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나에게는 자식으로서 아버지께 해드릴 마지막 과제가 있다. 이는 아버지의 삶을 정리하고, 아버지의 참된 삶과 정신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000년 3월. 병상에 누운 송건호 선생을 간호하던 장남 송준용 씨가 적은 글이다. 민주언론시민운동연합이 발간하던 격월간지 《시민과 언론》에 실렸고, 2018년에 발간된 《청암 송건호》에 다시 전재됐다. 2001년 12월 21일, 송준용 씨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로부터 딱 20년이 흐른 즈음 그를 만났다. 송준용 씨는 송건호 선생을 기념하는 청암언론문화재단의 상임이사로 그 20년을 보냈다. 송건호 선생의 ‘참된 삶’을 정리하고 그 ‘정신이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보낸 시간이다.
“이게 제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건 아니거든요. 가족이 할 수밖에 없고.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하자, 무리하지 말고. (…) 그래서 여태껏 오게 된 거고, 앞으로도 그냥 살아있는 한은 이 정도까지만 유지하자, 이게 목표예요.”
사람들은 무슨 ‘재단’에 상임이사를 한다고 말하면, 돈깨나 ‘깔고 앉아’ 번듯한 사업을 벌이지만 딱히 바쁘거나 힘들 것도 없는 한직(閑職)을 떠올린다. 말마따나 ‘재물 덩어리’, 재단(財團) 아닌가. 그러나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이들을 기념하는 재단의 현실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 부귀영달을 거부하고 나섰던 저항의 길에서 후손에게 남겨줄 만한 물적 유산을 축적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고 그와 함께했던 이들 역시 거금을 희사할 만큼의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게 일반적이다. 송건호 선생을 기리는 청암언론문화재단 역시 다르지 않다. 어쩌다 보니 꼬장꼬장한 아버지를 갖게 됐을 뿐인 장남 송준용 씨에게 떨어진 몫이었다. 송건호 선생이 잊히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몇몇 사람들의 헌신, 그리고 송건호 선생이 초대 사장을 맡았던 한겨레의 지원 덕에 송건호 선생 사후 20년을 ‘무리하지 말고’ 기념해올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투사 같지 않던, 자상한 아버지
“제 아버님은 전혀 ‘투사’ 같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보면 너무 정직해서, 고지식하다고 할까. 남들이 보면 좀 어리숙하다고 할까. 그러니까… 경제적인 면 이런 것들에서 상당히 어리숙하신 면이 있었어요. 또 자애지정(慈愛之情)이 매우 많으셔서 (저희 어릴 적에 찍어주신) 사진도 많아요. 저희가 육 남매인데 애들 데리고 옛날에는 동작동 국군묘지라고 불렀던 곳(지금의 국립현충원 근처에 있던 산과 계곡)에 매주 가시고. 산에도 애들 꼭 데려가고.”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 투쟁을 상징하는 강건한 인물, 학자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신념이 배어 나오는 저술로 기억되는 송건호 선생에게 ‘어리숙한’ 면이 있고 자녀들을 향한 ‘자애’가 넘쳤다니. ‘의외’라고 말하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송건호 선생 생전에 인간적으로 깊은 교분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떠올릴 수 있는 인상은 아닐 듯했다. 이런 기억을 회상하는 송준용 씨의 얼굴엔 아련함과 함께 소년의 미소 같은 것이 비쳤다. 마스크 위로 드러낸 두 눈망울에 말 그대로 ‘주마등(走馬燈)’처럼 과거가 스쳐 가고 있음이 내게도 보였다.
“사진 취미가 있으셨어요. 옛날에 조선일보 있으실 때 독일에 한 5개월 가 계셨는데 그때 라이카 카메라를 사신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로 사진을 굉장히 많이 남기셨거든요. 슬라이드 필름으로 저희 어린 시절을 많이 찍어주셨죠. 녹음기랑 영사기 같은 것도 사셨는데, 매년 말에 육 남매 다 앉혀놓고 녹음기에 대고,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올해 12월 31일이 저물고 있습니다’ 이런 거 이야기하면서 한마디씩 말하게 하고. 노래도 시키고, 그랬죠. 그리고 운동회나 이런 데 빠짐없이 나오셨어요. 제 운동회에 오셔서 막 달리기도 하고. 그때는 한강이 아직 개발 안 됐을 땐데, 거기도 가족 데리고 가고 그런 경험은 많이 있죠.”
자식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 아니 어쩌면, 누구나 가난하고 혼곤했던 그 시절, 삶에 지쳐 가족에게 무심하거나 무뚝뚝하기에 십상이었을 수많은 아버지들과는 달리, 소소한 잔정을 아낌없이 보여줬던 송건호 선생의 모습이 새롭다. 여기까지만 보면 꽤 다복하고 단란했던 한 중산층 가정을 연상시키는 기억이지만, 송건호 선생의 역정은 가족에게 행운보다는 불운을 더 많이 안겨줬을 법하다.
“(그렇게 자식들에게 자애롭게 대해주셨지만) 외식은 거의 한 적이 없어요. 저희가 육 남매인데, 돈이 없잖아요. 참 힘들었죠. 제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180도 성격이 달라요. 굉장히 외향적이고 명랑하고 하시기 때문에 그 애들 여섯 명을 다 옷도 만들어서 입히고 그러셨거든요. 사실은 아버지가 어머니 덕분에 (대외활동을) 그렇게 하실 수 있었어요. (…) 1975년 3월에 (동아일보의 기자 강제 해직에 항의해) 그만두시게 되죠. 그때부터 힘든 일이 계속됐죠. 자식들이 성장해서 자기 직장을 갖기 전까지는 계속. (…) 제 셋째 누나는 대학을 못 갔어요. 그 위에 둘이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그 누나는 고등학교만 나오고. 생활이 많이 어려웠죠.”
송준용 씨는 앞서 언급했던 글에서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어려운 경제적인 삶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으셨던 아버지도 대단하셨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러한 지조 있는 삶을 아버지가 사실 수 있도록 내조한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 또한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적은 바 있다. 어찌 보면 가족의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행복 끝 불행 시작’의 기점이랄 수도 있었던, 그러나 우리 사회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의 수혜자이기만 했던 한국 언론의 자존심을 지켜준 그 역사적 장면이 송준용 씨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저는 솔직히 잘 몰랐어요. 그때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신학기 즈음이어서 교실에 들어갔는데, 국사 선생님이 딱 들어오셔서는 ‘누구누구 아무개 있냐?’ 그러시더니 일어나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제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며 일어났더니 ‘다 박수 쳐라.’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들 박수를 치면서도 왜 치는 건지 몰랐죠. 물론 저야 집안 분위기는 알고 있었어요. 만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씀 나누시고 그러면서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죠. 국사 선생님이 나중에 (아버지 관련된 내용을) 쭉 설명을 하는 거예요. 또 담임선생님이 정치·경제 선생님이셨는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걸 설명하시면서 그 사건을 빗대서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상식에 충실했던 사람
서슬 퍼런 유신 치하에서도 정권에 의한 언론 탄압의 부당함과 그에 저항하는 언론인들의 정의로움에 대해 민중들은 교감하고 있었던가 보다. 당시 시대 분위기상 교사들이 대놓고 정부에 반한 이야기를 하긴 어려웠을 법도 한데, 송준용 씨의 선생님들은 ‘악화’가 누구고 ‘양화’가 누구인지 알려주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정확히는 깨닫지 못했을 중학교 3학년의 송준용 씨를 추켜세웠고 그 부친의 정의로움을 상찬했다. 박정희 체제는 그렇게 밑으로부터 부정되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에 유신 독재는 종막을 내리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세상이 바뀌는 듯해선지, 송건호 선생의 집에는 별안간 사람들이 들끓었다. 자칭타칭 민주인사에서부터, 집안 어른이 혹시나 영전이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얻어먹을 게 있을까 엿보는 먼 친척들까지. 하지만 그 시간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고, 사람들도 이내 흩어졌다.
“지식인 134인 선언인가 그걸 (아버지께서) 쓰셔서 유인물로 뿌렸고, 저도 현장에서 봤거든요. 그러고 나서 그다음 날인가, 긴급 전국 계엄이 나오고 그러니까 누가 전화를 해주셨어요. ‘빨리 피하시라’고. 그래서 그때 피하셨다가 며칠 뒤에 제 막내 고모네 집에서 잡히셨어요. 이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디 멀리 도망치셨을 거라 생각하고 사돈에 팔촌부터 해서 좁혀오느라 이틀 걸린 거예요. 근데 아버지는 마감되기 전에 글을 넘겨야 한다고 (멀리도 안 가고) 여동생 집에 가서 글을 쓰시다가 잡히신 거죠. (웃음)”
그토록 급박하게 정세가 변하는 와중인데도 ‘마감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작해야 ‘등잔 밑’에 숨었지만 그 ‘어둠’은 그리 짙지 않았던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공감하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글쟁이에게 글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으랴.

“제 아버지는 무슨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무슨 특출나게 엄청난 이론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렇거든요.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상식적인 얘기죠. 근데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다 보니까, 그리고 본인이 말만 앞서는 게 아니라 그 상식적인 이야기를 지키는 사람이다 보니까. 서울의 봄 때 아버지께서 목이 쉴 정도로 강연을 많이 다니셨는데, 아버지께서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으실 때 담당해주시던 서울대 의사 선생님이 학생 때 그걸 들으셨던가 보더라고요. 아버지 강연이 예정돼 있으니까 형사들이 쫙 깔리고 당시 교무처장이 엄청 긴장했었다고 해요. 근데 거기서 아버지께서 ‘의사들은 공부해야 된다’시면서 ‘여기서 의사 되려는 학생은 이렇게 데모하고 그러면 안 된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사람 살리고 이런 일을 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듣던 학생들이 약간 실망을 하죠. 학교 측에서는 되게 좋아하는 거고요. (웃음) 글만 보면 되게 과격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만나보면 좀 샌님 같은 그런 스타일이세요. 남산 중앙정보부에서도 막상 만나보니 너무 다르니까 좀 놀랐다는 얘기도 했다더군요.”
지극히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자신의 상식에 충실했던 사람. 그랬기 때문에 그 상식을 위배하는 일에 대해선 온몸으로 저항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인물, 송건호. 그를 단순히 ‘이상주의적 지식인’으로서의 언론인이었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와 같은 말속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수함이라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고, 따라서 ‘현실에서는 구현되기 어려운 언론인상’이라 치부하는 문제가 있다. 언론인이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것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게 ‘비현실적인 이상’이 되는 그런 현실 자체가 정작 비상식적인 것 아닐까?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기는 하셨지만) 언협(언론협의회) 회장으로서 이름만 걸어두신 거예요. 오로지 언론에 연관된 테두리 안에서만 하신 거죠. 혈기왕성한 《말》지 기자들에게도 ‘항상 사실 확인하고 기사 써라, 눈으로 보지 않은 걸 상상해서 쓰지 말아라 말씀하시니까 (성에 차지 않았을 거예요). 항상 책을 읽고 공부를 해라,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그리고 정치하지 말라고 하신 거고. 정치를 하면 자기 소신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정치를 해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고, 사람 다 망가진다. 그런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얘기만 계속 강조하신 거예요. 그게 (옆에 있는 이들에겐) 좀 못마땅했을 수도 있죠. 언론 운동하다가도 정치로 가서 더 사회 개혁을 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는데, 고리타분하게, 상식적으로, 언론에 관련된 정도(正道)만 이야기하시니까.”
넘기 어려웠던 언덕, 한겨레신문 창간
언론인이 언론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언론 현실에 저항해서 사표를 던졌던 송건호 선생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까지 역사적 저술을 남기는 데 매진했다. “춥고 배고파야 좋은 글이 나온다. 배부르면 글도 안 쓰게 된다. 쫓기고, 막 원고 독촉받고 그러면서 좋은 글이 나온다”라고 아들에게 이야기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송준용 씨는 또렷이 회상한다. 그러던 와중에 1987년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민주 정부 수립의 꿈은 좌절됐고, 상심한 이들의 희망은 한겨레신문이라는 국민 신문의 창간으로 모였다. 다시 한번 시대의 부름을 받은 송건호 선생은 펜을 놓고 한겨레신문 창립 발기인으로, 그리고 다시 초대 사장에 임했다.
“한길사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내신 다음 그 이후 작업을 하려고 하시던 중에 나가시게 된 거죠. 그때부터 시간도 없으시다 보니까 글을 못 쓰셨고, (건강이) 안 좋아지셨어요. 고문 후유증이 나타나고, 또 경영이란 게 해본 사람도 어려운데, 워낙에 잘 맞지 않은 일을 감당하셔야 해서 힘드셨던 것 같아요. 6만 명 넘는 (강한 열망과 의견을 지닌) 주주들이 ‘당신 보고 주식을 샀는데 이렇게 운영하면 되겠냐’며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그 스트레스가 굉장했거든요. 글은 거의 못 쓰셨죠.”
어찌 보면 한국 민주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소산 가운데 하나이자, 언론 자유 투쟁의 상징인 송건호 선생의 이상을 집약시킨 산물이었다고 할 만한 한겨레신문의 창간이, 고문으로 인해 상처 입은 그의 정신과 육신에는 가장 넘기 어려운 언덕이 됐던 셈이다. 결국 파킨슨증후군이 찾아왔다.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나는 오늘도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얼굴을 대하고 아버지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 그렇게 날카롭고 반짝거리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힘없는 아버지의 눈동자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고 썼던 송준용 씨는 그런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아주 먼 곳에 있는 한의원까지 모시고 다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곳이라, 나날이 여위어가는 아버지를 업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수전증으로 원고 집필조차 어려워지자,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 적으며 후일 유고가 될 글을 어렵사리 남겼다. 물욕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아끼던 물건인 책과, 일생을 바쳐 수집하고 정리해둔 자료를 모아 한겨레신문사 서고로 옮기던 날,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는 멀어져 가는 자신의 책더미를 한참이나 바라다보고 계셨단다. 송준용 씨는 아버지의 병상 옆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다시 희미해져 가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스로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식들에게 떳떳한 아버지를 재산으로 남기신 아버지께 나 또한 떳떳한 아들로서 아버지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자식들에게도 당당한 아버지로서 살아갈 것을 말이다.”
그렇게 송준용 씨는 부친의 마지막을 지켰고, 사후 20년에 이르는 시간을 송건호 선생에 대한 기억과 그 자취를 정돈하는 데 썼다.
“청암언론문화재단은 그냥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은 했어요. 처음에는 아버지의 저술을 정리해서 전집을 만들자.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언론사는 하나 만들어야 하겠다. (아버지가 창립하신) 민언련(민주언론시민연합)하고 세미나든 뭐든 작은 사업을 정기적으로 하자. 그 정도 생각했죠. 어느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고향인 옥천 분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주시고 공동체라디오를 개설하면서 훨씬 더 든든해졌죠. (…) 옥천에서 새로운 희망을 봤어요. 옥천신문을 비롯해서 최근 만들어진 공동체라디오까지, 다 주민 주도로 하고 있어요. ‘옥수수’라고 하는 방송도 있는데 거기 청소년들이 만들어요. 뭔가 젊은 사람들이 직접 하면서, 희망을 줄 수 있는 거. 만날 이론적인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옥천에서 시작된 것처럼, 자발적으로, 미래 세대와 함께 하는 것. 저는 이제 힘닿는 데까지 그걸 지원해주면 되겠다 생각을 하죠.”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이 돼 있을까, 그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계실까’를 상상하곤 했다던 송준용 씨. 어느덧 그는 송건호 선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연배 이상으로 훌쩍 나이를 먹어버렸고, 그토록 자애로우면서도 강건하던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했다. 대담을 요청했을 때 자신은 언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가능한 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하려 했고, 현재까지 올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왔던 많은 이들을 수시로 언급했다. 어떤 아름답고 위대한 인물의 정신과 실천은 이렇게 또 다른 아름다운 인물들을 통해 영속한다. 그게 우리가 굳이 누군가를 ‘기념’하려 애쓰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