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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현장] 객체주의 저널리즘이 필요한 이유
미디어현장 | 등록일 : 2021-06-04

지난 4월호에서 남재일 교수는 <‘허술한 객관주의’보다 ‘진실 추구하는 의견’이 백배 낫다>는 기사를 쓴 바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그래도 여전히 우리 언론에는 객체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의견과 사실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지면에 옮긴다. 편집자 주 

 

남재일 선생님은 2021년 《신문과방송》 4월호에 <‘허술한 객관주의’보다 ‘진실 추구하는 의견’이 백배 낫다>는 글을 썼다. 그것을 읽고 나도 글을 쓰고 싶어졌다. 두루 알다시피 선생님은 한국 언론의 현실에 뿌리를 둔 날카로운 연구로 이미 높은 경지를 이루셨다. 특히 ‘한국 객관주의 관행’에 대한 선생님의 여러 논문은 후학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경전이다. 최근에는 객관주의 규범을 넘어서는 ‘시민 인륜의 저널리즘’을 제시하며 새로운 연구 지평을 열고 계시다.

 

《신문과방송》에 쓰신 글도 그런 깊이와 맥락 가운데 있다. 감히 내가 범접할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 이 글은 반론(反論)이 아니라 기껏해야 보론(補論)이다. 선생님의 옥고에 어울리는 보론의 품질을 채우지 못한 것은 나의 공부가 짧은 탓이다. 그래도 4월호를 몰두해 읽었을 현장의 기자들을 떠올리며 부족한 글을 써본다.

 

객체주의와 기능적 진실


한국 언론의 객관성 또는 객관주의 문제에서 내 마음에 가장 들지 않는 점은 그 ‘단어’다. 아마 독일 철학서를 번역한 일본식 한자어가 일제강점기 시절 국내에 들어와 굳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런데 서양 철학에서 비롯한 ‘objectivity’의 번역으로는 객관성이 아니라 ‘물성(物性)’이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물성은 물체(object)의 성질(-tivity)이다. 인식 주체(subject)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할 때는 ‘객체성(客體性)’이라고 쓸 수도 있겠다. 원래 단어 objectivity의 어디에 ‘관점(觀點)’의 의미가 있기에 객관성 또는 객관주의로 번역한 것인지 모르겠다(그래서 아래서는 ‘물성’과 ‘객체주의’라는 단어를 써보려 한다).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이미 통용되는 단어의 꼬투리를 잡은 것은 그 번역어에 혼란과 왜곡의 씨앗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객관주의’라는 단어는 주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초월적 관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로부터 비롯한, 가장 흔하고 전형적인 비판은 ‘누구도 주관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겠다는 객관주의는 허구의 이데올로기다’라는 것이다. 이는 객체주의를 편리하게 오해한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객체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종합 정리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이래 어떤 철학자나 과학자도 ‘인식 주체의 편견과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상과 물체, 그리고 세계를 온전히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이는 없다. 내가 이해하는 객체주의(objectivism)란 감정이나 생각과 무관하게 주어진 세계(object)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관을 가급적 유보 또는 배제해 세계의 성질과 실체, 즉 물성(objectivity)을 최대한 파악하려는 태도 또는 방법론이다.

 

따라서 객체주의 저널리즘은 ‘완벽한 진실’이 아니라 ‘잠정적, 누진적, 사회구성적 진실’을 추구한다. 또한, 불완전하나마 진실에 접근하는 일을 확고한 의견을 표현하는 것보다 우선시한다. 이것은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석에 비유할 수 있다. 진실을 파악하려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향하지 말고 그 바깥에 있는 사물과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 객체주의다.

 

언론학자 마이클 셧슨(Michael Schudson)은 현대 언론의 객체주의가 일종의 ‘변증법적 진화’를 거쳤다고 봤다. 기자들이 처음에는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기계적 반영론’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정부 선동이나 홍보 조직에 의한 사실 왜곡을 경험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도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20세기 중반에 정립한 객체주의는 “사실에 대한 신념을 최종적으로 표명한 것이 아니라 사실조차도 신뢰받지 못하는 세상을 위해 고안한 규칙과 절차”였다고 셧슨은 설명했다.

 

따라서 현대 언론의 객체주의는 진실을 온전하게 보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진실을 호도하는 조작 정보와 정치적 선동이 횡행하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세계의 물성을 파악해 보겠다는 다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 또는 입장은 ‘진실의 온전한 인식과 완전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코바치와 로젠스틸이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서 객체주의를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객관성은 기자에게 편견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개념이 아니었다. 거꾸로, 기자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취재 보도) 방법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에게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엄밀하고도 투명한 취재 보도 과정을 통해 과학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당성을) 방어할 수 있는 뉴스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Kovach & Rosenstiel, 2014, 10쪽)

 

과학자나 법률가도 인간이다. 그들에게도 편견, 관점, 입장이 있다. 그래도 그들의 연구나 판결은 잠정적, 점진적, 사회 구성적 차원에서 진실에 가깝거나 진실의 중요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의 연구나 판결에는 흠결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오류나 한계를 지속적으로 수정하면서 과학과 법률은 사회 제도이자 체계로서 구실 한다.

 

이것을 코바치와 로젠스틸은 ‘기능적 진실(functional truth)’이라고 불렀다. 법률, 경제, 물리학, 생물학 등이 추구하는 모든 진실은 수정의 대상이지만, 사람들은 한동안 그것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한다. 현대 문명과 사회 체계는 객체주의와 그것이 추구하는 기능적 진실에 의해 작동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진실’을 구현하지 못한다고 현대의 법률 체계를 없애고 종교 재판으로 돌아가거나, 의학을 대신해 주술 치료를 시도하지 않는다.

 

언론이 객체주의로 아직 씨름하는 이유

 

물론 다른 분야와 달리 유독 저널리즘이 객체주의 문제를 붙잡고 오랫동안 씨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법률이나 과학은 객체주의를 구현하는 나름의 절차와 체계를 확립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판사나 과학자는 객체주의를 두고 논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론의 절차와 체계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유동적이다.

 

첫째, 언론은 진실성의 문제를 시간의 문제와 함께 다룬다. 진실성을 높이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법률가나 과학자와 달리 기자는 불충분한 취재 내용을 그날그날 보도한다. 법률이 ‘진실성’의 변수를 다루는 1차 방정식이라면, 언론은 ‘시의성’과 ‘진실성’의 변수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2차 방정식이다. 현대 언론은 이 방정식의 풀이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고, 종종 진실성을 희생해 시의성만 좇는다. 이 때문에 언론의 객체주의는 법률이나 과학보다 훨씬 자주 의심받는다.

 

둘째, 과학과 법률은 진실성 검증의 단계와 절차를 반드시 밟지만, 언론은 이를 종종 생략한다. 예컨대 재판에서는 검사와 변호사가 증거에 입각한 주장을 각각 제기해 판사가 종합 판단하는데, 이 과정을 서로 다른 판사가 세 차례 반복해 최종 결정하고, 이 절차에는 어김이 없다. 이에 비해 언론은 기자가 진실의 여러 측면을 두루 취재하고(교차 검증) 그 결과를 에디터가 검토하는(게이트키핑) 절차를 내세웠지만, 취재 기자가 검증을 생략하거나 에디터가 게이트키핑 하지 않은 기사들이 너무도 많다.

 

셋째, 상업과 시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 영역은 없지만, 특히 언론은 법률과 과학보다 시장 논리에 더 크게 좌우된다. 더 많은 독자, 더 많은 광고주, 더 많은 판매부수 등을 지향하는 시장 논리는 진실성보다 시의성을 앞세우게 만들거나, 기자와 에디터의 교차 검증을 생략하게 만든다. 법률과 과학은 이윤의 논리에서 한 발 떨어져 있지만, 사적 기업 활동인 언론은 시장 논리 안에서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넷째, 이러한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 언론은 복잡한 검증을 생략하고 빠른 시간에 보도할 수 있는 ‘의견 표현’의 유혹에 더 쉽게 굴복한다. ‘의견 표현의 경제성’을 드러내는 대표 사례로 종합편성채널의 뉴스 전략이 있다. 한국의 종합편성채널은 상당한 인력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탐사보도 대신 몇 명의 패널과 앵커가 의견을 교환하는 시사 토론을 대표 상품으로 내놓고 지상파 방송과 경쟁했다. 정도와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대다수 한국 언론은 의견 표현의 경제성에 압도당하고 있다.

 

결국 한국 언론은 세계의 물성을 파악하겠다고 선언해놓고 실제로는 의견을 주로 보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언론의 객체주의는 사회적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돼 있다. 현재 한국 언론의 상황이 딱 그러하다.

 

 

취재진으로 분주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 한국 언론은 정치권력에 영합하느라 사실 발굴과 검증의 관행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출입처 중심의 형식적 스트레이트 사건 보도에 매몰된 채 21세기를 맞았다. Ⓒ연합뉴스

 

 

얄팍한 의견보단 진실 추구하는 사실 보도 지향해야

 

남재일 선생님이 겨냥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객체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한국 언론의 현실, 즉 사실 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의견 표현만 내놓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차라리 의견 표현의 품질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객관주의 관행이 사실성을 입증하는 전략에 집중돼 상대적으로 언론의 의견 표현을 안내하는 윤리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던 만큼, 이제는 ‘의견 표현의 규범’을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 글의 핵심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다만 선생님의 글이 오독되거나 오용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미 ‘멸종의 위기’에 처한 사실 발굴과 검증의 역할을 한국 언론이 더 축소하거나 경시하는 근거로 받아들이면 어쩌나 싶다.

 

한국 언론에는 의견을 우대하고 사실을 경시해 온 오랜 역사가 있다. 한국 언론은 (남재일 선생님이 여러 연구에서 제기한 것처럼) 정치권력에 영합하느라 사실 발굴과 검증의 관행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출입처 중심의 형식적 스트레이트 사건 보도에 매몰된 채 21세기를 맞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또 다른 지점은 사건 보도 관행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의견 우대 관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권의 압력으로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행간에 의미를 담아 ‘할 말을 하는’ 지사(志士)적 칼럼니스트가 기자들 사이에서 역할 모델로 존경받았고, 이러한 정서는 지금까지도 ‘초년 기자는 출입처 기사를 쓰고, 중견 기자는 칼럼을 쓴다’는 이상한 관행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 기자 집단의 상당수가 이른바 ‘SKY’ 출신의 엘리트로 채워졌고, 이들이 정치가, 기업가, 행정 관료 등을 ‘계도 대상’으로 여겼던 사회문화적 환경도 적잖은 영향을 줬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풍토에 더해 최근 디지털 뉴스 환경은 ‘의견 표현의 경제성’을 극대화했다. 지난해 박사 학위 논문과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보고서를 쓰면서 발견한, 한국 기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출입처 보도자료와 통신사 기사를 그대로 옮겨 쓰면서 각자의 해석과 생각을 덧입힌 ‘얄팍한 해설 기사’를 쓰는 데 있었다. 사실 발굴과 검증을 소홀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 과정 자체를 생략하고, 간편한 해석과 주장에 집중해 뉴스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의 언론학자 토마스 패터슨(Thomas Patterson)의 표현대로 “기자들이 공공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슈를) 평가할 자격을 갖고 있다는 허상(fiction)에 기초한” 해설 기사와 칼럼이 넘쳐나게 됐다. 상황을 더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해설 기사, 칼럼, 그리고 사설 등이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환경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무한정 유포할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을 마련했다. 해설 기사나 칼럼은 이러한 ‘의견의 바다’에 생수 한 병을 붓는 것과 비슷하다.

 

오늘의 한국 언론 현실을 규정하는 기본적 특징은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객체주의가 반(反)정립하려 했던 요소와 거의 일치한다. 한국 사회에 유통되는 정보는 정부, 정당, 기업, 홍보 기관이 발행하는 보도자료와 기자회견을 그대로 옮겨 쓴 기사에 기초한다. 게다가 디지털 환경은 ‘동일한 정보를 복제한 동질적 뉴스의 홍수’를 만들었다. 프로파간다, 홍보 조직, 그리고 정파적 의견이 범람했던 20세기 초반의 언론 환경이 디지털에 힘입어 훨씬 더 증폭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결과, 보도자료에 주석을 달거나 의견을 밝히는 기자는 많아진 반면, 정보의 진위를 의심해 검증하거나 그 이면의 사실을 파고드는 기자는 적어졌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언론 현실에 비춰 ‘허술한 의견’보다는 ‘진실을 추구하는 사실 보도’가 훨씬 더 낫다고 강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남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사회는 풍부한 사실성과 더 설득력 있는 의견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 언론 생태계에서 고갈에 이른 것은 설득력을 갖춘 의견이 아니라 의견을 뒷받침할 풍부한 사실이 아닐까. 특히 기자들이 집중해야 할 일은 의견의 제련이 아니라 사실의 발굴과 검증이 아닐까.

 

사실과 의견을 분리하는 방법

 

‘뉴스는 사실 전달을 방법론으로 하는 의견’이라는 남 선생님의 논지를 따르더라도 일련의 ‘분리 규범’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견의 단계와 절차를 구분해 접근하지 않으면, 사실 보도에 대한 기왕의 취약한 경계마저 완전히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어떤 사실을 발굴해 보도할 것인지 결정하는 의견 또는 관점의 단계가 있다. 보도자료만 쓸 것인지, 보도자료 이면의 사실을 탐사해 내러티브 방식으로 써볼 것인지 결정하는 단계다. 이는 기자 개인의 양심, 사상, 세계관의 영역인데, 이를 기사의 어딘가에 투명하게 밝히는 것은 권장할 만하다.

 

둘째, 사실을 발굴하고 검증하는 과정에 기자의 의견 또는 관점이 작용할 수 있다. 보수 정당을 싫어하는 기자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보수 정치인과 인터뷰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단계이다. 객체주의 저널리즘은 이 단계에서의 ‘의견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거나 유보하라고 일러준다. 그가 싫어도 그를 만나고, 그의 진술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보도하는 것이 사실 발굴과 검증의 기본이다.

 

셋째, 발굴하고 검증한 사실의 맥락을 드러내기 위해 추론하는 과정에서 기자의 의견 또는 관점이 작용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지식의 수준이 중요하다. 한국의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인의 욕망과 동기’를 분석하는 정치 해설 기사를 곧잘 쓰는데, 의회 절차와 헌법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 더 높은 수준의 추론과 해석이 담긴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의견 또는 관점을 배제하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방법과 절차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전문 기자’ 또는 ‘지식인 기자’를 양성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넷째, 일련의 사실을 종합했을 때, 기자의 최종 판단과 의견이 형성되는 단계가 있다. 예컨대 갑이 을을 때렸다고 쓰는 것은 ‘사실 보도’이지만, 그 사실에 입각해 갑이 나쁜 사람이라고 쓰는 것은 ‘의견 표현’이다. 나는 이 단계의 의견 표현을 기사에 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자의 마음속에 담아두면 되는 일이다. 그것을 기사에 밝히는 순간, 주관과 의견을 유보하고 사실을 개방적으로 발굴해 검증하는 두 번째 단계의 정당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다. 반드시 드러내야만 하는 기자의 의견이 있다면, 별개의 칼럼에 밝혀 적으면 된다.

 

사실과 의견의 단계별 구분과 더불어 기자의 역할과 언론의 역할도 분리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언론은 사실 전달과 함께 의견 소통의 역할을 해야 한다. 다만 그 역할을 기자가 도맡을 필요는 없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견을 제기할 능력을 갖춘 이가 희귀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전문가와 지식인이 넘쳐난다. 의견 표현의 기회와 권리는 그들에게 양보해 그들의 의견을 언론이 보도하고 유통하면 된다. 대신 기자는 ‘더 많은 노력과 분투가 필요한’ 사실 발굴과 검증의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나아가 의견을 표현하는 기자의 ‘자격’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정치와 관련 없는 이들이 출연해 정치 이슈를 함부로 논하는 종편 프로그램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셌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칼럼이나 사설을 쓰는 기자들은 ‘무자격 종편 패널’과 얼마나 다를까. 경력 5년차 안팎의 기자들에게 세상만사를 논평할 자격을 부여하는 한국 언론의 관행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깊이 의심할 때가 왔다.

 

마지막으로 정파성에 대해서도 짧게 짚겠다. 뉴욕타임스가 바이든 지지 사설을 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입장의 정파성은 투명성에 입각해 더 세련돼질 수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바이든을 지지하게 됐는지 밝히면, 독자들은 그 입장을 더 깊이 숙고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보도의 정파성은 잘못이다. 입장과 관점에 입각해 사실을 취사선택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널리즘 연구자들이 문제 삼은 것도 이 대목이다. 사실 보도의 정파성은 투명성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진보 정당을 지지하므로 진보 정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실만 보도해 기사를 썼다’고 솔직하게 밝힌다 해서 그 기사가 ‘좋은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객체주의 저널리즘이 없어도 ‘의견의 자유 시장’은 유지될 수 있다. 다만 의견 시장의 폐해를 조정해줄 ‘사실과 진실의 중심’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 사회의 언론 생태계는 정당의 선전조직, 힘 있는 자들의 홍보 조직, 그리고 간헐적으로 저항하는 유튜버와 블로거로 구성될 것이다. 그 세상에서 진실은 권력을 가진 자의 생각이나 발언과 동일시될 것이다.

 

객체주의 저널리즘은 다른 종의 동물들이 모여 갈증을 해소하는 사바나의 호수와 같다. 의견과 관점이 달랐던 TV조선, JTBC, 한겨레가 사실의 호수에서 만나 머리를 맞댄 적이 있다. 사실을 추적한 일련의 보도 이후, ‘촛불 집회’라는 의견의 광장이 열렸다. 설득력 있는 의견이 소통되는 사회를 위해서라도 기자들이 사실 발굴과 진실 추구에 몰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순간, 그런 역할에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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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 안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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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 : 202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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