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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베끼기 저널리즘] 무분별한 표절 및 베끼기 보도 실태
커버스토리 | 등록일 : 2023-02-24

복제 보도, 표절은 한국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기자 전문직주의의 경계를 허무는 이 같은 만행이 묵인되고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언론의 무분별한 베껴 쓰기와 받아 쓰기 실태를 짚어보고 그 해결책을 고민해본다. 편집자 주

 

방학을 맞은 교수가 무에 그리 바쁠까 싶겠지만, 겨우내 시간이 부족했다. 학생들은 방학에도 공부하므로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논문과 연구서를 마쳐야 하니 글 읽고 쓰는 일도 중단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기사 표절에 관한 글을 의뢰받았다. 내 궁리는 못된 방향으로 굴러갔다. 그때 쓴 글을 재활용하면 안 될까. 딱 1년 전, 관훈저널에 <한국 언론의 미개한 관행, 출처 표기 없는 복제 보도>라는 글을 썼다. 이번 주제와 거의 같다. 조금 고쳐 내면 되지 않을까. 절대 안 바뀔 것 같은 한국 언론의 고질인데, 새로 쓸 내용도 없지 않은가. 얼른 털고 쉬면 안 될까.

 

기자 시절엔 그렇게 했다. 특히 칼럼 쓰는 일이 고역이어서 예전에 썼거나 다른 매체에 실린 글을 (출처를 밝히고) 다듬어 게재한 적이 있다. 그게 창피한 짓이라는 걸 박사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 내가 쓴 글이라도, 출처를 밝혀도, 그대로 또는 일부만 수정해 다시 싣는 행위는 ‘포괄적 중복 게재’에 해당한다. 잠시 유혹에 끌렸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전부 제대로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정신 붙들어 매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도 붙잡았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안 그러는가. 학계에서 괜찮지 않은 일이 언론계에선 왜 괜찮은가.

 

경계 작업의 최종 도착지는 자율 규제

 

‘경계 작업(boundary-work)’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학사회학자인 토마스 기어린(Thomas F. Gieryn)은 종교인, 기술자, 예술가 등과 구분되는 과학자의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 형성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 개념을 적용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않으므로 그들과 다르다’는 경계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경계 작업이다. 물론 그 경계는 굵은 직선으로 그어지지 않는다. 전문직의 영역은 모호하고 가변적이다. 전문직주의가 엘리트주의로 경도될 위험도 있다. 그래도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역할과 능력을 고도화하는 노력은 사회적으로 보탬이 된다. 과학자, 의사, 판사, 교수가 ‘유사 과학/의학/법률/학문’의 영역과 뚜렷이 구분되는 실력과 윤리를 쌓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도 늘어난다.

 

경계 작업의 출발은 내가 하는 일을 다른 이의 일과 차별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술자와 달리 과학자는 진실 그 자체에 복무한다’고 경계를 설정하는 식이다. 뒤이어 진실에 복무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방법을 익히는 교육·훈련의 체계를 만들며, 실행에 관한 윤리와 규범도 마련한다.

 

경계 작업의 최종 도착지는 자율 규제다. 예를 들어, 사익을 위해 연구를 조작한 이를 적발해 과학자 집단에서 퇴출하는 것이다. 어느 직업 집단의 전문직주의 수준을 평가하려면, 자율 규제의 양상과 정도를 살펴보면 된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히 규범·윤리 위반자를 솎아내는 이들이 진정한 전문직 집단이다.

 

이런 의미의 전문직에 기자가 과연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내 생각을 적자면, 한국 언론계에 높은 수준을 갖춘 기자가 없지 않지만, 대다수는 싸구려 기자, 좋게 봐도 소박한 생활인으로 사는 듯하다. 제 하는 일의 경계를 정립하지 않고, 간단한 훈련으로 익힐 수 있는 단순노동을 반복하면서, 임금과 휴가의 보상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다.

 

베껴 쓰고 받아 쓰고 섞어 쓰는 관행

 

기자를 전문직에서 떼어놓고 생활인으로 주저앉히는 노동의 핵심은 베껴 쓰기다. 이를 일반적으로 ‘표절’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법적 규제보다 자율 규제를 추구하자는 맥락을 더해) 나는 이를 저널리즘 개념인 ‘복제 보도’라고 부른다. 복제 보도는 보도·홍보·발표 자료, 통신사 및 타사 기사, 블로그·유튜브·커뮤니티 등 웹 자료, 소셜미디어의 자료 등을 (대부분 출처 표기 없이) 그대로 옮겨 보도하는 관행이다. 복제 보도는 블로거, 유튜버, 정치인, 선동가와 기자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도록 만들어, 기자의 전문직주의 경계를 허문다. 복제 보도 때문에 ‘이런 기사라면 나도 쓰겠다’는 생각이 세상에 퍼져간다.

 

복제 보도, 또는 표절이 한국 언론계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는 간단한 방법으로 항상 확인할 수 있다. 마감에 쫓겨 이 글을 적던 지난 2월 22일 오후, 현대로템이 호주 전동차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중앙일보가 ‘단독’이라며 보도했다. ‘현대로템’을 키워드로 포털 다음에 올라온 기사를 검색하면, 적어도 5개 언론이 첫 보도 이후 3시간 만에 대동소이한 내용을 보도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언론의 수준이 여기에 그대로 드러난다.[표]

 

 


 

 

중앙일보는 첫 보도에서 ‘현지 한인 소식통’만 인용했는데, 취재원을 왜 익명으로 숨겼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익명이라도 그 실체적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신상 정보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으며, 당사자인 현대로템을 취재하지 않았다. 뒤이어 보도한 다른 언론은 더욱 가관이다. 첫 보도 내용에 추가로 보탠 정보가 거의 없는데도, 5개 언론 모두 중앙일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뉴스1과 조선비즈는 현대로템을 취재한 것 같기도 한데, 그 취재원을 ‘관계자’라고만 얼버무렸다. 통신사인 뉴스1은 핵심 정보의 출처를 ‘업계에 따르면’이라고 적었고, 이후 다른 언론도 같은 방식으로 리드 문장을 적었다. 그나마 정보 출처를 ‘일부 매체’라고 적은 아시아경제의 기사는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됐다. 언론학자 이전에 독자로서 궁금하다. 현지 소식통은 누구인가. 업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두 문장만 쓰겠다면 왜 굳이 보도하는가. 출처를 표기하지 않아, 누가 누굴 베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런 기사들이 양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연유를 짐작 못 할 바는 아니다. 1997년 11월 기자가 됐을 때, 내가 선배로부터 처음 배우고 익힌 단어는 ‘도꾸다니(단독 보도하기)’, ‘우라까이(타사 기사 베끼기)’, ‘반까이(낙종 만회하는 단독 보도하기)’였다. 그 시절 기자가 하는 일의 실체는 명쾌하고 단순했다. 단독 기사를 써야 한다. 낙종했다면 남의 기사를 베껴 빨리 보도한다. 다른 정보를 단독 보도해 만회한다. 사반세기가 흐른 요즘엔 기자 일이 더욱 단순해졌다. ‘도꾸다니’나 ‘반까이’의 압력은 옅어지고 오직 ‘우라까이’만 강조되는데, 출처 표기를 정착시킨 적이 없으니 베껴 쓰고 받아 쓰고 섞어 쓰는 관행만 남아버렸다.

 

그 야만성을 알아차린 것은 기자 10년 차 무렵이었다. 우연히 들여다본 미국 저널리즘대학원의 교과서에서 ‘인용과 출처(Quotation and Attribution)’를 20여 쪽에 걸쳐 설명한 것을 읽고, 기가 질려 버렸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자세히 적는가 말이다. 그 무렵, 뉴욕타임스의 취재 보도 준칙(Standards and Ethics)을 읽었을 때는 그저 압도당했다. 10만여 글자를 문서에 옮기니 A4 용지 40쪽이 넘었다. 검증과 인용 등에 관한 일반 사항은 차치하고, ‘다른 언론 보도의 인용(Other People’s Reporting)’에 관한 내용만 일부 옮긴다.

 

“다른 조직이 수집한 사실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출처를 밝힌다. 이 원칙은 뉴스통신은 물론 신문, 잡지, 단행본, 방송에 모두 적용된다. (…) 바람직한 것은, 시간과 거리가 허락하는 한, 우리 스스로 취재하거나, 다른 언론의 기사를 우리가 검증하는 것이다. 직접 확인한 사실에 대한 출처를 다른 언론으로 표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존중(courtesy)과 정직(candor)의 차원에서, 처음 보도한 언론을 우리의 기사에 밝힌다. (이하 생략)” (Standards and Ethics, The New York Times Company) 

 

낙종했더라도, 뒤늦게 따라 보도하더라도, 직접 취재한 것만 쓰되, 이를 먼저 보도한 언론을 존중해 정직하게 그 언론사를 밝히라는 것이다. 무려 존중과 정직이라니, 고귀하고 멋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나중에 박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 단어를 다시 만났다. 요즘에도 가끔 마주친다. 예를 들어, 대학 교원이 매년 수강해야 하는 ‘연구 윤리’ 온라인 강좌에 존중과 정직이 등장한다. 한국연구재단이 제공하는 자료 일부를 인용한다.

 

“표절과 중복게재 등 연구부정행위는 학술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정직성을 해치고, 작성한 저작물을 읽는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임. 학술 연구에서 객관성, 정확성, 정직성 등은 매우 중요하며, 이중 정직성은 출판 윤리의 핵심 요소임. [중략] 타인의 학술적 내용을 자신의 논문 혹은 보고서에 인용하는 경우, 올바른 출처 표기는 원저작자의 학술적 공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표하는 동시에, (…) 주제와 관련한 정보나 자료를 다른 연구자들이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음.” (이원용·이경진·이혜진, 2022, 8쪽)

 

연구자를 기자로, 논문을 기사로 바꿔, 취재 보도 준칙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학이나 정치와 밀착했던 근대 언론과 달리, 20세기에 형성된 현대 저널리즘은 과학을 동경하고 과학으로부터 배워 과학처럼 되려는 시도였다.

 

앞서 소개한 기어린의 논의를 빌어 적자면, 과학은 (종교와 달리) 관찰 등 경험에 근거해서만 추론하는 지적 활동이고, 오류와 반증 가능성에 열린 개방적·구성적 지식 체계이며, 무엇보다 감정·편견·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있는 그대로의 사실(facts of nature)’을 궁구하는 일이다. 바로 그 역할을 일상적으로 수행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이들이 현대 저널리즘의 경계를 개척했다. 현대 저널리즘의 취재 방법 및 직업윤리가 과학 또는 학문 세계의 것과 유사한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표절의 불이익 아닌 이익 배우는 것이 문제

 

그렇다면, 방법과 윤리의 유사성 또는 관련성에도 불구하고, 과학계에 적용되는 표절 금지 및 출처 표기 원칙이 (특히 한국의) 언론계에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가 기자보다 더 양심적이지는 않다. 주지하다시피 학계에서도 표절은 종종 발생한다. 다만, 표절이나 출처 표기와 관련해 언론계와 결정적으로 다른 학계의 체계가 있다.

 

첫째, 표절하면 안 된다고 지속적, 반복적으로 교육한다. 학위 과정에서 지도 교수한테 그렇게 배운다. 논문 게재를 위해 반드시 충족해야 할 학술지 심사 원칙에서도 이를 강조한다. 대학에 취직하면 그 학교의 연구 윤리 규정에 똑똑히 적혀 있다. 각종 윤리 교육 강좌를 수강하지 않으면, 정부 또는 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

 

둘째, 표절하면 실질적인 불이익을 받는다. 논문 심사를 통과할 수 없고, 논문 게재에 성공해도 나중에 들통나면 취소된다. 돈을 받아 연구했다면 연구비를 토해내야 할 것이고, 그 행위로 인해 교원이나 연구원의 자리까지 잃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자기 표절을 잠시 고민하다 포기했다고 적었는데, 그 판단에는 양심이 아니라 교육·훈련을 통해 습득한 이익 계산의 심리가 있다. 잠깐의 편익을 위해 그런 짓을 벌이면, 명예나 위신은 둘째치고 밥벌이가 날아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모든 구성원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게 전문직의 경계 작업이다. 이 영토에 머물려면 무엇을 반드시 하고, 무엇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할지 계속 가르치고 훈련

하는 것이다. 그걸 어기면 전문직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베껴 쓰고 받아 쓰는 한국 언론의 관행이 좀체 고쳐지지 않는 것은 경계 작업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사 준비, 또는 입사 초기의 교육 과정에서 정확한 출처 표기의 이유와 방법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 기자가 된 뒤에는 표절의 불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익을 배운다. 기자 개인에게도 좋고 언론사 조직에도 좋으니, 표절하라고 뉴스룸의 리더들이 종용한다.

 

유력한 대형 중앙 일간지의 디지털 부서에서 하루 10여 건의 기사를 작성하는 초년 기자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통신사, 타사 기사, 소셜미디어 등에 올라온 글을 그대로 베껴 순식간에 기사를 썼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게 좋은 기사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이슈 대응이 빨라야 접속자가 늘고, 접속자가 많아지면 공들여 쓴 좋은 기사를 읽는 사람도 늘어난다고 에디터가 항상 강조한다. 그러니 내가 쓰는 기사도 결과적으론 좋은 기사의 확산에 도움이 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업무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고, 일하는 동안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오히려 좋다”며 그는 살짝 웃었다. 표절과 복제 보도가 기자와 뉴스룸에 두루 이익이 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표절 또는 복제 보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이러한 ‘복제 보도의 이익 구조’를 깨트리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 점에 관한 한, 학계의 표절 방지 체계를 벤치마킹할 수 있다. 표절하고도 박사 학위를 유지하는 정치적 인물이 간혹 뉴스에 등장하지만, 대체로 보아 학자의 표절은 개인과 소속 기관의 불이익으로 귀결된다. 이 구조를 언론계에 도입할 여러 경로가 있겠지만, 떠오르는 아이디어 몇 개만 적는다.

 

첫째, 포털 뉴스제휴평가위원회(이하 제평위)의 입점·퇴출 심사 기준에 표절 및 복제 보도 금지 항목을 추가하는 것이 좋겠다. 포털 그리고 제평위의 역할에 논란이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한국 언론사들의 막대한 이익이 이들에게 달려있다. 제평위 심사 기준 덕분에 광고·홍보성 기사가 많이 줄어든 전례도 있다. 독자적 취재 없이 타사 단독 보도를 따라 쓰면서도, 처음 보도한 언론을 정확하게 표기하지 않은 기사가 다수 적발된 언론사는 포털 제휴 심사에서 탈락시켜야 한다.

 

둘째,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표절 및 복제 보도에 관한 징계를 활성화하는 것이 좋겠다. 신문윤리위는 윤리강령과 실천요강을 위배한 언론에 주의, 경고, 과징금 등의 징계를 내리는 기관이다. 신문윤리실천요강 8조(‘저작물의 전재와 인용’)에는 출처 표기와 표절 금지 원칙이 명시돼있다. 물론 그 심의와 징계가 솜방망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솜털로 징계하더라도 잘못을 경고하는 일은 필요하다. 반복적으로 창피라도 줘야 뉴스룸 책임자들이 각성할 것이다. 기왕이면 향후 몇 년 동안 표절 보도만 집중 심사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셋째,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실시하는 수습기자 기본교육 과정에서 하루 종일 ‘인용과 출처 표기’ 교육만 하는 것이 좋겠다. 탐사보도, 내러티브, 데이터 저널리즘, 인터랙티브 등 첨단과 미래를 향한 교육도 필요하지만, 그 모든 공부를 무력화하는 게 표절 및 복제 보도이니 초년 기자의 교육도 그것에 무게를 많이 둬야 한다. 적어도 하루는 이론과 실습에 집중하도록 강좌를 구성하는 게 좋겠다. 출처 표기 원칙에 무심한 데스크를 설득하는 방법까지 가르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학계 수준에 버금가는 교육 체계, 그리고 상벌 체계를 어서 구축해야 하는 이유를 기자라면 생존 본능 수준에서 알고 있다. 얼마 전, 다른 유튜버의 콘텐츠를 표절한 유튜버가 논란이 됐다. 이를 보도한 기사들의 댓글을 보고 나는 더 놀랐다. ‘유튜버는 베끼면 안 되고, 기자는 베껴도 되냐?’ 

 

기존의 온갖 정보를 모아 수려한 글로 요약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오히려 놀랍지 않다. 이미 해외 언론은 10여 년 전부터 단순 정보를 수집해 보도하는 로봇 또는 AI 저널리즘을 도입해 인간 기자를 감원해왔다.

 

베껴 쓰기는 초등학생 이상의 지적 수준을 갖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더 잘 베끼는 인공지능 기자’도 나타났다. 과학의 역할을 일상적으로 도모하겠다는 드높은 이상에 가닿자는 게 아니다. 그 영토에 닿으려면 갈 길이 한참 멀다. 그 이상은 원래부터 실현 불가능했다고 비판하는 학자도 없지 않다. 다만, 소박한 생활인의 소시민적 정서에 호소한다.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단순·반복·복제 노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밥벌이가 불가능하다. 그 이치는 기자 개인은 물론 언론사에도 적용된다. 복제 보도만 일삼다가 망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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