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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2.0》 ⓒ이마
2020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선거 제도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제기했다. 당선자는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로 결정됐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승복 거부와 권력 이양 지연, 이에 대한 지지층의 동조와 잇단 불복 소송 제기 등은 민주주의 제도와 관행이 확고하게 정착한 국가로 인식됐던 미국의 민낯을 드러냈다.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며 노골적인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극적이고 일탈적인 행동을 목도한 것도 놀랍지만, 진짜 충격적인 일은 따로 있다. 그러한 트럼프를 미국민 다수가 공감하고 열정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득표한 7,300만 표는 그를 당선자로 만들진 못했지만 바이든(7,860만 표)을 빼고는 역대 관련 기록을 모두 능가하는 수치다. 2008년 미국 대선 사상 최다 득표(6,950만 표)로 당선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보다 많은 득표이고, 4년 전인 2016년 대선에서 당선한 트럼프 자신의 득표(6,300만 표)보다 1,000만 표나 늘어난 결과다. 트럼프는 더 이상 리얼리티 방송으로 명성과 인기를 누리던 정치 신인이 아니었다. 그는 집권기 내내 허위 정보를 퍼뜨리며 기존 정치사회 시스템과 신뢰 체계를 조롱하고 무력화시킨 인물이었다. 첨단 의료 기술의 국가를 코로나19 최다 감염자, 최다 사망자의 아수라장으로 만든 장본인임에도 트럼프에 대한 미 국민의 지지는 뜨거웠다. 선거 결과, 트럼프는 지금까지 미국 공화당 정치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역대 최대의 대선 득표력을 지닌 정치 지도자임을 확인시켰다. 2020년 미국 대선은 당선 결과보다 훨씬 중요한 현실을 드러낸다. ‘트럼프 현상’은 일시적이거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뿌리가 깊고 광범한 ‘진실의 단면’이라는 점이다.
한국에도 해당되는 ‘비이성의 정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뉴욕대 교수는 대선 이후 “트럼프주의는 지속된다. 국민 마음속 뿌리 깊은 분노를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감정의 정치’ 즉 비이성의 정치는 미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한국 사회도 알고 있다.
‘감정의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부제를 단 조지프 히스(Joseph Heath)의 《계몽주의 2.0》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이다. 북미에서 하퍼앤콜린스를 통해 2014년 출판됐고 국내엔 2017년 김승진의 번역(도서출판 이마)으로 소개됐다. 저자 조지프 히스는 캐나다 토론토대 철학과 및 공공정책 거버넌스 학부에서 정치철학과 비판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다. 위르겐 하버마스(J rgen Habermas)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로, 하버마스의 영향이 짐작되는 《의사소통행위와 합리적 선택》 등의 저서가 있다.
책 제목 《계몽주의 2.0》은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게 하고 개념어로 가득한 철학 서적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책의 내용과 구성은 겉보기와 사뭇 다르다. 영어 원서의 부제가 책의 내용을 잘 나타내준다. 부제인 ‘어떻게 우리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 인생에 제정신을 되돌릴 것인가(Enlightment 2.0: Restoring Sanity to Our Politics, Our Economy, and Our Lives)’라는 질문을 충실하고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다룬 책이다. 뇌과학, 인지심리학, 진화심리학과 행동경제학적 접근을 통한 풍부한 사례와 연구 결과를 다루고, 다양한 학문 간의 영역과 방법론을 넘나들며 현실적인 대안까지 모색한다. 망가져버린 오늘날의 사회와 개인의 사고 및 판단 시스템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인데, 저자의 문제의식은 본질적이고 접근법은 방대하고 치밀하다. 오늘날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본질을 추출해내는 능력과 다양한 학문 영역과 역사를 종횡으로 넘나들며 근거를 가져오는 논리 구성력은 석학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덕분에 《계몽주의 2.0》 한 권으로 인간 이성의 합리성과 유용성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참고서적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의존하고 절대시해온 인간 이성의 특징과 한계를 드러낸다. 계몽주의와 근대 합리주의 이후 인류는 인간 이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확장과 의존이 저절로 강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의 문해력과 교육 기간이 역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하고 누구나 손안의 정보 확인 도구를 통해 진위를 그 자리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세상은 일찍이 없던 ‘탈진실의 시대’가 됐다. 미국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가 2005년 저서 《개소리에 관하여(On Bullshit)》에서 “다들 잘 알고 있듯이, 현재 우리 문화가 보이는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대로다.
사실보다 다수의 믿음이 중요한 시대
정보화 시대에 진실이 허위조작정보에 밀려나는 상황에 대해 히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가 믿는 것이 무엇이냐가 실제로 사실인 것이 무엇이냐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뉴욕대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가 “사실이 자신의 가치와 충돌할 때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고수할 수 있고 반대 증거를 기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고 말한 대로다. 인공지능 시대에 백신 유해론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지구 평면설 신봉집단이 세력화하는 상황은 모든 정보가 접근 가능해진 정보화 사회가 오히려 반이성을 촉진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정보화사회에서 인간은 깊이 생각하고 차분하게 판단하는 기능을 버리고 동물처럼 순간적으로 반응하고 본능과 감정에 더욱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우려와 비판은 니컬러스 카(Nicholas Carr,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나 더글러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 《현재의 충격》), 마크 바우어라인(Mark Bauerlein, 《가장 멍청한 세대》) 등의 정보기술 비평가들이 일찍이 제기해 온 지적이다. 소셜미디어의 필터버블, 에코 챔버, 확증편향 등의 효과가 이용자들을 각자만의 정보에 탐닉하게 만들어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토론과 의견 수렴을 어렵게 만드는 현실은 만인이 실감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에 인류 다수가 ‘정신줄’을 놓게 만든 주범으로 소셜미디어 알고리즘과 기성 정치 세력에 대한 반감이 소환되지만, 이 분야를 다뤄온 철학자들에 따르면 연원은 훨씬 깊다. 보스턴대의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는 《포스트 트루스》에서 탈진실 현상이 정보화 시기 이전부터 과학부인주의,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성장해왔음을 철학사와 과학사 연구를 기반으로 논증했다. ‘가짜뉴스’ 유행어 등장 이전인 2014년 저서지만 히스는 《계몽주의 2.0》에서 좀 더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한다. 인류가 당연시하고 절대화하다시피 해온 인간 이성, 합리성이라는 개념이 매우 취약하고 부실하며 그리고 우연의 결과일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기존의 계몽주의는 이성과 합리성을 신봉해 왔지만, 인간 이성은 신화일 뿐이라는 주장은 진화심리학을 통해 근거를 얻는다. 《소셜 애니멀》의 저자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우리가 합리적, 이성적 사고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정교한 자기기만”일 뿐이며 “우리 의사결정을 실제로 추동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본능, 도파민 수치, 페로몬 흔적”으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편견과 편향들의 묶음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7~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 이성의 절대성과 무오류성을 확신했다. 계몽주의는 인간에게서 편견과 미신을 걷어내면 자연스럽게 이성의 빛이 그 자리를 비추고 이성은 후퇴하거나 미끄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인간 이성은 지적 존재(신)가 남긴 직접적인 흔적이라고 보고, 인간 이성도 신처럼 완벽한 통합성, 질서, 순수성, 선함을 가졌다고 여겼다. 이성을 신봉한 합리주의자들은 인간 정신이 수행하는 모든 것을 이성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고, 기존의 전통, 권위, 직관을 모두 이성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사회계약론이 부상했고, 나아가 혁명의 추동력이 됐다.
저자는 보수가 진보보다 인간 본능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조너선 하이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합리주의 비판을 가져온다. 인간 이성의 힘을 신봉하는 진보주의자들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는 얘기다. 근대 보수주의의 출발점도 이성을 과신한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헤겔이 “실재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한 대로, 불합리해 보이는 것도 존재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18세기 영국 정치인으로 보수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성공적인 제도는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사회공학적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탈진실 세대’에 ‘제정신’ 찾기
저자는 이성을 과신한 사회계약론과 합리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의 통찰과 비판을 수용하지만, 이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 이성의 특성과 영향력을 깊이 탐구해 계몽주의와 같은 이성에 대한 오해와 과신을 벗고 실질적인 이성 작동법을 제시한다. ‘제정신을 찾을 길’은 달리 말하면 ‘이성 회복’인데 이는 이성을 강력 신봉하는 게 아니라, 인간 이성의 취약점과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때 가능하다. 책의 제목이 《계몽주의 2.0》인 이유다.
히스가 ‘계몽주의 2.0’ 프로젝트를 위해 불러오는 수단은 진화심리학과 인지심리학의 성과를 기반으로 한, 인간 이성과 본능(직관, 감정)의 작동 구조에 대한 이해와 활용 방법이다. 18세기 합리주의 시기와 비교해, 현대는 뇌과학과 사회적·심리적 실험과 연구를 통해 인간의 본능적 속성에 대해 한결 깊은 이해를 갖게 됐다.
뇌과학과 인지과학의 발달은 뇌가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한 절대적 능력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 뇌는 ‘합리적 사고’를 위해 고안된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오랜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취득하게 된 ‘부산물’일 따름이라는 인식은 인간 이성을 활용하는 법도 바꿨다. 심리학자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의 행동경제학적 연구 《생각에 관한 생각》은 인간의 사고와 판단 과정에서 감정과 이성이 작동하는 이러한 구조를 잘 설명한다.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이성은 진화가 만들어낸 병렬적 하드웨어 위에 비효율적으로 장착한 순차처리 가상기계”라고 말한다.
저자는 계몽주의가 전제한 이성의 절대성과 천부성을 포기하고, 이성의 한계와 우연성을 끌어안으며 새로운 이성 활용법을 구축하고자 한다. 인간이 탁월한 이성을 갖고 있지만, 이는 불완전하고 여러 편향의 영향을 받는다. 더욱이 인간은 ‘인지적 게으름뱅이(cognitive miser)’로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회피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이성은 감정과 직관에 의존하는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최선의 능력이지만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다.
진화심리학적 연구는 이성을 활용한 인간의 사고와 판단 기능이 지적 설계자에 의해 논리정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인간 이성은 오히려 그때그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게 확인되면서 임시변통의 ‘땜질’ 형태로 진화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리 마커스(Gary Marcus)가 《클루지》에서 다룬 내용이다.
저자가 오늘날 ‘탈진실 세대’에 ‘제정신’을 찾게 해주자는 ‘계몽주의 2.0’ 프로젝트의 핵심은 인간 이성이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만큼 이성이 최대한 활용될 수 있도록 환경을 새로 설계하고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합리적이어서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처럼 합리적 사고를 필수 요건으로 하는 상황이 이성적 사고를 사실상 강요하는 환경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 두뇌의 탁월함은 논리적 추론 능력이나 계산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 일부를 조작해서 인지 시스템과 동기부여 시스템의 일부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라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우리가 교육제도를 만들고, 각종 법률과 보상·처벌 시스템을 만들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환경 조작(개입)을 통한 인지 시스템 개선 시도다. 거짓 정보가 난무하는 탈진실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또한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와 정보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제정신 찾기’의 최선임을 저자는 알려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