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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기반의 미디어 사업자들이 빠르게 세를 불려 나가는 사이, 정부의 언론·미디어 정책은 제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 밀린 숙제를 물려받게 된 윤석열 정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확인해본다. 편집자 주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겠습니다.”
5년 전 더불어민주당은 제19대 대통령 선거공약집에서 국민 앞에 이렇게 약속했다. 세부적으론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 구성 등 보도 제작 편성의 자율성 확보 △종합편성채널과 지상파방송 동일 규제 체제 전환 △해직·징계 언론인에 대한 명예회복 원상복귀 및 언론탄압 진상규명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하에서 이뤄진 언론 탄압 등 잘못을 바로잡는 ‘비정상의 정상화’, 이른바 ‘적폐청산’이 시대적 과제였던 셈이다.
이후 5년, 어긋났던 것들의 일부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해직자들이 돌아왔고, 70위까지 떨어졌던 국경없는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 순위도 껑충 뛰어올랐으며, 공영방송의 주인인 국민의 목소리가 사장 선임 과정에 반영되는 ‘절반의 개혁’도 이뤄졌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공영방송 등 공영언론사에 대해 정부가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문재인 정부에서 언론·미디어 정책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방송통신위원회와 미디어법 개정 등을 통해 이만치 바꿔버린 미디어 환경을 박근혜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에서도 거의 손보지 않았다. TV와 종이신문, 라디오가 ‘메이저’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법·규제 체계가 아직 그대로인 사이,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이제는 뉴미디어라는 표현도 진부해진 IT 기반의 미디어 사업자들이 세를 불려갔다. 지난 5년, 우리의 미디어 이용 경험은 그 이전 5년이 생각이 안 날 만큼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곧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미디어법 개정 이후 10년 넘게 흘려버린 시간의 간극을 메워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받아든 셈이다. 과연 윤석열 정부에선 이 밀린 숙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미디어 공약 살펴보니
언론·미디어 정책 과제는 그야말로 산적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미 대선으로 문재인 정부가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하면서 임기 말까지 그대로 이어진 방송·통신 정책기구의 이원화 문제, 통합 미디어법 제정 및 법제 개편 등 당장 논의가 시급한 문제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선거 2주 전, 국민의힘이 내놓은 대통령 후보 공약집에 포함된 미디어개혁 공약은 전체 340페이지에서 단 3페이지뿐. 그마저도 신문이나 지역 언론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미디어개혁 공약은 자유로운 언론 환경 보장, 공영방송 공정성 강화, 미디어 진흥 전담기구 설치로 크게 요약된다. “모든 조직화된 권력으로부터 언론의 자유 보장”이 첫 번째 약속이다. 방송산업 진흥을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겠다는 약속도 여기 포함됐다. 국내 방송 사업자들이 글로벌 미디어 사업자에 비해 역차별받고 있다는 지적이 누누이 제기돼 온 만큼 문재인 정부에서 조금씩 진행된 규제 완화 기조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단, 방송을 규제하거나 길들여야 할 ‘정치적 이유’가 없는 한 말이다.
두 번째 약속으로 밝힌 ‘공영방송의 거버넌스 구조 개선’에 관해선 구체적 내용이 없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과 신뢰성을 보장”하겠다고 했으니 원론적 차원의 선언이나마 믿어봄직도 한데, 대선 승리 이후 국민의힘의 행보를 보면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 대통령 퇴임 전 처리를 서두르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법안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밝혔다.
미디어 및 콘텐츠 산업 진흥을 위한 전담기구를 설치하겠다는 세 번째 약속은 크게 논란이 없다. 특히 정부-기업-학계-시민사회를 포함시키는 거버넌스를 모색하겠다며 ‘미디어혁신위원회’ 출범을 약속한 것에 대해선 고무적이란 반응도 있다. 이 글을 쓰는 4월 20일 현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안팎에서도 미디어혁신위원회 출범은 거의 확정적이란 분위기다. 미디어 정책기구의 조직 개편 없이 정부 출범이 이뤄지게 된 만큼, 향후 미디어 전담기구 설치를 위한 논의를 미디어혁신위에서 주도하게 될 거란 전망과 기대도 나온다.
미디어 거버넌스 및 법제 개편 시급
미디어혁신위 출범과 운영은 윤석열 정부의 미디어개혁 의지를 확인할 주요한 가늠자가 될 수 있다. 통합적인 미디어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정부조직 개편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상파/유료방송, 규제/진흥으로 갈라진 이래, 방송통신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구 미래창조과학부)는 소관 업무를 두고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고, 그로 인해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방송과 통신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틈을 파고든 신규 사업자들이 활개를 치는데 이를 어떤 법체계로 묶어야 할지, 어느 부처에서 담당해야 하는지조차 불분명했던 까닭이다. 따라서 차기 정부에서 미디어 정부조직 개편은 꼭 필요한 과제로 여겨졌고, 대선 전부터 사업자 단체나 학계를 중심으로 여러 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새 정부 출범 전 조직 개편은 어려워졌고, 만일 미디어혁신위가 꾸려진다면 이곳에서 부처 간 기능 조정이나 통합 부처 신설 등 미디어 조직 개편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현재 미디어 업계와 학계 등에선 과기정통부, 방통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방송·통신·문화(신문) 기능을 각각 떼어내 통합 미디어 부처 조직을 만들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디어 전담 부처는 정책 집행의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독임제로 하고, 보도 기능이 포함된 지상파·종편·보도채널에 대해선 별도의 합의제 위원회를 둬서 관장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다. 방송콘텐츠 산업 진흥을 위한 전담 조직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민의힘도 대선공약에서 ‘K-콘텐츠’의 글로벌 진출을 위한 지원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단, 어떤 형태가 됐든 과거처럼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혹은 언론 통제를 목적으로 미디어 정책기구를 도구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 시절 최시중 위원장의 방통위가 ‘방송통제위원회’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역사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디어 전담기구 논의와 함께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게 법제 개편이다. 미디어 환경과 제도가 불일치한 상태를 개선할 필요성이 시급하다. 네이버와 구글, ‘토종 OTT’인 웨이브와 글로벌 사업자 넷플릭스의 역차별 논란이 제기된 지도 오래다. 현행 미디어 법체계는 국내 사업자를 지원하기도, 해외 사업자를 규제하기도 힘든 낡은 구조로 돼 있다. 미디어 기술 발달에 따라 새롭게 출현하는 미디어 서비스까지 고려한 CPND(콘텐츠-플랫폼-네트워크-디바이스) 통합 미디어법이 필요하다. 이를 전제로 미디어 영역별 진입 규제와 소유 규제, 행위(내용) 규제 등에 대한 개편 논의 역시 진행돼야 한다. 또한, 현행 방송법 등에 명확한 정의조차 없는 공영방송 관련 법안을 제정해 공영방송의 의미와 사회적 책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공영방송 재허가 및 평가제도를 개선해 공적 책무 협약을 체결하고 이 협약의 이행 정도를 평가하는 방안 등을 정치권과 학계 등에서 검토 중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언론, 특히 공영방송 문제가 지나치게 ‘정치 과잉’ 현상을 띤다는 점이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 방송 관련 법안 개정이 정권 교체에 따라 국회에서 공수만 바뀌어 막고 막히는 상황을 반복해 온 이유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권력과 (공영) 언론의 후견주의적 관계를 해소하고, 독립성과 자율성에 기초한 수평적 관계로 재정립하기 위한 정부-언론-시민사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능한 조정자’로서 정부 역할 기대
미디어 정책 과제는 산적해 있고, 우선순위를 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급한 과제도 많다. 이 모든 걸 윤석열 정부가 단독으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겸임교수는 아날로그 시대 정부의 ‘통치’는 디지털 시대에서 ‘협치’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정부가 미디어 정책을 앞장서서 주도하기보다 ‘유능한 조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새 정부 앞에 놓인 환경은 녹록지 않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협조 없이 어떤 법·제도 개편이나 개혁도 하기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때보다 분열돼 있다. 언론 개혁, 미디어 개혁 등 같은 구호를 두고도 동상이몽에 대립하는 일이 잦다. 언론 노동자 단체, 사업자 단체, 학계, 시민단체 등 동일 집단 내부에서도 갈등하거나 반목하는 일이 많아졌다. 미디어 생태계는 더욱 황폐해졌고, 작아지는 미디어 시장의 파이를 둘러싼 경쟁과 갈등도 심화하고 있다. 허위정보 혹은 유해하거나 무익한 정보도 넘쳐난다. 언론·미디어를 처벌하고 규제해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쪽과 자정 및 자율규제 강화를 통해 개선하려는 쪽이 서로 대립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기도 한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에 더욱 요구되는 것이 협치다. 진정 미디어개혁 의지가 있다면 거대 야당을 설득하고, 언론을 설득하고, 시민사회를 설득하며 민주적이고 능률적인 정부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치적 위기의 원인을 언론의 (허위) 보도 책임으로 돌리며 법적인 제재나 처벌을 강화하려고 해선 안 된다. “가짜뉴스, 악의적 왜곡 등의 문제는 자율 규제를 통해 해결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미디어 공약 첫 번째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지체된 미디어개혁을 위해선 5년도 긴 시간이 아니다. 과연 윤석열 정부에서 1호로 이행할 미디어 공약은 무엇이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