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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미디어》 존 더럼 피터스 지음 ©컬처룩
스캔들처럼 그것이 왔다. 처음에는 그저 또 유별난 놈이 우리를 다시금 시끄럽게 하려나 보다 했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의 통제하에 처리될 수 있는 불편한 그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이 바이러스는 하나의 생명체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물로 본다면 이 역시 미디어의 하나라 할 수 있을까? 인터넷이 우리의 시공간을 변형시킨다고 열광하던 것에 비춰보면, 이 바이러스만큼 최근에 우리의 일상과 삶에 존재론적 변형을 일으키고 있는 미디어가 있을까? 자연으로서의 이 바이러스는 그 어떤 미디어보다 우리의 시공간을 변형시키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 자체로 형용모순인 말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거리를 둬야 한다니, 사랑하면 멀어지라니 이 무슨 말인가. 우리가 사회와 문화의 기본적인 양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해왔던 수많은 미디어, 문자, 전신, 인터넷 등이 만들어낸 양상을 자연 미디어,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변형시켰다. 이 코로나 시대는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물만 미디어인가?’ 그리고 ‘인간만이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주체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 질문을 해결해 볼 실마리를 《자연과 미디어》는 던져주고 있다.
우리의 환경이 바로 미디어
《자연과 미디어》는 존 더럼 피터스(John Durham Peters)의 《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를 번역한 책이다. 역자가 밝히고 있듯 이 책의 원제목에 등장하는 구름은 중의적으로 해석해야 그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 우리가 아는 자연의 구름과 네트워크 시스템 그리고 데이터 클라우드의 구름이 중첩돼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은유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디어의 관점에서 아주 예전부터 우리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구름과 데이터 클라우드를 서로 밀접한 연결고리를 지닌 미디어로 파악한 것이 이 책이 견지하는 참으로 매력적인 지점이다.
피터스는 흔히 미디어를 인간이 만든 삶의 환경 일부 혹은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도구로 파악하는 생각에 정반대로 접근한다. 우리의 환경이 바로 미디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위 동료들로부터 ‘그럼 도대체 미디어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는데, 이는 《미디어의 이해》의 저자인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도 그의 동료들로부터 늘 받던 질문이기도 했다. 그 답은 ‘그런 것은 없다’에 가깝다. 미디어를 연구하고 생각하는 데 있어 동료들이 지닌 인간 중심적인, 근대적 시선은 지배적인 것이었다. 피터스는 이 책에서 사회·문화는 자연과 별개로 존재한 다는 이른바 근대성의 이분화 사유 양식과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미디어를 중심에 두고 그의 견해를 전개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책이 사회과학 학술서로 그리고 대중적 교양서로도 읽힐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는 참으로 용감하기까지 한 생각이다. 이 책을 대중적 교양서로 술술 읽어나갈 수 있으려면 그야말로 상당한 인문학적 교양을 지니고, 주류 미디어 이론을 벗어난 미디어 이론의 역사에도 정통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을 다 알아야 전체 내용이 이해되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 책은 깊이가 다층적이라 표면적인 이해부터 매우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한 내용까지 겹겹이 숨겨져 있다. 다만 그의 전체적인 뜻을 전달하는 데 이 모든 지식이 동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참으로! 다행이다. 쉽게 읽히지만 계속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은 그것만으로도 좋은 책의 자격을 충분히 갖춘 것이다.
자연의 요소와 인간의 가공물이 더해진 앙상블
이 책에는 미디어를 다른 관점 즉 ‘환경을 미디어로 인식하기’ 위한 재료로 구름, 고래, 별, 하늘, 나무와 흙, 불, 책과 페이스북, 구글과 클라우드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리고 저자의 통찰을 통해 이들이 신기하게도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연결은 때때로 문학적인 위트와 읽는 재미를 주는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많은 구절이 있지만 하나만 예를 들자. 이미 읽은 책과 아직 읽지 않는 책은 (무려) 존재론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우리가 이미 읽은 책의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두 책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학자들은 읽지도 않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문가라고 꼬집는다. 구글의 시대, 전문가들은 이제 이 존재론적 차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까?
주류 미디어학이 미디어를 사물이나 도구로 본다면, 그는 미디어를 존재의 양식으로 파악한다. 미디어를 자연적인 동시에 문화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신중한 변증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만일 미디어가 의미를 운반하고 전달하는 이동 수단이라면, 미디어 이론은 모든 가능한 의미의 배경이 되는 자연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디어는 자연의 요소(physis)와 인간의 가공물(techne)이 더해진 앙상블이다. 미디어를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디어학이라는 학문은 학문의 바탕이라고 했던 형이상학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야심찬 전망도 내놓는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는 디지털 미디어의 도래가 우리를 커뮤니케이션과 문명에 관한 근본적이고도 영구적인 문제로 돌려보낸다는 생각에서 출발함을 밝히고 있다. 유비쿼터스 컴퓨터는 우리에게 메시지에만 묶여 있지 말고 미디어의 자연(그리고 자연의 미디어)으로 눈을 돌리라는 초대를 건네고 있으며, 이 책은 그 초대를 수락한 결과물이다.
미디어는 언제나 바다와 땅과 하늘의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따라서 미디어학은 철학적인 인간학, 즉 인간의 조건에 대해 숙고하는 형태를 띠며, 이는 곧 비인간의 조건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 미디어학은 정신과 자연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거부하고 합류 지점을 찾을 수 있는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든든히 뒷받침하는 것은 같은 갈래의 사유를 다양한 소재와 영역에서 펼쳤던 학자와 소설가들이다. 하이데거, 듀이, 퍼스, 이니스, 매클루언, 멈포드, 키틀러, 라투르, 보르헤스 그리고 숨어 있는 플라톤과 하이젠베르크, 버클리 등 엄청난 학자들의 핵심 주장이 등장해 그의 주장에 훈수를 두고 있다.
신이 돼가는 구글
책을 펼치면 등장하는 서론에서는 자신의 접근 방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그다음 등장하는 제1장의 제목은 ‘미디어의 이해’이다. 마셜 매클루언의 가장 대표적인 책 제목이며, 이 장에서 등장하는 내용은 매클루언의 주장에 대한 변주와 박수로 보인다. 매클루언은 그의 책에서 미디어를 바라로는 시선의 근본적인 전환을 주장한 바 있는데, 피터스는 그 주장에 더해 환경을 미디어로 보는 시각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주류 미디어 이론들이 미디어를 인간의 목적을 위해 고안되고 사용되는 도구나 수단으로 볼 때, 매클루언은 미디어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를,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생산하는 조건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또한 이 책은 매클루언의 주장에만 같은 음조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이 책이 《미디어의 이해》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던지는 묵직하고 심도 있는 질문도 그러하고, 책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양식, 즉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철학, 문학, 역사, 과학에 관한 이야기와 학자들의 주장이 그러하다. 그런데 비록 그의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매클루언의 글이 독자들에게 엄청나게 불친절하고 난삽한 것과 달리 피터스의 글은 매끄럽고 읽기 쉽다는 점이 많이 다른 부분이다.
이후 이어지는 몇 개의 장에서 피터스는 바다와 고래가, 불이 그리고 하늘이 미디어로서 우리의 의미를 지탱하고 문화의 동력으로 작동한 과정을 보여주며, 그 모든 자연 미디어들이 우리의 존재 조건이며, 의미의 원천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하늘 미디어가 시간의 두 양상인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만들어낸 달력과 시계라는 미디어와 결합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문화의 융합체로서의 미디어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글쓰기 미디어는 올드 미디어로 사라지지 않고 최신 미디어에도 생생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며, 신과 구글을 연결한 장은 매력적인 동시에 그의 통찰이 더욱 빛나는 장이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e)”라는 버클리의 주장은 구글에서 명확하게 실현된다. 구글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태그되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구글이 한동안 중국 정부와 협업을 통해 구글차이나(www.google.cn) 검색 결과에서 민감한 콘텐츠가 보이지 않게 변경하기로 했을 때, 구글은 존재론적으로 작동했다. 문서에 없는 것은 세계에 없다. 구글은 미디어이고, 미디어는 존재론적인 효과를 지닌다. 구글의 목록에 걸리지 않는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창조하고 파괴하는 태그의 존재론적 권력은 구글 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과 구글은 모두 데이터를 수동적으로 캐는 광부다. 그들이 인식하지 않고서는 참새 한 마리 떨어지지 않고 클릭 한번 일어나지 않는다. 구글은 참으로 신이 돼가는 중이다.
뉴스의 생산 과정과 뉴스의 메시지가 해독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들이 어떻게 개입하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전통적인 미디어 연구들에서 견지하는 메시지 중심적인 시각에 기반을 둔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뉴스의 존재 조건을 재규정하고 의미가 발생하는 과정에 개입한다. 즉 뉴스, 해독, 소비라는 행위와 과정 그 자체를 규정하는 존재 조건으로 봐야 한다. 이 모든 새로운 미디어는 최근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과 별과 불과 흙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며, 우리의 의식에서 이런 연결과 융합의 흔적은 아주 선명하게 발견될 수 있다. 피터스의 책은 우리가 독서를 통해 메울 빈틈을 적절히 배치해 두면서, 이 흔적과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존 더럼 피터스는 국제적으로 미디어 역사와 철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저서와 논문으로 잘 알려진 저명한 학자다. 국내에도 많은 학자가 피터스 지도하에 논문을 쓰고 학위를 마친 바 있다. 그는 30년가까이 아이오와대 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가르치다 2017년 예일대로 옮겼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당대 석학 중 한 명인 피터스의 책은 그의 이런 배경과 명성에 비해 번역된 책이 없다. 그의 책이 번역하기에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방증일 것이다. 《자연과 미디어》는 그의 책 중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것으로, 지도 학생이었던 역자 이희은의 꼼꼼한 번역 덕에 우리는 그의 생각 근처에 가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고마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