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도 제시하라.”
언론학 교수나 시민단체 사람들이 기자에게 하던 이 말을 요즘 일반 시민과 학생도 한다. 기자가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지도 제법 오래됐다. 이 말은 워낙 좋아서 말하는 사람이 우월감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다.
사사건건 비판만 하는 언론에 식상하고 짜증 난 사람은 기자에게 그런 충고를 할 법하다. 기자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냈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문제점을 비판해도 잘 고쳐지지 않으니 아예 문제 해결 방법을 직접 알려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매우 많은 기사가 대안을 보도했다. 예를 들어, 언론은 복지 문제에 스웨덴 모델을, 노인 대책에 일본의 경험을, 환경 정책에 독일의 성공 사례를 대안으로 보도했다. 이런 굵직한 기획 기사뿐 아니라 자잘한 일반 기사도 자주 대안을 제시했다. 주로 전문가를 통해 조언이나 제언을 전달했다. 대안까지 보도했으므로 기자의 마음은 뿌듯했겠지만, 그런 대안은 과연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
기사가 제시한 대안이 유효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됐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더 악화했다. 문제 해결의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게 대안이 담긴 기사를 보여주면 그들은 피식댄다. 기자가 대책까지 알아봐줬으니 이제 다 해결돼 아무 걱정 없겠다는 투로 빈정거리기도 한다. 대개 공무원은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예산이 없거나 정책 순위에 밀려서 불가피하게 대책을 집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해외의 모범 사례를 그냥 국내에 적용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해외의 사례를 토착화하면서 우리만의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인데, 그러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예산을 확보하고 정책을 밀고 나가려면 상당한 동력이 필요하다. 기사가 제시하는 대안은 그런 동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기사를 어떻게 써야 문제점을 고칠 수 있는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시민의 분노가 핵심
최근에 우리는 기사가 문제점을 고치는 것을 넘어 세상을 바꾸기까지 한 사례를 목격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이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보도가 그것이다. 과연 언론은 어떻게 이 어마어마한 변화를 끌어냈는가? 그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1)언론 보도가 있었으며 2)기사를 본 시민들은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으며 3)국회의원들은 시민 눈치를 보며 대통령 탄핵에 가결했다. 첫 번째 단계인 언론 보도가 없다면 아예 그 이후도 없겠지만, 언론 보도가 있다고 해서 항상 그 이후의 단계가 활성화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두 번째 단계인 시민의 분노가 있으면, 세 번째 단계는 거의 보장된다. 시민의 분노가 핵심인데, 그것은 대통령 탄핵을 ‘시민혁명’으로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대통령 탄핵이 초유라는 점에서, 시민의 분노가 대단한 힘을 지녔다는 것은 증명됐다. 필요한 것은 그냥 기사가 아니라 시민의 분노를 유발하는 기사다. 국정농단 기사는 어떠했기에 시민을 그토록 분노하게 했을까?
언론은 국정농단을 보도하면서 법을 어기거나 부도덕한 짓을 한 장본인들의 이름 석 자를 그대로 기사에 공개했다. 그들의 잘못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아내면, 그것의 진위를 제2, 제3의 증거로 확인하고 재확인했다. 그렇게 정밀하게 퍼즐 조각을 맞춰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무엇이든지 하나를 물면,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끝장을 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적나라하게 들춰냈다. 이런 요소들이 한국 언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원천이다. 또한, 이것이 시민의 분노를 유발하는 기사의 조건들이다. 국정농단 보도는 워낙 훌륭해서 이런 요소를 모두 갖출 수 있었겠지만, 일반 기사는 그렇지 못할 수 있다. 그래도 탐사보도는 유일하게 제도나 정책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사이므로 이런 요소를 갖추고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 퓰리처상의 탐사보도 부문 수상작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의 기획 부문 수상작을 분석해 봤는데, 한국 기사는 실망적이었다.
미국 탐사기사는 법을 어기거나 부도덕한 짓을 한 사람들을 거의 모두 실명으로 보도했으며 한국 탐사기사는 익명으로 보도했다. 특히, 그런 사람들 전원을 실명으로 보도한 경우는 미국이 기사 10개 중 7개(70%)나 됐으며 한국은 1~2개(17%) 밖에 없었다. 다수의 미국 기사(63%)는 여러 문제점 중 대표적인 1~2개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파헤쳤고, 대부분의 한국 기사(78%)는 여러 사례를 소개하듯이 나열했다.
실태를 취재하며 대안 찾아야
입증의 다원성, 즉 기사가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증거자료를 활용하는가에서도 차이가 났다. 여기서 증거자료는 당사자나 관계자의 증언, 당사자나 관계자의 개인 문서, 수사기관의 기록, 수사기관 외 정부 기관의 공문서, 기업이나 여타 기관의 문서, 전문가의 분석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미국 탐사기사(87%)는 두 종류 이상의 증거자료를 활용했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그런 기사가 절반 조금 넘게(59%) 발견됐다. 바꿔 말하면, 한 종류의 증거에만 의존한 기사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 더 많았다. 미국의 경우, 두 종류의 증거를 활용한 기사는 25%, 세 종류는 22.5%, 네 종류는 45%이며, 심지어 다섯 종류의 증거를 활용한 기사도 7.5%나 됐다. 미국 기사는 다양한 경로로 여러 종류의 증거를 수집하여 주제를 입체적으로 증명했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에는 한 종류의 증거자료를 활용한 기사(41%)와 두 종류의 증거자료를 활용한 기사(59%)뿐이었다.
미국 탐사기사는 4개 중 1개꼴(27%)로 대안을 제시했으며 한국 탐사기사는 약 절반(52%)이 대안을 제시했다. 미국 기사도 대안을 제시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미국 기사는 오로지 문제의 실태에 집중해, 실태를 파헤치면서 원인을 찾아내고 원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결책을 드러냈다. 즉 기자가 실태를 취재하면서 대안이 드러난 것이지 대안을 찾기 위해 새로 취재를 한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해 한국 기사는 문제점을 확인하는 선에서 실태 파악을 끝내고, 전문가나 모범 사례를 취재해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래서 문제의 실태와 원인, 대안의 연계성이 낮았다.
또 다른 차이는 캠페인 보도에서 발견됐다. 캠페인 보도는 “~~을 하자”라는 식으로 행동을 권유하거나 사람들을 동원하는 기사를 뜻한다. 한국 탐사기사는 10개 중 약 1개(12.5%)가 캠페인 보도였지만, 미국 탐사기사는 캠페인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시민에게 무엇을 권유하거나 그들이 행동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정부 기관이나 시민단체가 해야 할 일이다. 언론이 캠페인을 자임하면 문제점을 들춰내는 어려운 일은 대충 수행하고, 캠페인 같은 그럴싸한 일에 치중하게 된다. 물론, 미국 언론도 캠페인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자유의 여신상’의 기단을 만들기 위해 미국 신문은 지면을 통해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런 캠페인 보도는 한때 만연했으며 십자군 저널리즘(crusade journalism)으로 불렸다. 그것이1880년대의 일이니, 미국에서 140 여 년 전에 사라졌던 저널리즘을 지금 한국 언론이 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이 가장 강력한 대안
일반 기사에서 대안은 흔히 전문가 코멘트를 통해 제시된다. 대개 기사의 마지막에 전문가가 등장해 “~~을 해야 한다”라거나 “~~을 하면 안 된다”라고 지침을 주는 식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 범죄를 다룬 기사에서 전문가는 “이를 해소하려면 교육이 중요합니다. 특히, 어릴 때 가정교육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 대다수의 전문가 코멘트는 하나마나 한 말이어서 정보도 의미도 없는 군더더기다. 모 기자는 데스크에게 전문가 코멘트의 무용성을 말했다가 야단만 맞았다. 현장의 기자들은 지금도 이런 쓸데없는 것을 구하려고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한편, 독자는 전문가 코멘트를 읽으면서 언론이 자기를 가르치려 한다고 느낄 것이다. 저널리즘의 금언 중 하나가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마라” 아닌가? 기사 마지막의 전문가 코멘트는 한국 언론 특유의 관행이다. 기자는 마지막에 힘을 주고 싶어서 전문가 코멘트를 넣지만, 역효과만 낳을 뿐이다. 기사의 마지막은 독자가 사안을 생각해볼 수 있도록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 것이 좋다.
솔루션 저널리즘(solutions journalism) 때문에 미국 언론도 대안 제시를 권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솔루션 저널리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솔루션 저널리즘은 대안을 제시하거나 해법을 찾는 저널리즘이 아니다. 오히려 솔루션 저널리즘은 “현장과 유리된 탁상공론식 대안, 무비판적 해외 사례 소개, 해결책 단순 열거 같은 상투적 제언이나 피상적 처방에 머무는 보도를 경계한다. … 기자가 직접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한 사례나 인물의 성과를 다각도로 취재해 소개하는 방식”이다(<현장 기자를 위한 체크리스트>, 2019, 김경모의 글 235~236쪽). 문제 해결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긍정적인 관점의 이야기로 보도해, 유사한 고민을 지닌 공동체나 지역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솔루션 저널리즘은 성공 사례도 단점이나 한계점을 함께 소개한다.
한국 기자들이 언론의 대안 제시 기능을 내면화하고 자기의 임무로 받아들인 지는 이미 오래됐다. 한국 언론의 계몽 지향성과 한국 기자들의 엘리트주의가 그것을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이슈를 냉정하게 바라볼 때가 됐다. 기사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시민을 움직여야 한다. 핵심은 시민의 분노다. 따라서 그저 그런 비판이 아니라 시민을 분노하게 만드는 비판이 필요하다. 엉망진창이 된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줄수록 시민들은 더 분노한다. 그래야 국회의원과 공무원이 움직인다. 대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식힐 수 있다. 대안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문제를 일으킨 책임자들에게 있다. 그들이 대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는 것이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여전히, 비판이 가장 강력한 대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