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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서울 제기동 미나리밭 가운데에 마련한 집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는 리영희 선생 Ⓒ리영희재단
리영희. 얼룩진 한국 언론사에서 그리고 근대 한국 지성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 격동의 1980년대를 살아온 많은 이들로부터 ‘사상의 은사(恩師)’로 추념되는 그는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이들이 사표로 삼을만한 탁월한 언론인으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지속적으로 소환되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리영희를 만날 수 없다. 그와 이야기하려면 그를 기록한 매체와 대면하는 수밖에. 그래서 그의 딸 이미정 리영희재단 이사와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이의 삶에 관련된 대담을 나누는 일이(아무리 유명한 인물이고 그것이 마침 부친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내심 걱정이 없지 않았다. 리영희의 딸로 산다는 것, 그리고 리영희의 딸로서 말해야 한다는 것, 그리 행복한 일이기만 할까?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다분히 이상화되기도 하는 부모를 가졌을 때 그 유산은 도움일 수도 있지만 장애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렇죠. 저 사실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웃음) 창피해서 못 한 거지. (…) 한국일보에 김영백 기자인가…, 이름도 기억이 나는데, 사건기자가 쓴 책이 있었어요.1) 제가 중학교 때 그 책을 봤는데, 너무 재미가 있는 거죠. 강원도 어딘가에 무슨 사건이 나서 차를 몰고 갔다. 별안간 차가 퍼져버렸다. 궁리 끝에 자기 팬티 고무줄을 풀어서 그걸로 차를 다시 움직이게 해 현장으로 가고 이러는 내용. (기자라는 직업이) 정말 재밌겠다 싶었죠. 자기가 뭔가를 발견하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거잖아요. 좋아했죠.”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하필 아버지가 유명한 기자였고, 또 하필 서슬 퍼런 성격의 소유자였던 게다. 비교당하기 싫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쏟아질 냉정한 비판을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저는 결혼하고 나서야 제가 그동안 사람 관계를 프렌드십(friendship) 하나로 생각해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진짜 우리 집안 분위기가 그랬거든요. 아버지는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안팎으로 일관된 모습을 지닌) 아버지 그 자체였던 것 같아요. 그냥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가 프렌드십이었던 거죠. 남편이 그랬어요, ‘당신 집에 어른은 어머님밖에 없다. 나머진 다 초딩, 중딩, 고딩.’ 아버지랑 제가 무슨 ‘딩’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웃음)”
자녀에게만은 유난히 살갑거나 반대로 유독 더 엄격하게 마련인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그냥 다 똑같이 엄격할 때 엄격하고 따뜻할 때 따뜻했던 리영희라는 한 ‘인간 동료’의 모습이 비쳤다. 그래서일까, 이미정 씨는 대화 속에서 리영희 선생을 지칭할 때 ‘아버지’라는 관계적 표현보다 ‘그 사람’ 혹은 ‘이 사람’이라는 지시적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통상적인 딸이라면 아니 할 말로 ‘아빠가 뭐 이래?’라고 불만을 품었을 법도 하다.
“어떨 때는 우리를 굉장히 힘들게 했죠. 왜냐하면 자기는 40살이고 우리는 10살인데 이 10살짜리 애를 그냥 자기 친구 대하듯이 하니까. 그런 게 힘들기는 했지만, 좋은 것도 있었어요. ‘너는 내 딸이니까’라든가 ‘너는 누구의 동생이니까’ 뭐 이런 거로 사람에게 (어떤 규격화된 행동을) 요구하거나 이런 적은 진짜 없거든요.”
이미정 씨 스스로도 결혼을 하고 나서야 가족이란 게 이렇게 “딱딱한 공동체”라는 걸, 즉 서로 바라는 게 많고 해줘야 할 것도 많은 관계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고 하니, 그가 겪었던 힘듦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가 아버지처럼 굴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온전한 친구가 되기에는 상당 부분 ‘체급 차이’가 있었던 시절의 어쩔 수 없는 단편이 아니었던가 싶다.
“(가족들끼리) 불안불안 했죠, 진짜. 저랑 싸울 때도 그랬는데, 붙으면 열전이니까, 이 사람들은. 붙으면 열전이야. 냉전 이런 거 없어. (웃음)”

‘거죽 쓰고’ 사는 사람 말고, ‘자기로’ 산 사람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한 열정적인 반대와 치열한 논전. 그 상대가 권력자든 아니든, 가족이든 아니든, 그리고 심지어 체급 차이가 나는 상대이든 그렇지 않든. 사뭇 리영희 선생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말하면 (그분에겐) 엘리트 의식 같은 게 있었어요. 하지만 그 엘리트 의식이란 것도 한 번 더 껍질을 벗겨 봐야 되는데, 그게 높은 수준의 지식이나 그런 것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자기한테 제기된 문제를, 자기식으로 읽고, 판단하고,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자,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이었던 거죠.”
앞서 리영희 선생 ‘답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즈음에서 우리가 흔히 품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에 대한 반격이 들어왔다.
“저도 뭐 다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가 같이 살면서 느꼈던 리영희라는 사람에 관련된 감흥하고,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혹은 유통되는 이미지가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제가 요새 리영희재단을 통해 아카이브 작업을 하면서 자료를 모으는데, 그걸 쭉 정리하면서 보니까, 제가 갖고 있는 느낌이랑 맞아가는 게 있어요. (사람들이 아는 것과 제가 아는 것 사이를 꿰는) 리영희의 면모 그런 거. 그래서 참 재밌어요.”
어떤 점이 차이로 느껴졌고, 어떤 점에서 일치되는 것이 확인됐단 말일까?
“돌아다니는 리영희의 이미지란 건, 오로지 ‘정의’, ‘진실’이라든가 굉장히 ‘계몽주의’적인 모습이죠. 그것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만 우상화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그런 모습을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냥 거기에만, 표현된 그 글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그 글이 만들어진 맥락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정신, 그걸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러니깐 스승만 못한 거죠. 제자들이.”
실제로 리영희 선생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심상은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참된 언론인이자 꼬장꼬장한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에 가깝다.
그것을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예컨대 중국식 사회주의를 좋게만 묘사하고 문화혁명의 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거나 입을 닫아버린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선다.
“단독적이고 독립적인 어떤 개인, 그래서 자유로운 개인, 그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대, 정말 이걸 꿈꿨던 사람이거든요. (…) 이를테면 중국식 사회주의 이런 걸 이상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가능성을 거기서 봤던 거죠.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귀고 그런 관계를 정말로 열망했으니까. (…) 내가 만약 학자라면 (단순히 누군가가 던진 이야기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공부를 해봐야 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답을 얻어서 다른 이에게 전하는 거죠.”
리영희 선생을 ‘사상의 은사’로 숭상했던 사람들 가운데, 이를테면 ‘당신이 한 말을 따라 이 길로 들어섰다가 망한 거 아니냐, 그러니 당신이 책임져라’는 식으로 투덜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가 보다. 그때 리영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너더러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 네가 직접 가서 네 눈으로 보고 너 스스로 판단하는 거다.” 요컨대 리영희의 저널리즘은 ‘내가 진실을 찾았다. 그러니 내가 정의다. 나를 따르라’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독자로서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눈으로 최대한 당대의 진실을 찾아나서야 하고, 그것을 또 다른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두고 검증해나가야 한다는 전언이었던 셈. 듣고 보니, 흔히 회자되는 리영희의 육성,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애국 이런 거 아니야. 진실이야”라는 말의 진의, 그리고 사람 관계를 오로지 ‘프렌드십’의 관점에서 일관했다고 하는 리영희의 됨됨이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이런 면모가 투영된 지향을 굳이 이름 짓고자 한다면, (현실)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합리적 공동체주의’라고나 할까?

“맞아요, 맞아요. 그래서 굉장히 친구 범위가 넓었죠. 남해에서 배 타며 낚시하는 사람, 딴따라라고 불리던 사람들… 그 사람들하고 편지 왔다 갔다 하면서, 참 사람한테 정성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거죽 쓰고’ 사는 사람 말고, ‘자기로’ 사는 사람 있잖아요. (…) 반면에 가짜는 싫어했어요. 네가 네 말로 네 이야기를 하면 좋은데 네 입으로 남의 말을 한다든가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한다든가 이러면, 아주 그냥 사람을 민망하게, 아주 민망하게 몰아붙였죠. (…) 이 사람은 그냥 생래적으로 굉장히 빡빡한 사람이어서 일단 (가짜라는 판단이 들면) 몰아붙였다가, 또 그 상대가 무언가를 말하는데 그것이 합당하면 바로 다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이러는 식이었어요.”
부조리한 것, 흉내 내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지만, 자신의 그러한 비판에 대해 ‘말이 되는’ 대답을 하면 이내 수긍을 하는 합리주의자였던 셈인데, 실상 합리주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종종 걷는 길은 ‘듣고 보니 네 말도 옳다’는 식의 ‘코스프레 합리주의’거나 자신의 합리성만을 최상의 것으로 고집하는 권위주의일 경우가 많다. 리영희에겐 그런 게 없었을까?
“할아버지 일기장에 ‘내 아들이 팍팍하고 속이 그래서 얘가 참 제대로 살지 걱정이다’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고 아버지가 말하더군요. 본인도 알았던 거죠. 본인도 그 문제를 알고 있었으니 굉장히 불편했을 것 아니에요. 오판의 가능성, 그리고 (그런 오판에 근거를 둬서 사람들에게 모질게 대하는) 문제를 어떻게든 극복해서 더 나아지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감옥에 가서도 불교 등 종교에 관련된 책을 깊이 읽었어요. 제대로 길을 찾으면서 갔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애를 썼다는 걸 알아요.”
자아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연결돼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저널리즘
오로지 진실에만 관심이 있는, 이성을 통한 우상 타파에 매진했던 서슬 퍼런 계몽주의자로서의 리영희이기보다, 자신의 오판 가능성에 대해 늘 고민했던, 그리고 팍팍한 성정을 넘어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했던 리영희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된 것 같아 신선했다. 어쩌면 리영희로 대변되는 저널리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고도의 지성과 용기를 지닌 선민적 저널리스트들이 남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진실을 발굴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이성과 정의의 왕국으로 이끄는 저널리즘이기보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나의 방식으로 각자의 진실에 다다르려 노력하는, 가짜가 아닌 참 자아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서로 연결돼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저널리즘.
“신홍범 선생이 해주신 얘긴데, 조선일보 시절 선배였던 당시 리영희 부장이, ‘글을 쓰려면, 앞만 보면 안 되고, 옆도 보고 뒤도 봐야 되고, 깊이까지 봐야 된다.’고 말했다더군요. 저는 리영희가 한마디로 ‘문필가’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 사람은 글을 어떻게 쓰려고 했던가? 예를 들어 글을 써놓고 그걸 말로 읽어 봐서 (어딘가) 걸리면 글을 바꾸는 사람이었어요. 제 이름이 왜 ‘미정’인지 아세요? 제가 태어난 날에 달력에다가 동그라미를 치고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아서) ‘미정’이라고 써놓은 거예요, 진짜. 그러다가 날이 계속 가면서 ‘뭐라고 지을까?’ 하며 달력 동그라미를 쳐다보다 ‘미정…, 미정…, 괜찮네.’ 그러면서 그다음에 그에 적합한 한자를 찾은 거거든요. 소리가 먼저였고 (글이나 뜻이 그 뒤를 따르는) 그런 식이었죠.”
그렇다면 그런 문필가 리영희로부터 (사실상 고전적인 문필가 지식인으로서의 언론인이 되기는 여러모로 어렵고 불가능하다시피 한 여건에 처해 있는) 후대의 저널리스트들이 무엇을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리영희 선생의 책) 《대화》가 출판되고 나서 누군가와 인터뷰를 했는데, ‘마지막으로 젊은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했더니 ‘이 책을 읽으면서 너를 거기에 갖다 놓아봐라. 그래서 나와 다른 어떤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지 (따져가며) 한번 그때그때 자기를 (그 시간과 장소에) 갖다 놔주기를 바란다’고 (리영희 선생이) 그런 적이 있어요.”
요컨대 누군가의 경험이나 주장을 그대로 습득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모의 실험해보라는 이야기이다.
“(리영희 선생의) 필화 사건이 몇 가지 있거든요. 그 필화 사건을 놓고 그때 다른 매체들은 어떻게 썼는가, 그때 전체적인 나라 상황은 어땠고 그런 똑같은 조건에서 (필화 사건을 겪은 리영희와) 다른 이들은 어떻게 (달리) 썼는가, 이런 식으로 접근해보면 좋겠다 싶어요.”
리영희재단을 통해 해보고 싶은 저널리즘 교육이 있다면 바로 그런 거라고 이미정 씨는 말했다. 그러면서도 리영희재단의 언론 사업 분야를 자신은 잘 모르고,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더 전문적인 역량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리영희재단을 매개로 이미정 씨 자신이 더 역점을 두는 분야는 남북관계다. 리영희의 유산은, 혹은 평생을 바쳤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이 있어 후대가 그 뜻을 이어주길 바라는 분야는 크게 저널리즘과 남북문제로 대별된다. 이미정 씨가 전해주는 말의 행간을 감히 짚어본다면, 전자의 상속인들, 즉 그 유지를 잇겠다고 나선 이들은 많다. 그러나 후자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저는 어렸을 때, 동네에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나 이렇게 (등을 굽히며) 구부정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마치 이북에 가족이 있는데 못 만나고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다니고, 이랬던 것 같아요. 이제 (우리 사회에) 그런 정서는 없죠. 그걸 요구할 수도 없는 거고요.”
한 인간을 밀도 있게 보는 일
주지하듯, 리영희 선생은 평안북도 출신의 실향민이다. 대개의 이북민들은 북한의 사상적,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남하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북한 체제와 경쟁하는 남한 사회에서 뿌리 내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더 선명하고 또 격렬하게 반북과 반공 전선에 앞장섰다. 반공반북이라는 이념적 우상을 타파하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의 식견과 실천은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 인식론을 넘어 실존주의적 색채를 띤다. 이미정 씨와의 대담 속에서 주로 ‘그 사람’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이즈음에서 ‘아버지’로 바뀐다.
“아버지가 남북 군사 능력 비교에 관련된 글을 쓰고 나서, 자기는 더 이상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랬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자료를, 몇백 페이지를 뒤져서 겨우 몇 줄 건져내며 쓰는 이런 작업을 혼자 하는 거였잖아요. 어디에 속해 있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못하겠다’라고 한 그걸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 왜 남북관계를 남한의 생존 조건 중 하나로 고려하지 않을까라는 게 항상 의문이에요. (…) 그렇다면 일반인의 시각에서 하나하나 질문하고 대답을 해보는 거죠. ‘남북관계에 이렇게 군사비가 많이 들어가는 조건을 우리의 생존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고 구체적으로 답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진짜 통일없이 평화가 가능할지도 좀 더 밀고 나가 고민해 보자는 거죠.”
아버지 리영희의 유산 가운데 언론 문제는 능력 있는 분들이 많이 나서서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좋은 글을 써내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했으면 좋겠고, 그보다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 남북문제는 일반인들의 냉소와 현실주의를 딛고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답을 찾아보고 싶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리영희의 딸이 아닌 인간 이미정으로서 정말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아카이브 작업을 더 잘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리영희의 면모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리해서 원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다 와서 볼 수 있고, 원하는 사람들이 다른 식의 리영희 평전을 쓰든 뭐 하든 그런 거. (…) 예를 들어 (지금까지 남겨진 저술과 기록) 그것에 잘 담겨 있지 않은 한 가지는, 이 사람은 굉장히 놀기 좋아했다는 것, 정말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의외로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
리영희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 외에 단독자 이미정이 하고 싶은 것을 물었더니, 리영희 아카이브를 이야기한다. 유산을 계승하는 것 이전에 유산 자체를 더 제대로 정리해서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해 자신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재생산했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게 딸로서 더 많이 혹은 더 달리 알고 있는 ‘아버지의 일’이라서 그런 걸까?
“저는 얼마나 민망하겠어요.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자기 아버지에 관한 것을 하는 게 정말 민망해서 굉장히 불편한 시절을 겪었어요. 하지만 이 재단 일을 하면서 특히 그게 좀 나아졌어요. 사실 아버지는 재단 같은 걸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 행여나 자기 이름을 걸고 돈 내라는 이런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요. 그래서 정말 절대로 안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하려고요. (…) 재단은 생겨났고, 이제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재단은 사회적 단위고, 사회적인 의미가 있고, 나를 떠나서, 나와의 어떤 관계를 떠나서 리영희라는 이름에는 가치가 있다고, 그래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제는 (아버지에 관련된) 말도 좀 잘해요. 이런 인터뷰도 전 같았으면 턱도 없었겠죠. (웃음)”

단지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아니 할 말로 ‘꽤 써먹을 만한 유산’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가 있는 일로 받아들여져서 진심으로 ‘하고 싶게’ 됐단다. 사실 ‘리영희재단’이라고 부르지만, 흔히 예상하듯 리영희 선생이 남긴 사재(私財)나 외부에서 끌어온 돈줄을 깔고 시작된 일이 아니다. 사무실도 없는 이 재단(財團: foundation)에는 유형자산(財)이 뚜렷하지 않고 금전적 바탕(foundation)도 없다. 오직 있다면 그가 남긴 기록과 정신,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들의 네트워크라는 무형자산이다. 그리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진심으로 그것을 사랑하고 아끼게 된 이미정이 남았다.
“한 인간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있고…. 제가 좋아했던 것 같아요, 리영희라는 사람을. 많이 좋아했었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무지하게 싫어하기도 했죠. 진짜 우리는, 아버지하고 싸우면, 진짜 주먹질하고 싸웠거든요. 제 동생이 뒤에서 끌어안으면서 말리고. 동생 일기장에 보면, ‘우리 집은 말이 안 된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웃음) 아버지가 자신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저한테 보였을 때 굉장히 화를 내셨던 것 같아요.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일인데요, 저한테 또 뭐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막 뭐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진짜 우시면서, ‘너무 고맙다. 내가 너한테 사과할 기회를 줘서 너무 고맙다.’ 그러시는 거예요. 저는 그런 인간이 참 좋거든요.”
이 대담에서, 또 리영희재단을 매개로 하는 아카이브 작업을 통해 이미정 씨가 전하고자 했던 ‘리영희의 면모’를 이처럼 선명하게 압축시켜주는 일화가 또 있을까. 자신이 하는 “아카이브 작업은 ‘한 인간’을 굉장히 밀도 있게 본다는 면에서 관심이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이라고 했다. 이 말속에서 언론인 리영희 너머의 인간 이미정이 서로 중첩돼 보였다. ‘친구’로서 다투고 사랑했던, “매력 있는,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닮은꼴의 ‘두 인간’이.
1) 실제로 《사건기자》라는 책은 1977년에 까치글방을 통해 발행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