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김동규 청년 활동가 <출처 – 필자 제공>
전화기 너머로 굵지만 앳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군가를 나이와 같은 지표로 특별히 대하는 것 역시 차별의 일종이긴 할 터나, 오로지 목소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상대의 ‘내공’과 ‘기색’을 잡아내기 어려운 전화 인터뷰였던지라 나도 모르게 그 젊은 기운에 이끌렸다.
김동규 활동가. 광주광역시를 기반으로 고등학생 시절부터 청년유니온 등 다양한 정치·사회단체에서 활동해온 인물이다. 2020년 12월에는 광주·전남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수여하는 민주언론상 대상을 받았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연재하고 있는 <명진고 저항자들>이라는 기획 기사 시리즈가 “지역에서 명진고 사태를 가장 적극적으로 집중 보도해 이슈를 주도해 지역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프리랜서 기자가 자신보다 거대한 권력과 사회 병폐에 용기 있게 맞서 싸우면서 공익에 기여한 부분”을 높이 평가한 결과다. 민주언론상 심사위원 문병훈 광주·전남 민주언론시민연합 고문은 이와 같은 선정 이유에 더해 “언론 범주를 더 넓게” 보려 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주요 언론사에 소속된 공채 기자의 활동을 위주로 저널리즘을 좁게 정의해온 관행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기성 언론인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언론상을, 그것도 대상을 받는다는 것, 어떤 느낌이었을까?
“준비를 했었는데… (웃음) 언론인을 (직업으로서) 꿈꿔본 적은 없지만, 제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어쨌든 언론의 영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큰 상을 정말 평범한 시민기자인 제가 받은 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동규 활동가의 민주언론상 수상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밥 딜런(Bob Dylan)이 선정되면서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일이었다. ‘음유시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고, 그의 작사 활동은 곧 작시 활동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에게 문학상이 주어진 것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은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자천타천 노벨문학상을 기대한 문학가들에게 가해진 충격은 절대 작지 않았을 터였다. 가뜩이나 위축되고 있는 순수문학 영역에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은 가수까지 침범하면 대체 우리들은 뭘 먹고 살라는 말이냐는 볼멘소리가 목구멍을 간질거렸음 직하다.
‘활동가’에서 ‘언론인’으로
속칭 ‘나와바리’ 의식이라면 그 어떤 직업군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기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시민기자’ 김동규의 민주언론상 수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일단 이번 수상 소식을 보도한 경우가, 몇몇 지역 언론 그리고 부분적으론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오마이뉴스를 제외하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필경 기성 언론인 대다수는 이 사안 자체를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딱히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 듯하다. 비교적 긍정적인 시각에서 이 사안의 의의와 전후 맥락을 자세히 보도한 경우는 언론비평지 미디어오늘이 유일했다. “기자 범위는 언론사 채용 시험을 통과한 여부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음을 미디어오늘은 정확히 짚었다.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한 걸음을 내디딘 김동규 ‘활동가’가 ‘언론인’의 영역으로 들어선 계기가 궁금했다.

“제가 원래 활동가로서 살아왔는데, 그러다 보니까 오마이뉴스에 아는 기자분이 계셔서. 그분이 제가 처음 활동할 때 저를 취재했던 분이시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제가 명진고(를 대상으로) 싸움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었는데, 한번 오마이뉴스 기사로 써보면 어떻겠느냐 제안을 주셨고, 세 편 정도 특집으로 한번 써보자 제안해주셔서 쓰게 됐고요. 지금은 11편 정도 썼습니다, 지금까지.”
요컨대 ‘사회활동가’로서 주목하게 된 이슈를 ‘블로거’로서 알리다가 ‘시민 저널리즘’ 플랫폼을 통해 더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는 창구를 가진 ‘시민기자’로 발돋움한 셈이다. 발단 됐던 명진고 손모 교사의 부당 해임은 광주 명진고 재단인 도연학원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던 검찰에 출석해 관련 내용을 진술했다는 이유로 치러야 했던 비싼 대가였다. 김동규 활동가는 명진고 사학비리를 세상에 알리고자했던 학생들의 온라인 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했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명진고 저항자들>이란 제하의 기획 기사를 써왔다. 그리고 이러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 덕분에 명진고 이슈가 주목을 받게 됐다. 2020년 국정감사에 도연학원 이사장이 증인으로 불려 나갔고, 해임됐던 손모 교사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서 해임 취소 처분을 받아 복직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꽤 아름답고 정의로운 결과다. 하지만 그런 결말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복직하면 자리도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학교 측에서) 교무실에 자리가 없다, 1층에 있는 체육 단련하는 곳에 대기를 해라, 이렇게 했고요, (…) 게다가 학교 측에서 행정소송을 진행할 수도 있어서, 복직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긴 합니다. (…) (복직) 인사하려고 교무실에 꽃과 떡을 보냈는데 그것도 방치돼 있었고요, 지금도 출근을 못 하고 계십니다. 학교가 아니라 지역 도서관에서 2021년 2월까지 자율연수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황입니다.”
단순한 공익제보도 아니고, 정식 검찰 수사에 응했던 내부 고발자에 대한 명시적 보복이다. 그러니, 현재 수준으로까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일등공신, 아니 학교법인 측 시각에서는 눈엣가시라고 할 수 있는 김동규 활동가를 그냥 놔둘 리 만무하다.
“현재 학교 측에서 저를 이제 형사소송을 4개 정도 진행했고요, 민사로 1억 손해배상 청구를 걸어둔 상황입니다. 형사 4건 중의 1건은 무혐의가 나왔고요, 1건은 아직 경찰에 있고 2건은 검찰에 있습니다.”
기시감이 드는 대단히 익숙한 광경이다. 권력과 돈을 가진 측이 그렇지 못한 저항자들에게 가하는 봉쇄 소송의 혐의가 짙다. 학생들과 연대해 학교 앞에 현수막을 걸었다고, 그리고 매체를 통해 사건을 알렸다고, 민·형사상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기성 언론사의 기자라면 이렇게 강하게 대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여 소송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회사라는 방패막이가 있었을 터라, 나름 억울하고 두려웠을 법한데, 돌아오는 답변은 의외로 담담했다.
“뭐 1억 소송도 이제 변호사분이 한 분이 지역에서 도와주셔서 지금 공판을 진행하고 있는데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민·형사소송이라는 게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사실 굉장히 압박감을 많이 받기는 했는데,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시고, 또 잘 검토해보니까 이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좋은 기자의 기준
이 대답을 듣고, 얼마 전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에 관련해 기성 기자집단에서 강한 반대 의견을 냈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와 같은 제도가 만들어지면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이 봉쇄 소송을 남발할 것이고 그로 인해 기자의 공익적 취재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취지였다. 관련 제도가 없는 지금도 온갖 소송에 휘말려서 일선 기자들이 점점 더 소극적인 취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터라,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결국 권력과 가진 자들의 치부를 폭로하는 활동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럴 위험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의지가지없는 어린 학생들과 초년 사회활동가-시민기자의 의연함에 비해, ‘언론 자유’와 ‘공익성 조각’ 그리고 ‘대항적 보도권’이라는 나름의 방패를 지닌 기성 기자들이 ‘위축’을 당연시하는 모습은 묘한 대비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문득, 김동규 ‘시민기자’는 ‘기성 언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특히 스스로 명진고 사건에 깊숙이 파고들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관련된 언론 보도에 대해 여러 생각이 있을 법했다.
“명진고 사건을 제가 계속 보도했는데, (해당 이슈에 대해) 다른 언론사도 똑같이 보도를 하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배포한 보도자료나, 성명서나, 저희가 낸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양산형 기사가 되게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알아보니까, 하루에 20개씩 기사를 써야지 네이버와 다음에 제휴가 되고, 뭐 이런 상황도 (있더라는 걸) 많이 듣게 되다 보니까 좀…. 뭔가 어쨌든 되게 기사의 질이 낮아지는 것도 있지 않나. 되게 (속칭) 우라까이(보도자료나 다른 기사의 재활용)도 많이 하고, 뭔가 비슷한 기사가 많이 나오게 되고. 조금 더 심층적인 취재나 분석을 제공하는 것도 많이는 못 본 것 같아요. 그래서, 물론 뭐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되게 훌륭한 기자분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또 아닌 것도 있구나 하는 그런 걸 많이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명진고 사건을 같이 보도해준 기성 언론사들도 대개는 포털 위주의 언론 소비구조에서 주어지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당사자들이 배포한 보도자료를 대충 엮은 채, 독자적인 취재가 보이지 않는 양산형 기사를 써내는 것에 불과하더라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명색이 직업적 언론인들인데, 죄다 그런 경우만 있었던 건 아니지 않을까?
“몇 곳의 기사… 이제 한겨레나 연합뉴스에서 이번에 보도한 기사를 보니까, 되게 자세하게, 좀 최근 사안이 아닌 것도 다 담아낸 걸 보고, 그래도 제대로 취재한 느낌이 들기는 했습니다. 관계자들이랑 통화도 많이 하신 것 같고, 그런 느낌을 좀 받기는 했습니다.”
옆구리 찔러 절 받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나마 기성 언론의 역량을 인정해주는 듯한 대답을 얻어내기는 했다. 그래도 좀 부족했다. 우리가 작심하고 쓰면 감히 너희가 우리 상대가 되겠냐’는 기성 언론인스러운 심사를 담아, 좀 더 ‘정식의’ 기사를 쓰면서 얻게 된 교훈 같은 게 없는지를 넌지시 물었다.
“브런치에 쓸 때는 어쨌든 공식적인 그런 게 아닐 수 있잖아요. 그래서 법적인 부분도 되게 걸리고 했었는데,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 기사를 쓰니까 훨씬 더 정갈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다든가, 뭔가 언론사를 통해서 하다 보니까 훨씬 (정제되는) 그런 게 있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 브런치는 조금 더 사적인 것까지 어쨌든 감정적인 내용이나 이런 주관적인 내용을 담게 되는데 (언론 매체를 통해) 기사를 (작성)하다 보니까, 조금 더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조금 더 팩트 위주로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유도신문처럼 끌어당기니, 흔히 정답(?)으로서 기대됨 직한 답이 그럭저럭 나왔다. 기세를 몰아 스스로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저는 오히려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아도, 어쩌다 보니까 훈련되긴 했는데, 이런 오랜 활동을 통해서 뭔가 기사도 많이 접하다 보니까, 그렇게까지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의외의 단호한 부정에 살짝 계면쩍어진 나는 일단 그냥 웃었다. 그리고 다시 돌려 물었다. ‘기성 언론인들은 이른바 시민기자 같은 분들이 무원칙하게 멋대로 기사를 써낸다는 인식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런 인식을 느끼지는 못했고요, 이번에 상 받으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앞으로의 언론이 좀 달라질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러한 기준을 넘어서는 언론이 더 많아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에게는 언론 영역의 경계인 혹은 소수자로서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이란 무얼까?
“공채를 일단 통과해야 하고, 또 학력도 어쨌든 중요하고, 그런 어떤 기자로서의 조건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그런데 꼭 그런 기준을 통과한 기자들이 제일 좋은 기자냐? 이렇게 물었을 때,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제가, 생각해봤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인으로 살아갈 것
인터뷰 당시의 어조와 음색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기에 부언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서 풋내 나는 청년의 건방짐 또는 아마추어적 착각, 심지어 민주언론상 대상 수상자로서의 자만 같은 것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사실 그가 언론상을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무려 고등학생이던 시점에 시작해서 6년간 운영해온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로 5·18기념재단과 광주전남기자협회가 주는 5·18언론상 뉴미디어 콘텐츠 부문 2019년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었다. 대상 수상 한 번도 결코 운일 수만은 없는데, 이쯤 되면 그에게는 영락없는 언론인으로서의 DNA가 내재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이 기사를 쓰면서 보니까 제가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더라고요. 예전부터. 그래서 언론의 영역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을 수 있겠구나. 사회 활동을 하는 것도 결국에는 뭔가를 알리고 시민들의 관심을 호소하는 거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조금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언론인을 언론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어려운 질문’이라면서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답을 했다.
“기존 언론인이나, 새로운 언론인이나, 똑같이, 어떤 사안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나 이런 것들이 제일 중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
진심. 맞다. 좋은 답이다. 진실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도구적인 태도로 대상을 허투루 대하지 않으려는 진정성. 하지만 언제나 맞는 말이기도 해서 좀 밍숭맹숭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혹시 그는 활동가 특유의 정의감으로 인해, 직업적 언론인에게 흔히 요구되는 냉정함과 객관성이 훼손되는 상황을 ‘진심’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요즘에는 그런 고민이 되게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왜냐하면 이 팩트라는 게 사실 그렇잖아요. 어쨌든 어떠한 주관이 아예 개입되지 않을 수 없는 거고, 어떤 언론사마다 또 성향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의 의미)도 생각하게 되죠. 또 명진고 사건 같은 경우에는 좀 되게 쉬운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어쨌든 선악구도가 명확하잖아요. 팩트들도 다 잘 정리돼 있어서, 보도하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어요. 하지만 다른 비슷한 사건을 만났을 때 고민하게 될 것 같아요. 내가 주장하는 건 이런 건데 사회적으로 볼 때는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고, 이 사건을 판단하는 잣대가 (나와는) 다른 판단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런 점에서는 되게 조심스러운 것 같기는 합니다.”
그는 ‘지역에서 정말 억울한 사건들’, 즉 선악구도와 사실관계가 비교적 명확한 사건을 다뤄온 자신이, 다분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일반적인 취재를 해야 하는 일선 기자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전문적으로 정리된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이해당사자 주도적(stakeholderdriven) 저널리즘’의 장점과 한계점을 비교적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그는 이 경계선 위에서 만약 선택이 필요하다면 그 장점에 입각하고 싶다는 의지를 명확히 했다.
“제가 어떤 언론 조직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면 잘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어쨌든 거기에서는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언론사가 원하는 것도 다 해야 되다 보니까. 또 그 상황 차이에서 언론사와 입장 차이도 있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지금 입장에서는 어쨌든 그런 게 없고, 자유롭게 쓰고 싶은 걸 쓰다보니까 조금 나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업적 활동가라고 불리는 데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여전히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고민이 깊지만, 직업적 안정성을 위해 언론사 조직에 들어가려 하기보다, 사회활동가로서의 문제의식에 바탕을 둬 정당한 언론 행위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현실 속의 저널리즘에 많은 함의를 던져주고 있는 그의 수상 소감 몇 구절로 젊은 그의 속 깊은 이야기를 대신해 본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3년부터 지금까지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언론은 저희가 보도자료를 배포했거나 무언가 퍼포먼스를 했을 때 저희를 다뤄주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명진고 사건을 비롯한 여러 활동들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언론의 영역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시민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해야 우리가,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길을 생각할 때, 저는 1980년 5월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1980년 5월 해방된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를 만들어 뿌리던 들불야학의 청년들을 생각합니다. 5월 27일,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도청을 지켰고, 소외된 모든 이를 위해 싸우는 벗이 됐습니다.
저는 비록 대학 진학도 포기했고, 언론사 기자가 되기 위한 공채 시험도 통과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그 도시의 열흘을 지켰던 윤상원과 박용준과 전용호가 그랬던 것처럼 언론인으로서 계속 광주를 살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