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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언론에 정파성을 허하라?] 의견 기사 다시 읽기
커버스토리 | 등록일 : 2021-04-08

의견 기사는 신문 역사와 오래전부터 함께해 왔다. 그런 만큼 매체의 진화, 사회적 환경까지 반영한다. 서양의 신문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이 형식은 한국에 도입되며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했다. 의견 기사의 개념을 살펴보고 우리 언론은 이를 어떻게 변용했는지 알아본다. 편집자 주

 

 


 

미디어 간 구분이 없어진 요즘, 뉴스 이용자들은 시사 콘텐츠를 생산하는 매체라면 모두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의견을 표명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의견 기사는 신문의 전유물처럼 굳어진 표현 양식이다.

 

저널리즘 문헌에서 의견 기사란 스트레이트 기사를 제외하고 작성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포함하는 다양한 기사 형태를 말한다. 신문사의 입장을 표현하는 ‘사설’, 필자의 이름으로 나가는 ‘논설형 칼럼(editorials)’ 등 다소 무거운 성격의 글 외에도 스포츠 칼럼이나 드라마 비평, 가십이나 감상적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유형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우리가 특히 관심을 두는 유형은 이 중에서도 사설이나 ‘시론’ 등의 논설형 칼럼일 것이다.

 

신문 사설이나 칼럼 등 ‘오피니언’ 기사는 독자층뿐 아니라 여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신문 구독자는 대폭 줄었지만, 기사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전파, 재가공되면서 여론 형성 과정에서 일종의 씨앗 구실을 한다. 국회 정치에서 북한, 노동, 기본소득, 코로나19 방역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회적 이슈에 관해 나온 논쟁적 의견 기사는 좋게 말하자면 여론 다양성의 지표가 되고, 나쁘게 보자면 정파적 갈등을 조장하는 진원지다.

 

독자가 접하는 의견 기사는 신문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용된 장르이니만큼 기사 양식의 변천뿐 아니라 매체 기능의 진화, 나아가 사회적 환경까지도 반영한다. 의견 기사는 서양의 신문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표현 양식이자 직업 관행으로서, 한국에서도 신문이란 근대적 제도를 수입해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 기사 형식이 한국 언론에 수입돼 통용될 때 비록 형식은 서구와 비슷해도 한국 사회의 토양에 맞게 변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의견 기사에 대한 평가 역시 과거든 현재든 그 시대 언론의 기능과 시대 상황을 함께 고려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긴 안목에서 볼 때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신문의 의견 기사는 어떤 모습이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평가내릴 수 있다. 문제점에 대한 해법은 그다음 문제다.

 

 

신문 구독자는 대폭 줄었지만, 기사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전파, 재가공되면서 여론 형성 과정에서 일종의 씨앗 구실을 한다. 온갖 사회적 이슈에 관한 논쟁적 의견 기사는 좋게 말하자면 여론 다양성의 지표가 되고, 나쁘게 보자면 정파적 갈등을 조장하는 진원지다. Ⓒ뉴스1

 

 

대중지의 등장과 의견 기사의 진화

 

역사는 특수한 맥락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건과 인물로 이뤄져 있다. 의견 기사라는 저널리즘 양식의 발전 과정도 그렇다. 미국에서는 1872년 스프링필드(Springfield)의 리퍼블리칸(Republican)이 칼럼의 원조이고, 시카고데일리뉴스(Chicago Daily News)는 1890년대에 이미 신디케이트(syndicate)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개별 사건들은 당시 미국 신문 안팎에서 전개되던 복잡한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특수성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큰 흐름만 보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영미권의 신문은 정론지 중심에서 대중지로 옮아갔고, 이에 따라 기사 형식에서는 의견과 사실을 분리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의견 기사라는 기사 형식의 의미와 기능도 더불어 진화했다.

 

영미 언론의 역사에서 의견 기사는 정론지 시대의 산물이다. 근대사회 등장, 특히 민주주의 성장 과정에서 신문이 수행한 역할을 고려하면 언론이 어떤 정치적 대의를 대변하고 옹호하는 기능에 초점을 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사 작성에서도 사실과 의견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고, 의견 표현이 곧 언론 활동처럼 통했다. 어차피 비교적 동질적인 엘리트층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런 정파적 견해의 여과 없는 표출도 큰 문제 없이 수용됐을 것이다.

 

의견 기사의 진화에서 획을 그은 사건은 대중지의 등장이다. 신문이 일부 엘리트층 중심에서 벗어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매체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신문 기사의 소재나 시각, 글쓰기 방식도 새로운 환경에 맞춰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소득이나 직업,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삼다 보니 기사의 소재도 쉽고 재미있게 바뀌었을 뿐 아니라, 특정한 정파적 가치나 시각의 표명은 이질적 독자층을 자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 된 셈이다. 대중지 시대의 시작은 기사 형식에서도 사실과 의견의 분리로 나아가게 되는 토양을 마련했다.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원칙이 채택되고 난 후 의견 기사 양식은 본격적으로 분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오늘날 서구의 신문에서는 객관적 보도를 추구하는 스트레이트 뉴스 외에도 사실에 맥락을 부여해 이해를 돕는 해설 기사, 작성자의 의견을 표명하는 사설, 칼럼, 비평 등 다양한 형태의 의견 기사가 발달했다. 그렇지만 서구에서는 의견 기사라 하더라도 주장의 근거가 되는 사실 제시 등 논리적 논증 구조를 강조하는 전통이 확립됐다. 의견 기사에서 주관적 판단의 자의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기사 작성법이 발전한 것이다.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레토릭(rhetoric)》에서 설득의 원리로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라는 기본 유형을 제시했다. 주장에서 근거와 논리를 중시하는 방식, 감정에 소구하는 방식, 발언자의 윤리적 신뢰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영미권 저널리즘은 무거운 의견 기사에서는 논리적 근거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식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로고스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의견 기사에서는 작성자가 특정한 주제에 관해 일반인을 능가하는 해박한 지식이 필요하므로, 언론사 내에서는 논설위원과 같은 직군의 발전, 직업 칼럼니스트에 의존하는 신디케이트 제도가 발전하게 됐다. 의견 기사의 발전은 또한 언론인의 전문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의 신문 역시 적어도 외관적 형태만 보면 서구의 이러한 제도와 직업 관행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도덕적 언론’ 요구하는 독자들

 

하지만 외관적 형식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의 의견 기사는 영미권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자리 잡았다. 의견 기사는 수입된 외래적 표현 양식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수용되는 맥락과 양상이 달랐기 때문이 아닌지 추측해볼 수 있다. 한국 신문의 의견 기사는 단지 글쓰기 방식의 형태적 차이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저널리즘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기능에 대한 인식 차이도 반영한다. 언론이라는 제도는 수입된 근대적 제도이자 문화 양식이면서 전통 유산의 잔재도 갖고 있다. 언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유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점만 봐도 그렇다.

 

‘언론’이라는 단어는 조선시대의 언관·언론 활동의 근간을 이루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라는 언론 삼사(三司)에서 유래한 듯하다. 제도적으로는 언론 삼사 소속 관원 역시 별개의 직종이 아니라 조정의 조직에 속하면서 사대부 관료들이 거쳐 가던 한 보직이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고 관료의 권력 남용과 부패를 감시하는 기능, 자율성을 강조하는 특유의 직업 문화에서 언관은 오늘날 일반 시민이 생각하는 언론인 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조의 언관·언론에 관한 논의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언관의 자질에 관한 조항이다. 언관은 뛰어난 학식뿐 아니라 청렴, 강단, 강직 등의 덕목을 갖춰야 하는 자리로 인식됐다. 사대부 사이의 평판이 좋아야 할 뿐 아니라 집안 배경에서도 본가, 처가, 외가를 막론하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충족하는 자만이 언관의 자격이 있다고 봤다. 언관이 표현하는 말과 글의 설득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토스, 즉 화자의 윤리적 신뢰성과 도덕적 정당성에 있다고 본 셈이다.

 

이와 더불어 언관의 간쟁에서는 주장의 명분과 정당성을 중시했을 뿐 발언의 근거가 된 정보의 출처를 물을 수 없도록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글의 논리적 근거보다 명분과 도덕성을 강조한 것은, 서구 저널리즘 전통에서 주장의 정당성을 객관적 근거라는 형식적 틀의 요소에 둔 것과 차이가 있다. 유교의 가르침에서도 군자의 말은 진솔하고 투박해야 한다는 ‘군자어눌(君子語訥)’이란 표현이나, 화려한 말에 부정적인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구절에서는 오히려 뛰어난 수사적 기법을 경계하면서 진실성을 강조하는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조선조 언관·언론의 전통이 언론이라는 용어뿐 아니라 언론이라는 제도의 정신적 바탕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딱 꼬집어서 지적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인들에게 ‘언론’이나 ‘언론인’이라는 단어는 도덕적, 윤리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저널리즘에서 글로벌 표준이 되다시피 한 영미권의 언론은 정보 전달에 강점을 두고 주관의 개입을 방지하는 절차적 틀을 정교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이보다 윤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언론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일반 독자는 저널리즘의 객관성이나 사실성, 공정성을 서구적인, 혹은 사전적인 의미와 달리 해석한다. 일부 신문이 구독자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기사 공정성에 대한 평가가 객관성에 대한 항목과 연동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독자는 해당 신문의 정파성이 자기 취향이나 성향과 일치해 공감할수록 그 기사가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본다는 뜻이다. 객관성, 공정성 등 서구 저널리즘에서는 서로 구분되는 기본 원칙들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인식은, 학자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현상이지만 유교 전통의 도덕적 언론관에 비춰보면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다.

 

물론 조선사회의 언론관은 왕조 후기에 이르러 상당히 문란해졌고, 유교적 정치 질서가 붕괴한 지도 백 년이 넘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 ‘언론’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유교적 언론관과 더불어 식민지화, 분단, 독재 등으로 일그러진 근대사의 경험이 농축돼 도덕적 언론관에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대중의 인식에서는 전통적 언론관에 따라 이상적으로는 계몽적이고 윤리적인 언론상을 기대하면서도, 현실은 그러한 이상과 전혀 거리가 멀다는 실망감이 동시에 작용해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 언론의 신뢰도는 최근 몇 년간 연속해서 조사 대상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이 결과는 한편으로는 단순히 한국 언론의 낮은 질적 수준을 보여주는 현실 지표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시민들의 높은 기대치와 현실 간의 큰 간극을 시사하는 징후이기도 하다.

 

오염된 전통과 의견 기사의 변질

 

저널리즘의 정신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 언론의,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의견 기사의 유산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서구 저널리즘의 지적 흐름에 비춰보면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 한국 신문의 의견 기사는 저널리즘의 본령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많은 신문의 오피니언란은 사실의 맥락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장이 아니라 정파적 편향과 이해관계의 도구로 전락해가고 있다. 정파화한 언론인과 글재주만 뛰어난 일부 논객이 의견 기사를 주도하고 있다. 전문가는 지식의 전문성이 아니라 이름값으로 악용되고 있다. 독자는 정파적 입장이 다른 신문에 실린 전문가의 의견을 전문성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배후나 동기부터 의심하고 본다.

 

저널리즘 원칙은 의견 기사가 작성자의 주관적 편협함과 취향을 추구하는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독자가 의견 기사의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에는 납득할 수 있어야 하며, 적어도 사안 전반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야 정상이다. 오랫동안 뉴욕타임스 칼럼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한 가지 있다. 엄청난 취재를 토대로 집필했고 의외로 해석과 주장은 강도가 낮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스트레이트 기사처럼 칼럼 역시 머리가 아니라 발로 쓰는 것이었다. 해당 주제의 전문가면서도 독자를 가르치려는 태도도 훨씬 덜했다. 우리는 이와 정반대로 하고 있다.

 

한국 신문은 의견 기사의 원래 취지대로 독자에게 합리적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에 충실하기보다는 독자를 특정한 편향된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한다. 서구 저널리즘에서와 달리 지면 전반에서 사실과 의견의 분리 원칙은 요식 행위가 됐고, 사실은 정파적 편향을 합리화하고 조장하는 수단일 뿐이다. 내용 측면에서는 의견 기사와 보도 기사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1990년대 말부터 두드러진 언론의 정파화는 독자층의 정파적 성향 분포를 반영하는 데서 시작했다고 하는 핑계도 있으나, 이제는 역으로 시민들의 정파 성향을 부추기고 갈등을 조장하는 정파적 상업주의로 굳어졌다.

 

한국 언론은 유교적 언론 전통에 비춰보더라도 정도에서 한참 벗어나 버렸다. 이제는 일상어로 정착된 ‘기레기’ 담론은 한국 저널리즘의 직업 관행이나 존재 자체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을 반영한다. 조선조 언관·언론에서 개화기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언론 전통에서 강조하던 도덕적 신뢰를 기성 언론이 거의 상실했다는 뜻이다. 시민들은 편향된 보도에 번번이 속아 넘어가면서도 언론을 싸잡아 욕하는 역설적 상황이 이어졌다. 신뢰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계몽을 외치며 시민을 가르치려 하는 언론의 태도에 이제 수긍하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다. 이렇게 언론과 언론인 자체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상태에서는 어떤 단기적 개혁 노력도 무위로 그치기 쉽다.

 

의견 기사 집필자의 전문성 문제도 심각하다. 언론이 대중을 가르치려 들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전문화됐다. 의견 기사를 집필하는 언론인이 특정한 분야에 관해 전문가가 되긴 어렵다. 언론에 출연하는 학자나 전문가라고 해도 모든 문제에 해박하지는 않다. 이 때문에 의견 기사 집필자는 사안을 좀 더 종합적으로, 더 깊이 취재하고 판단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하지만 최근 동아일보에서 회사와 다른 입장의 칼럼을 쓰던 한 논설위원이 결국 사직한 사건은, 언론사 내부의 경직된 태도가 위험 수준임을 시사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도덕적 정당성도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언론인이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언론의 전통을 새로 정립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의견 기사 바로잡기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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