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상세
[미디어포럼] 북 리뷰: 《이미지와 환상》, 《가상은 현실이다》
미디어포럼 | 등록일 : 2020-09-01

 

《이미지와 환상》 다니엘 부어스틴 지음 ©사계절


 

 

 《가상은 현실이다》 주영민 지음 ©어크로스

 

 

 

‘탈진실(Post truth)’이라는 신조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 기점은 2016년이다. 그해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와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황당한 거짓말과 교묘한 허위 정보가 난무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을 ‘2016년의 단어’로 선정했다. ‘탈진실’은 한때 유행어로 떠오른 뒤 이내 사라지던 다른 신조어들과 달랐다. 허위·왜곡 정보의 위험성과 폐해에 대한 잇단 경고와 범사회적 대응에도 불구하고 탈진실은 점점 더 뚜렷한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보건기구는 글로벌 팬데믹 코로나19 상황에서 생물학적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왜곡 정보가 생명을 위협한다는 ‘정보전염병(인포데믹)’ 경고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각국 정부와 의회, 언론들은 가짜뉴스 대응 정책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보기술 기업들은 좀 더 편리한 사실 확인 도구를 제공하려 애를 쓰고, 언론들은 앞다퉈 팩트체크 코너를 개설했다. 미디어는 사실 보도와 유통에서 어떠한 실패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가짜에 현혹되는 것일까? 십수 년 전 읽은 《이미지와 환상》을 서가에서 다시 꺼냈다. 


‘가짜 사건’이 매스미디어를 지배한다 

 

《이미지와 환상》은 미국사를 전공하고 시카고대 석좌교수와 국립미국사박물관장을 지냈으며, 1970~80년대에 걸쳐 미 의회도서관 운영 책임을 맡고 명예 관장을 역임한,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의 1962년 저작이다. 원제는 《이미지(The Image)》, ‘미국의 가짜 사건을 위한 가이드(A Guide to Pseudo-Events in America)’라는 부제를 달고 사이먼앤슈스터(Simon & Schuster) 출판사에서 출판됐다. 국내엔 40여 년 뒤인 2004년에야 정태철의 번역으로 소개됐다. 번역서는 출간 16년이 지난 지금도 절판되지 않고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 책에는 매스미디어의 시대, 특히 TV가 대중문화를 지배하던 시기에 미국의 사회문화 현상을 바라보는 역사학자의 통찰이 담겨있다. 인터넷과 모바일은 상상할 수 없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문적 언론인과 거대 뉴스 조직이 저널리즘을 수행하던 시기의 분석 틀이다. 오늘날처럼 인공지능과 디지털 편집도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모바일을 매개로 한 가짜뉴스를 상상하기 어렵던 시절이지만, 오늘날 탈진실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역사학자 부어스틴이 매스미디어와 1960년대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키워드는 ‘가짜 사건’이다. 그가 말하는 ‘가짜 사건’은 오늘날과 같은 허위 조작의 개념이 아니라,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진짜는 아닌’ 의사 사건(疑似事件, pseudo-events)이다. 부어스틴이 이 책에서 개념화한 ‘가짜 사건(pseudo-events)’과 ‘유명인(celebrity)’은 이후 사전에 등재되며, 미디어의 본질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됐다. 60여 년 전 미국의 역사학자가 미국 사회의 미디어와 대중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저술한 《이미지와 환상》은 상당한 세월이 지났지만, 오늘날의 미디어 현상을 잘 설명해주는 개념 틀이다. 

 

언론은 흔히 세상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창문으로 비유되곤 하지만, 부어스틴은 뉴스가 언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실제가 아닌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뉴스를 포함한 미디어 이벤트와 콘텐츠가 기본적으로 ‘가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 주요한 뉴스로 전달되는 기자회견, 인터뷰, 여론조사 등이 대표적인 ‘가짜 사건’이다.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것’과 달리 인터뷰와 보도자료는 이해 관계자와 홍보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언론의 여론조사 보도는 여론을 독특한 실제의 현실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기사화된 여론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신비스러운 가짜 사건이라는 게 부어스틴의 견해다. 사건이 뉴스로 만들어져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기자와 언론사는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더 치중하게 되고, 이는 그 포장이 점점 더 극적으로 돼 사실을 덮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이 “뉴스의 기능은 사건을 두드러지게 하는 서치라이트”라고 말했지만, 역사학자 부어스틴은 한발 더 나아간다. 

 

“포장된 형태로, 흑백과 컬러로, 말로 대량생산되는 가짜 사건은 사회 전체 시스템의 산물”로 “현대인들이 미디어로부터 얻은 정보는 대개 가짜 사건으로 얻은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부어스틴은 “미국인들은 환상이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 그리고 이미지가 실체보다 더 위엄을 갖는 세상에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 가짜 사건은 자연발생적인 사건보다 더 재미있고 유혹적이다. 

 

현대는 ‘여행’이 ‘관광’에 의해 대체된 세상

 

보도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미디어 이벤트를 진짜로 여기도록 하는 게 가짜 사건의 특징이지만, 이는 비단 미디어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부어스틴이 여행(travel)과 관광(tour)을 대비 시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현대 대중문화와 자본주의 경제활동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숙박과 교통, 치안이 변변치 않던 지난 시절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행위는 부유한 계층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자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모험이었다. ‘여행’이라는 영어 단어 ‘트래블(travel)’의 어원이 고통과 수고로움을 뜻하는 라틴어 ‘트라바일(travail)’인 이유다. 그런데 부어스틴은 불안하고 위험한 모험으로서의 여행이 영국인 토머스 쿡(Thomas Cook)의 패키지 관광을 기점으로 ‘일정표대로 진행되는 안전한 관광(tour) 상품’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그는 고급 여행상품일수록 모든 일정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여행지에서 예정에 없는 돌발 상황이나 현지인 만남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운다고 지적한다. 한때 예측 불가능한 위험한 행위였던 여행은 모든 게 일정표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는 패키지 관광 상품이 됐고 그 덕분에 대중화됐다. 가짜 사건(tour)의 이미지가 실제의 경험(travel)을 압도하는 게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현실이다. 

 

이미지가 현실을 덮어 버리고 이미지 소비를 통해 실제를 경험했다고 여기게 만드는 현상은 디지털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60년 전 부어스틴이 바라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지고 보편화됐다. 잘 계획돼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사건은 실제 사건보다 훨씬 극적이다. 실감 나게 수용되고 기꺼이 향유된다. 우리가 왜 가짜뉴스에 취약한지를 알려주는 이유다. 

 

오늘날 탈진실과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현실은 명백한 거짓을 ‘대안적 사실’이라고 우기는 저질 정치인들과 여론 조작 세력 때문이 아니다. 케임브리지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 같은 비윤리적 데이터 가공업체나 돈벌이를 위해 왜곡정보를 방치하고 추천하는 소셜미디어 때문도 아니다. 부어스틴이 말하는 것처럼 미디어로 매개된 세상은 이미지가 실제를 압도하는, 가짜 사건이 진짜를 대체하는 세상이다.

 

또 다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탈진실과 가짜뉴스 현상에 대해 좀 더 거시적 설명 틀을 제시하며 부어스틴의 개념을 확장한다.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온, 탈진실의 종”이라며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라고 말한다. “1,000명이 조작된 이야기를 한 달 동안 믿으면 가짜뉴스이지만, 10억 명이 1,000년 동안 믿으면 종교가 된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은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 즉 개념과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신념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인류가 종교와 사상체계를 만들고 문명을 일구고, 정치와 사회 시스템을 이룩한 원동력이다. 이미지와 개념을 통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인지적 특성이 잘못 발현된 결과가  탈진실 현상일 따름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1981년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실을 ‘시뮬라크르(Simulacre)’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물이 시뮬라크르다. 부어스틴의 책과 이후의 철학적 논의는 오늘날 가짜뉴스와 탈진실 현상이 갑작스러운 등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가짜뉴스가 기술적 수단과 강력한 법적 처벌을 통해서 제거되거나 해결될 수 없는 성격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상이 진정성을 획득해 삶이 된 현실

 

가짜 사건과 시뮬라크르가 넘치는 탈진실 시대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책이 2019년 주영민이 펴낸 《가상은 현실이다》이다. 디지털, 모바일, 인공지능 기술이 보편화한 현실은 가상이 곧 현실인 세상이다.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기술로 인해 문자 그대로 ‘사라지는’ 경험이다. 가상이 더 이상 허구와 왜곡이 아닌, 또 하나의 생존 방식과 현실이 돼버린 게 오늘날 디지털 삶이라고 구글 마케터 출신의 주영민은 말한다. 소셜미디어는 실재와 모순되는 가상세계이지만 현대인들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현실과 다른 가상의 삶을 살게 한다. ‘세컨드 라이프’라는 명칭의 서비스처럼 소셜미디어에서의 두 번째 삶은 가상이지만, 허구는 아니라는 게 작가의 말이다. 이미지에 대한 집착과 가공도구는 만인에게 필터링 된 현실을 제공했으며, 디지털 도구를 통해 접하는 세상은 모든 것이 필터링 된 상태이다. 

 

대부분의 이미지가 필터링 된 상태인 인스타그램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TV가 광고와 뉴스 같은 사본을 만들어 내는 데 그쳤다면 인스타그램은 인류를 대상으로 개별 인간의 사본을 만들어 내는, 인간을 통째로 가상화시키는 혁명적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상품이 광고에 의해, 사건이 뉴스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처럼 현대인은 인스타그램에 지배당한다”라는 작가는 젊은 세대의 인스타그램 세상을 신조어를 통해 설명한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이라는 단어는 “인스타그램에 올리기에 안성맞춤인, 자랑하고픈 순간과 모습”을 의미한다. 의학 논문에 보고된 ‘셀카이형증(Selfie Dysmorphie)’은 소셜미디어의 필터로 보정된 외모에 맞춰 자신을 바꾸려는 성형수술 강박증을 의미한다. 과거엔 성형외과에 연예인 사진을 갖고 와 비슷한 외모로 수술을 요구했는데, 최근엔 인스타그램과 스냅챗 필터로 변형된 자신의 얼굴을 갖고 와 수술을 요구한다는 게 언론에 보도된 영국 성형외과의 사례다. 

 

가짜뉴스 또한 소수의 사악한 집단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가상이 현실인 사회의 기본적 속성이 되고 있다. 인터넷과 무한정보 환경은 만인에게 보편적 진리와 공통된 인식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반지성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로 이끌고 있다. 무한한 정보가 제 공되는 환경에서는 아무리 황당한 신념과 개념도 나름의 근거와 추종 집단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인터넷이 사실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 이제 모두가 합의하고 객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실’이라는 개념을 멸종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지를 사실보다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인지적 특성과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도구를 통한 정보 수용 현실에 대한 부어스틴, 하라리, 주영민의 견해는 오늘날 허위·왜곡 정보 현실에 대한 심층적 설명이다. 언론의 사실 보도행위에 대한 깊은 회의와 존재 가치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언론 종사자로서는 암울한 경험이다. 그러나 좋은 뉴스만이 아니라 나쁜 뉴스도 중요한 것처럼, 《이미지와 환상》과 《가상은 현실이다》는 우리에게 가짜뉴스 현상의 뿌리 깊은 발생 구조를 보여 주는 통찰을 전해 준다.


저자의 다른 미디어
  • 필자 : 구본권
  • 소속 :
  • 직함 :
  • 발행 : 2020-09-01
  • 조회수 : 35
  • 키워드 :
블로그 공유 트위터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