나 적어도 들어봤음직한 작품들이다.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은 미국의 총기 소유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큰 반향을 일으켰고, 데이비스 구겐하임(Davis Guggenheim) 감독, 앨 고어(Al Gore) 미국 전 부통령 각본의 <불편한 진실>은 기후 위기를 세계적 의제로 밀어 올렸다. 찰스 퍼거슨(Charles Ferguson)이 연출하고 배우 맷 데이먼(Matt Damon)이 내레이션을 맡았던 <인사이드 잡>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에 의해 발발했던 2008년 금융위기가 전 세계 평범한 이들의 고통으로 전가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렸다. 이들은 작품성, 대중성, 사회적 메시지 측면에서 모두 상당한 성과를 올렸고, 각각 2003년, 2007년, 2011년에 미국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상을 받았다.

 

광주에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한국에도 훌륭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적지 않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워낭소리>는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음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둬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시장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했다. 이들에게 쏟아진 대중적 찬사는 단지 ‘눈물 콧물 다 쏟게 하는’ 한국적 휴먼스토리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잘 몰랐거나 외면해왔던 노년의 문제, 그리고 스러져가는 농촌, 동물과 인간의 이야기에 조명을 비춤으로써, 상당한 울림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적 사안에 메스를 들이대 정면으로 사회적 문제를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충분한 반향과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례는 아직까지 드문 편이다.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송환>이나,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 등 주목할 만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대중적 소구와 도달력을 지닌 ‘저널리즘적’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다소간 호흡이 짧은) 방송 부문에 머물러 있다. 

 

이런 조건에서도 나는 우리 저널리즘의 심층적 다변화 가능성을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찾는다. 한국 탐사 저널리즘을 이끄는 뉴스타파가 제작한 <자백>,  <공범자들>, <김복동> 등은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혹은 ‘영화 저널리즘’이 취재와 기록의 힘을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유력한 장르로서 부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이조훈 감독의 <광주비디오: 사라진 4시간> 역시 그런 궤적 위에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학살자의 역사 왜곡이 정치적 동원의 재료로 활용되는, 가히 한국판 ‘역사부정론’이라고까지 할 만한 조건에서, 이조훈 감독의 ‘영화 저널리즘’은 우리로 하여금 광주의 실체에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숨어버린 증인을 찾아 새로이 증언을 구성하고, 치밀하게 자료를 쫓아 진실에 다가가는 그의 작업에 담긴 저널리즘적 지향은, 청년들을 납치해서 간척사업을 시켰던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인권유린을 파헤친 <서산개척단> 그리고 공공서비스를 민간에 팔아넘겼던 나라들에서의 흑막과 암울함을 추적한 <블랙딜>과 같은 전작 속에서도 이미 뚜렷했다. 하지만 지금, ‘왜, 또, 하필’ 광주일까? 그의 접근엔 어떤 긴요함과 새로움이 있을까?

 

“사실 40년이 지났고, 그동안 광주에 대한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이 만들어졌죠. 그런데 대부분 항쟁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피해자 입장에서 (…) 왜 그들은 분노해서 군인들과 맞설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 (…) 은 많이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이니, 그것을 기록하고 전파한 사람들은 누굴까, 누가, 왜,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만들어서 했을까, 그들은 현재 무엇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소스도 찾아보고 기사도 찾아보니, 마침 또 (당시에) 의롭게 활동해 주신 분들을 접촉하면서 확장을 했는데, 생각보다 (광주를 기록한) 비디오가 굉장히 많더군요. (…) 그래서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조훈 감독 <출처 – 필자 제공>

그렇다.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은 말 그대로 1980년 광주를 기록한 당시의 ‘비디오테이프’를 다룬다. 1987년 민주화는 1980년 광주의 핏값이고,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광주 비디오’를 돌려보던 사람들의 충격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가 광주 비디오 속의 처참한 광경에 주목할 때, 이조훈 감독은 그것을 기록물로 만들고, 복사하고, 목숨을 걸어 배포하고, 상영했던 사람들을 추적했다. 

“(독일 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J rgen Hinzpeter)가 최초로 알린 것으로 많이 인식돼 있는데 팩트체크를 하다 보니 NHK가 (1980년 5월) 18일부터 먼저 들어와서 19일 뉴스를 내보내며 가장 먼저 알린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항쟁 기간 중인 26일에는 약 50분 분량으로 스튜디오에서 직접 특파원과 연결해서 방송했죠. <계엄령 하의 한국>이라는 제목의 방송물이었습니다. 조총련1)에서 그 소스를 가져다가 재편집한 것이 <원한의 땅 광주를 고발하다>입니다. (중략) (NHK를 재편집한 조총련 영상이 자칫 북한과의 연관성 문제로 희석될까봐 우려했던) 뉴욕에서 (교민들이) 만든 <오, 광주>, 캐나다 맥길대 한인학생회가 영어 더빙을 해서 만든 <기로에 선 한국>, 그리고 독일 버전의 <기로에 선 한국> 등이 우리에게 ‘광주 비디오’로 알려진 것들이죠.”

광주에서의 참극은 교과서에도 기록되고 여러 편의 대중 영화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일반화된 현대사다. 하지만 민주화 이전에도, 심지어 민주화 이후로도 한동안, 광주에 대한 영상 기록을 공유하는 일은 상당한 위험과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시 명동성당 청년회가 9,000개 정도 복사해서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이후 광주 분들이 만드신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도 한 만 개 정도 복사해서 전국에 배포했다고 해요. (…) 누군가가 가져가면 복사해서 돌리고…사실 이미 1,000만 관객의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광주 비디오였습니다. 전국에 퍼지면서 광주에 대한 왜곡된 진실을 알게 되니까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거죠. 이번에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 영화를 보시면서도 놀라셨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힘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의 그 엄혹했던 시절엔 광주 비디오를 편집하고 복사해서 배포하고 상영하는 행위 자체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고, 그랬던 그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퍼져 지금도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기본 동력이 되고 있음을 그는 발견한다.

“3·1운동 100주년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 적 있었어요. 신한청년당을 다룬, 굉장히 젊은 20대들과 여운형 선생님을 중심으로, 중국에 계시다 독립선언을 하시고자 일본으로 몰래 들어가서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해서 뿌리고, 그것을 다시 국내로 가지고 와서 뿌리는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인데요, 그게 다시 1987년도에 재연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주 비디오라는 것으로 형식이 바뀐 것이죠. 몰래 복사해서, 삼엄한 검문을 뚫고 들어가서 전달하고, 민중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것. 저 자신도 매체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알게 됐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 안 되겠다, 알려야겠다는 마음에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중략)”

“‘촛불 몽타주’의 형식으로, 1987년 12월 25일 명동성당에서 촛불을 들고 시위하던 분들이 광우병, 박근혜, 최근에 검찰개혁까지도 촛불을 들고나왔음을 보여드렸습니다. 저희가 인터뷰를 했던 당대의 주역들이 마침 촛불 시위 현장에 간다고 하셔서 촬영을 했죠. 그들이 정치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들은 그들 스스로 광장에 나와서 자기의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행위를 아직도 하고 계신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봤어요. 또 거기서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면서 기록을 하시는 것 자체가, 그들 스스로가 또 하나의 광주 비디오를 만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싶었죠.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을 통해서 또다시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고 있다고 (…) 1987년을 포함한 그 이후까지 충분히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잊고 있는 무언가를 환기시키는 일

이조훈 감독의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은 제목 그대로 ‘광주 비디오’와 ‘사라진 4시간’을 다룬다. 한국 민주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록인 ‘광주 비디오’의 생성과 배포 과정과 그 주역들을 추적하는 한편, 그 기록 속에 빠져 있는 ‘4시간’에 대해 또 다른 종류의 대화를 촉구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신군부 학살자들은 참극에 대한 기록을 원천봉쇄하려 했지만 ‘광주 비디오’를 통해 진실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남도청 앞 발포 시점의 4시간가량이 영상적 기록 차원에서 빈 곳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 당시에는 의도하지 않았던) 4시간의 공백이 보였습니다. 그 증거의 공백. 이 자리를 찾아보는 것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죠. 추적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알게 됐는데, 좀 더 팩트체크를 하고 조사해봐야 하는 것들이 있지만, 일단은 올해 먼저 던져보자고 생각했습니다. (…) 저는 조사권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 그 대상이 기자도 있고 계엄군도 있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에게 다시 권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거부도 많이 하셨고요. 일단은 의문점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던지면 다시 반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실제로 그 당시에 활동한 분들이 계신다면, 현장에 있었던 기자 중에 그 기록을 가지고 있으나 발설하지 않기로 한 분들이 계신다면, 그것을 미끼로 해서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 등 관련자라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도 적지 않다. 기록의 공백을 새로 발견하고 그것에 의문을 품게 된 건 이조훈 감독의 저널리스트적 접근이 이룬 성과이다. 이 빈 곳은 당시 신군부가 철저히 은폐한 결과일 수도 있고, 기록된 것을 삭제하거나 영영 보이지 않을 어둠 속에 묻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이 공백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이 시점이 학살 책임자를 규명하는 이른바 ‘스모킹 건’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5·18 관련자들도 영화의 새로운 접근 방식에 놀라 브리핑을 요청했고, 모임이 성사되기도 했죠. 이게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 당시 영상의 공백을 추적하는 것 자체가, (사라진) 비디오를 찾는 의미도 있지만, 다시 (우리 사회가 잊고 있는 무언가를) 환기시키는 일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감추고 있고, 아직도 감추려 하는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련 자료를 보다 보니 몇 년 전 KBS에서 보도된 뉴스 꼭지가 있었어요. 전두환의 비서로 일했던 이가 (증언컨대) 전두환이 늘 말하기를, ‘4·19 발포 명령자는 사형을 당했다. 발포 명령자로 해당되는 것이 밝혀졌을 때는 내 목숨이 위험하므로 절대 밝히면 안 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돌려서 인정하는 꼴인데, 어떻게든 증거를 잡아내야 해요. 발포 명령이라는 그 순간의 명령이 중요한지, (나아가) 포괄적으로 사격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진돗개1’을 명령한 자가 발포 명령권자에 해당되는지를 확장해서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도청에서 발포하던 날 새벽 4시 보안사 사령실에서 진돗개1을 발령했죠. 현역 군인들은 아시겠지만, 진돗개1이 발령되면 80발의 탄환을 가질 수 있고 언제든지 사격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발포하는 것은 현장 담당자가 판단하는 것이고 진돗개1이 발령된 이상 이미 사격 명령이 들어간 것이라 하겠죠.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은 5월 21일 보안사 사령실 벙커의 책임자였고, 그 사람이 누군지는 우리 모두 알 것입니다.”

기록의 공백을 메우다

이조훈 감독은 누군가 목숨을 걸고 기록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혀버렸을 역사를 발굴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한다. 나아가, 그 기록 과정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을 남김으로써 그것을 명백한 역사로 ‘이중 박음질’하려 한다. 왜? 최근의 5·18 부정론, 나아가 일제 강제 행위 부정론에서 확인되듯, 우리가 딛고 있는 역사의 지반은 의외로 허약하기 때문이다. 역사 부정론자들은 엄연한 역사를 왜곡하여 정치적 지지자를 규합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록이 비어 있는 곳을 교묘히 파고든다.

“5·18 진상조사위원회 1기 조사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한 창고에서 5·18로 분류되지 않은 타 문서를 뒤지다가 수기를 한 장 발견했다고 합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앞 진압이 끝나고 바로 작성된, 영화에 나오는 61대 대장이 쓴 것이었죠. ‘버스가 달려오니까 실탄을 한 발 지급해서 버스 기사를 저격했으나 절명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오자 다시 한 발을 지급해 시범을 보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다른 시민들에게 죽이는 시범을 보였다는 거예요. 1985년 진상조사와 1988년 청문회 모두 증언에서 위증한 것에 대한 반박 증거가 나온 셈입니다. 이들은 증거의 부재 자리를 왜곡으로 채우고 있어요. 저희 영화 네이버 소개란 댓글을 보면 ‘버스 기사가 밀고 와서 경찰 죽인 것이 영화에 나오더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런 수기를 보면, 증거를 찾으면 답이 나옵니다. 사라진 4시간을 찾는다는 거, 실존하는 증거를 들이댐으로써 그들의 왜곡을 뒤집어 버리는 일입니다.” 

만나본 여러 훌륭한 저널리스트들이 그러했듯, 이조훈 감독에게서도 특유의 끈기와 집요함,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명감과 역사의식이 읽혔다. 그런데, 사명감만으로 이 일을 지속하는 게 가능할까?

“제 사주에 칼이 있다고 해요. (사주 봐주는 사람에게) ‘찾아내는 게 업’이라고 하니까 ‘직업을 아주 잘 찾았다’고 하더군요. 만들면서 힘들었습니다. 화면을 다시 보고, 사상자들의 모습을 보며 편집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끝나면 당분간 다큐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죠. (하지만) 사라진 4시간을 찾아볼수록 (새로운) 자료가 나오는데 화가 나더군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 편은 그들 자신이 어떻게 위증을 했는가를 1980년대부터 역순으로 쭉 풀어가면서, 절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이 나오게끔 하고, 이 영화가 화두를 던진 사라진 4시간도 밝혀지게 할 근거를 찾고 싶습니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도 분명히 비어 있습니다. 비어있는 역사를 왜곡하면서 호의호식하는 이들을 다시 (감옥에)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업’을 이야기했다. 나는 저널리스트는 시쳇말로 무엇보다 ‘꾼’이고 ‘쟁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직(vocation), 즉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란 이렇게 ‘부름에 이끌리는 것’이고, 경제적 보상과는 별개의 목적의식을 갖는 것이다.

“조사 연구자들을 통해 들어본 바로는, 범죄자들은 원본을 폐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원본을 둬야 계속해서 비교하며 왜곡본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라진 4시간’의 비디오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이 왜 감춰지냐면, 1988년 청문회 때 국방부 사람들이 청문회의 (거짓) 증언을 정설로 만드는 데 같이 동참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기서 활동했던 국방부 인사들이 국방부 정책실에서 중요 요직을 맡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도 국방부 정책실에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도 정보를 얻어내기 힘들다고 5·18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말씀했어요. 강제조사권을 가져서라도 정보를 빼내야 합니다. 가해를 한 누군가가 있고, 모두가 알지만 잡지 못한 이유는 증거가 없어서죠. 증거를 찾아내서 가해자들을 다시 처벌해야 합니다. 전두환은 지금까지 살인죄로 기소된 적이 없습니다. 기소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증거를 찾아내면 다시 기소가 가능합니다. 그날까지는 작업할 것입니다.”

기록의 공백을 메울 기회가 때마침 열리는 걸까? 최근 취임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40년간 숨겨왔던 5·18 관련 자료의 전수조사를 거쳐 총 45건 3,389쪽 분량의 새로운 문서를 진상조사위원회에 전달했다. 애써 숨기고자 했던 자들에게는 불안한 소식이겠지만, 새로운 자료의 등장은 ‘진정한’ 연구자와 저널리스트를 흥분시킨다. 필경 이조훈 감독도 그중 하나일 것 같다. 











1)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줄여 이르는 말. 1955년 결성된 친북 성향의 재일본인 단체 다. 편집자 주
저자의 다른 미디어
  • 필자 : 정준희
  • 소속 :
  • 직함 :
  • 발행 : 2020-09-01
  • 조회수 : 8
  • 키워드 :
블로그 공유 트위터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