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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갈등 부추기는 언론] 언론은 갈등을 어떻게 다뤘나3: 정치 갈등
커버스토리 | 등록일 : 2021-09-03

정파성은 언론의 특징이다. 세계 모든 언론이 정파성을 띠지만, 한국 언론은 스스로 정당의 구실을 한다. ‘부당한 정파성’으로 대변되는 정치 보도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해결 방안을 고민해 본다. 편집자 주 

 

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제대로 보도하는 길은 정치부 기자들이 정치인의 입을 그만 쳐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뉴스1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나 1980년대에 사춘기를 치르고 19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나는 ‘절멸’, ‘청산’, ‘타도’의 구호 아래 정치를 보고 겪었다. 멸공을 내세운 군사 정권 시절의 웅변대회를 다녔고, 몇 권의 역사책을 읽은 뒤 친일 청산을 꿈꿨으며, 나이를 더 먹은 무렵에는 정권을 타도해 세상을 바꾸자고 떠들었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내가 이해하는 정치 관념에 이끌려 언론에 발을 들였다.

 

길게 적기 민망한 생애를 몇 줄이나마 적는 이유가 있다. 정치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문제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다. ‘정파 저널리즘’에 적잖이 가담했다. 언론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그동안 제 눈을 찔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개인적 반성을 포함해 학문적 충고를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현장 기자들의 현실적 고민에 도움이 되길 빈다.

 

한국 언론의 정파성 문제

 

한국의 정치 보도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돼 있다. 특히 국내 언론학자들은 ‘정파성’ 문제에 주목해왔다. 그 용어 자체가 대단히 한국적이다. 이에 해당하는 학문적 개념은 ‘정당-언론 병행성(party-media parallelism)’ 또는 ‘정치 병행성(political parallelism)’이다. 그런데 정당과 언론이 얼마나 조응하는지를 일컫는 병행성 개념만으로는 한국 언론의 문제를 포착하기 힘들다. ‘정치적 당파’라는 뜻을 담은 정파성이 보편적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한국 언론의 문제가 그만큼 독특하다는 방증이다.

 

이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거나 정돈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그간의 논의를 압축하면서도 대표할 만하고, 기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김영욱(2011)의 논문을 추천한다. <한국 언론의 정파성과 사회적 소통의 위기>에서 김영욱은 한국에서 정파적 보도가 고질에 이르게 된 배경, 정당한 정파성과 그렇지 않은 정파성의 차이, 부당한 정파성이 사회적 소통의 걸림돌인 이유 등을 명료하게 설명했다.

 

특히 이 논문은 정당의 역할을 대행 또는 대체하려는 것에서 한국 언론의 정파성이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원문의 내용을 감히 번안해 설명하자면, 민주주의는 갈등을 해결하는 제도이고, 중요한 갈등을 드러내어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정당인데, 한국의 정당은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언론이 이를 대행하거나 오히려 주도했다.

 

한국 언론의 정파성은 이념적·정치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차원의 정파성은 누구에게나 있고 세계 모든 언론에 있다. 이는 ‘정당한 정파성’의 영역에 해당한다. 반면 한국 언론은 스스로 정당의 구실을 한다. 그래서 정당의 방식으로 사실을 다룬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조작하고 지엽적 사실을 부풀리거나 중요한 사실을 감추는 것이 프로파간다인데,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는 이러한 정치적 선전과 비슷한 작법을 택해왔다. 이것이 바로 ‘부당한 정파성’의 문제다.

 

여기까지만 짚으면, 정파성은 언론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이 정당의 역할을 대행해 왔다고 해서, 한국의 정당을 ‘무고한 피해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언론 체계의 배경에 정당 구조, 나아가 정치 구조가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 학자들도 일찍이 설파한 바 있다. 대표적 연구로 꼽히는 할린(Daniel C. Hallin)과 만치니(Paolo Mancini)(2004)의 저서와 후속 논문들을 보면, 언론이 무슨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지의 모델은 정당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바가 크다.

 

다당제인 유럽에서는 의견과 주장을 중심으로 하는 정파적 언론이 보편적이다. 양당제가 정착한 미국과 영국에서는 사실 보도 중심의 객관주의 언론이 자리 잡았다. 할린과 만치니는 어느 언론 모델을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정당 구조와 언론 모델이 쌍을 이뤄 ‘공론의 규칙’을 형성하는 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당제의 정치적 경쟁은 권력 분점과 연립 정부로 귀결된다. 분점과 연립의 파트너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각 언론이 분명한 입장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즉, 개별 언론이 정파적이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다원성을 유지할 수 있다.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합의해 공존하는 정치 규칙을 갖고 있으므로 언론의 정파성이 연립과 분점의 토대를 위협하지도 않는다.

 

이에 비해 양당제의 선거는 권력 독점을 불러온다. 현대의 양당제는 입법과 행정은 물론 사법 권력까지 독식할 수 있는 제도다. 이 때문에 선거가 끝나도 야당은 여당을 공격하고, 선거에 이겨도 여당은 야당을 배척한다. 이런 대결 구도에서 언론마저 균형을 잃으면 공론장은 붕괴할 것이다. 여야의 극한 대결에 사회 전체가 휘말려 내전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하려면, 언론은 다양한 의견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 의견 조정의 중심이 되는 ‘사실 보도’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 불편부당성을 내세운 영국 BBC나 탐사보도를 앞세운 미국 뉴욕타임스의 역할에 대한 (정파를 넘어선) 사회적 존중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언론이 갈등을 다루는 방법

 

그렇다면 한국의 언론 체계는 어떠한 정당 구조와 연결돼 있을까? 이준웅·조항제·송현주·정준희(2010)의 연구인 <한국사회 매체 체계의 특성: 민주화 이행 모형의 제안>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국내 학계의 드문 대답이자 탁월한 분석이다. 이 연구는 한국 언론의 정파성이 한국 정당 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특히 갈등을 제시·조정하는 방법에서 한국 특유의 정파성이 비롯했다는 점을 체계적으로 밝혔다.

 

연구자들은 여러 정파 언론으로 구성된 한국의 언론 체계가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남유럽식 극화(極化) 다원주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정당이 취약해 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남유럽 모델과 다르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한국의 언론 체계를 영미나 유럽과 구분되는 ‘민주화 이행기 모델’이라고 정의했다.

 

민주화 이행기의 한국 언론은 “정파적 편향성을 동원하여 특정 갈등을 부각하는 정당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데, 갈등을 조정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는 “갈등 조장 커뮤니케이션”을 주로 구사한다고 연구자들은 짚었다.

 

정치적 갈등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로부터 비롯한다. 갈등은 없애고 가려야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어 논의해 조정하거나 해소하는 것이다. 정당은 그러한 갈등을 ‘조직’하고, 시민은 투표를 통해 갈등의 해결책을 선택한다고 쉐보르스키는 설명했다. 어떤 갈등을 드러내는지에 따라 정당의 노선과 정책(공화당과 민주당 등)이 구분되고, 이를 어떻게 조정·해결하는지에 따라 정치 제도의 수준과 성격(대통령제와 내각제 등)이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정당 경쟁의 기초가 되는 사실 정보와 다양한 의견의 소통을 맡는다. 그 방법과 형태에 따라 언론의 특성(의견 언론과 객관 언론 등)도 결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언론은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 것일까? 박영흠·김균(2016)의 논문인 <의례로서의 저널리즘: 한국 저널리즘의 정파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 영감을 제공한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굵은 글씨는 필자의 표시다.

 

“오늘날 한국 저널리즘의 정파성은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도출된 이념과 노선보다는 감정과 도덕에 기반을 둔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고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잘못했다는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반대쪽 진영은 (중략) 사실의 왜곡이나 과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정적 공격과 악마화(demonization)의 대상이 된다. 자신들은 본질적으로 선이고 상대편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감정적·도덕적 정파성은 타협과 합의를 가능케 하는 공통의 영역이나 중간 지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언론 간의 쟁투가 극단화되고 선의의 경쟁보다는 서로를 파멸시키기 위한 증오의 대결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수와 진보 간의 건전한 경쟁과 합리적 토론을 추구하는 서구 저널리즘의 정파성과는 상이한 성격의 정파성이다.” (박영흠·김균, 2016, 203쪽)

 

인용한 대목에 더해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악마를 파멸시키겠다는 증오의 공격 논리’에 사로잡힌 것이 언론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 언론(및 정치) 체계를 요약하면 대략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언론은 정당 구조로부터 밀접한 영향을 받는데 한국의 정당은 갈등의 제시·조정·해소에 미숙했고, 그 역할을 언론이 대행해왔다. 정당과 구분되는 역할을 정립하지 못한 한국 언론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조작·축소하는 정치 프로파간다의 문법으로 취재 보도 활동을 펼쳐왔다. 이로부터 공통의 정치적 이익을 나누는 정당과 언론의 ‘진영 논리’가 형성됐다.

 

둘째, 증오·혐오·열광 등 감정 공유에 기초한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한국 언론의 정치 프로파간다는 ‘상대편을 절멸하려는 선악 구도의 정파성’으로 변화해왔다. 이러한 감정적 정파성은 멸공 또는 청산의 선악 구도에 사로잡힌 정치 세력이 여전히 지배하는 양대 정당과 친연성을 발휘해 기왕의 진영 논리를 더욱 강화했다.

 

셋째, 선악 구도의 정파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언론 구조가 유지되는 바탕에는 감정 정치의 지지자 또는 감정 뉴스의 소비자들이 있다. 선거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당은 퇴화할 수밖에 없지만, 한국의 정당은 ‘집합적 열광’ 또는 ‘성스러운 신념’을 제공해 득표하는 전략에 성공해왔다. 또한 이 전략과 비슷한 방식으로 한국의 언론도 소비자들을 확보해왔다. 이로써 선악 구도의 정파성을 중심으로 정치적 이익과 기업적 이익, 그리고 쾌감의 카타르시스를 충족하는 정당-언론-군중의 연대 또는 동맹이 공고해졌다.

 

일종의 ‘내전 상태’ 야기하는 언론

 

이러한 언론 체계에서는 ‘선악의 필터’를 통과한 갈등 의제가 더 증폭돼 나타난다. 정치적 갈등에 국한해 설명하자면, 현재의 언론 체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치 의제를 생산한다.

 

첫째, 정당이 다루는 의제가 충돌해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는데, 이 가운데서도 고도의 정파적 이익이 걸린 의제만 부각되고 실재하는 사회적 갈등은 축소되거나 가려진다. 전 국민이 어떤 방식으로건 연관된 부동산·세금·복지 갈등이 정치화되지 않고,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이 정치화돼 증폭되는 식이다.

 

둘째, 정치 인물이나 세력의 경쟁이 사회 의제보다 더 강력하게 부각된다. 감정적 정파성의 세계에서는 정책의 내용이 아니라 정책의 주어가 훨씬 더 중요하다. ‘누구’를 선출할 것인지, 또는 내쫓을 것인지가 ‘무엇’을 집행할 것인지의 이슈보다 더 중대한 의제가 된다. 이미 한국 언론은 정치적 이전투구를 다루는 경마식 중계 보도로 악명을 쌓았지만, 이제는 하마평이나 가십의 수준을 넘어, 영웅, 순교자, 배신자 등의 승패가 세상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투의 무협 소설 또는 영웅 신화의 프레임으로 정치인의 대결을 다루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갈등을 보도하면, 갈등을 제시·조정·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실재하는 중대 갈등은 정치화되지 않은 채 잊히고, 선악의 이분법과 정의 관념에 입각한 정치적·이념적 갈등만 과잉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는 전 사회적인 대결 상태를 고조시켜 일종의 ‘내전 상태’를 야기한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왕정이나 독재만이 아니다. 내전도 민주주의의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등을 제도적으로 제시·조정·해결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오직 승패의 문제만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전 상황에서는 적을 없애는 것만이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간주된다. 상대를 절멸하거나 청산하려면 그 씨앗을 없애고, 씨앗이 자랄 흙까지 엎어야 한다. 주저하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한국의 정당, 언론, 그리고 극렬 지지자와 극렬 독자는 이러한 상징체계를 공유하는 도덕의 감정 상태로 악한 무리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정당, 언론, 군중은 일종의 ‘퇴마 결사체’를 형성한다.

 

그동안 국내 언론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 언론의 부당한 정파성을 한국 정당의 선악 정치와 별개의 문제로 다루면 안 된다. 선악 구도의 정파성이 정치 시장(유권자)과 언론 시장(독자와 시청자)에서 거둔 성공(?)으로 인해 한국 언론의 ‘부당한 정파성’이 고도화됐기 때문이다. 정파적 언론은 정당 및 시장의 정파성과 연동돼 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언론의 문제를 주로 지적했다. 진짜 원인은 정치 프로파간다의 업무를 언론에 하청을 주고 손쉽게 승승장구했던 오래된 양당 체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최근 나의 짧은 공부와 고민이 봉착한 막다른 골목은 따로 있다. 대부분의 문제는 경로 의존적이다. 문제가 형성된 과정 및 구조가 진단과 해법을 결정한다. 한국 언론의 부당한 정파성 문제는 거대한 이익 관계로 얽혀 오랜시절에 걸쳐 형성됐다. 이를 해결할 방법이 과연 있긴 할까. 특히 이러한 언론 상황이 문제라고 느끼는 기자, 정치인, 시민은 과연 어디에 얼마나 존재하는 것일까.

 

언론의 정파성 문제 해결하려면 


그런 회의감이 들 때마다, 감정의 정파성이 구축돼 온 논리를 따라 밟지 않으려 애써본다. 근본주의와 환원주의를 멀리해야 합리적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아래에 적는 제안은 근본, 환원, 도덕, 정의, 선악의 논리에 거리를 두려는 기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첫째, 언론사 차원에서는 정치 행위를 통한 수익 확보가 아니라, 선한 영향력과 좋은 평판으로 지속가능한 기업을 유지하려는 CEO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 한국에서 기업적으로 성공한 언론사가 사실상 조선일보밖에 없는 현실은 암담하다. 조선일보는 아주 오랫동안 강력한 정치 행위자였는데, 그래야만 언론사가 돈을 번다는 학습 효과가 한국 언론계에 만연해 있다. 이는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 대형 언론과 1인 언론 등 이념, 규모, 형태를 망라하는 국내 모든 층위의 언론 시장에서 재연되고 있다. 정파적 보도 없이도 좋은 평판과 적절한 수익을 내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언론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누군가 입증해야 그 길을 따라 밟는 언론사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 언론이 반드시 시민 주주나 사주 조합의 소유 구조를 갖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갑부 제프 베조스로 말미암아 워싱턴포스트는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언론사 오너십을 사갈시하고 시민주 언론사를 칭송하는 이분법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 세계적 언론사 가운데는 유능하고 선량한 경영주 아래서 간난신고를 치르며 성장한 곳이 있다. 그것이 한국에서도 구현 가능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뉴욕타임스의 옥스·설즈버거 가문 정도의 모범 사례가 나타난다면, 사양 산업으로 치부되는 언론계에도 진취적이고도 선량한 경영자와 투자자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한다.

 

둘째, 뉴스룸 차원에서는 ‘좌우의 정치 보도’를 중단하거나 크게 줄이고, ‘아래위의 정치 보도’를 확대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 축에서 균형감을 찾으려는 노력은 현재 한국 정당 구조에서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봐야 양쪽 모두에서 비난받기 십상이다. 갈등을 제시하는 정당의 역할을 언론이 대행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정파성’이 등장했다고 앞서 짚었는데, 정당의 정상화를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다면 ‘정당한 정파성’의 차원에서 사회 저변의 중대 의제를 정치화하는 시도를 언론이 수행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부당한 정파성의 자장에 빨려 들어가는 정치 보도를 줄여야 한다. 실무적으로는 정치부 기자, 정치 지면, 정당 보도, 정치인 해설 기사 등을 줄이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대신 사회부·경제부·탐사부 기자 등이 한국 사회의 중요 의제를 ‘정치화’하는 보도를 늘리는 것이 좋겠다. 정치인의 말을 옮겨 적는 것이 정치 기사라는 관념을 벗을 때가 됐다. 이제는 정치 보도를 천칭의 좌우에서 균형을 잡는 작업으로 치부하지 말고, 지하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펌프의 작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정치 보도는 가려진 중대 의제를 발굴해 정치를 향해 제시하는 기사다.

 

셋째, 기자 차원에서는 ‘지사적 엘리트’의 자의식을 덜어내는 것이 좋겠다. 명문대 출신의 한국 기자들이 군인이나 관료 출신의 정치인들을 은근히 깔봐도 괜찮았던 군사 정권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다. 언론의 합리성이 관료나 정치인의 합리성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기자가 정치인에게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뉘앙스로 적는 칼럼이 여전히 많다. 사회 개혁의 신념을 갖춘 이들이 정의감에 기초해 기성 정치를 일갈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게 기자의 본령은 아니라는 점을 많은 이들이 깨달으면 좋겠다. 의견 표현이 억압받던 시절에는 기자의 칼럼에 공공적 가치가 있었지만, 요즘처럼 의견이 난무하는 시절에는 오히려 의견의 중심을 잡아줄 진실 보도에 천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한국 언론계의 저변에 흐르는 지사주의(志士主義)가 부당한 정파성과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사례가 너무 많았다는 점을 기자들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치를 개혁하려던 기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 행위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한 끝에 정계에 뛰어들어 직접 정치를 행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적자면, 그렇게 정치권에 뛰어든 기자들이야말로 언론의 자율 규제와 전문직주의를 흔들어 언론 개혁을 가망 없게 만든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기자의 역할은 따로 있다. 정치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말고, 시민의 눈으로 정치적 문제를 발굴해 정치인에게 들이미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오래전에 읽은 외국 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2006년 8월 미국 세인터피터스버그타임스의 의회 담당 기자가 작성한 <공화당 대 공화당: 세포분열(Republican vs. Republican: Cellular division)>이라는 기사다. 공화당 온건파와 민주당이 연합해 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 우파는 이에 반대했다. ‘정치적 갈등 의제’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끼칠 이슈였다.

 

기자는 법안이 제출된 직후부터 상하원에서 의결됐다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까지 1년 6개월에 걸친 과정을 취재했다. 법안을 두고 공화당 온건파와 공화당 우파가 대립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의원, 보좌관, 로비스트, 이익단체, 찬반 집단, 관련 시민 당사자 등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고 상호작용했는지를 내러티브 작법으로 쓰고, 나중에는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만들었다. 예전에 이 지면에 소개한 적이 있으니 참조해도 좋겠다(《신문과방송》 2015년6월호, <미디어 포럼 – 세상을 바꾼 보도>).

 

이 기사를 내가 처음 읽은 것은 2006년 늦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문화부 학술 담당 기자였다. 학술 기자라서 많이 읽고 공부할 수 있어 좋았다. 다만 그 직전인 2004년 노무현 탄핵 국면에서 겪은 일을 돌아보느라 마음고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고백해야 하겠다. 당시 한나라당을 출입했던 나는 대통령 탄핵이 의결된 다음 날부터 인터넷에 <한나라당의 최후>라는 칼럼을 일곱 차례에 걸쳐 썼다.

 

당시에는 한나라당을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자로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지사적 결심’도 했던 것 같다. 요즘처럼 소셜미디어가 없어서 전 국민이 읽은 것 같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정치권과 언론계에서 제법 화제가 됐다. 정치적 지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거대 정당을 비난하는 글을 쓰는 것이 흔하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종의 ‘필화 사건’을 저지른 직후, 나는 정치부를 (스스로) 떠났다. 한동안 나의 글과 시절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던 무렵에 위의 기사를 읽었다.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면, 저주의 칼럼을 쓰는 대신, 탄핵에 이르는 몇 달 동안 한나라당 내부에서 벌어진 일을 세밀하게 취재해 기사로 써야 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중대한 정치적 갈등을 대하는 기자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를 나는 미국의 어느 기사로부터 뒤늦게 배웠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탓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당시의 내막을 알지 못한다. 누가 무슨 일을 어떻게 도모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대통령을 악마로 생각했던 야당이나 그 야당의 최후를 보겠다고 선언한 기자나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의와 도덕의 레토릭만 쏟아낸 결과다.

 

2021년의 정당, 의회, 청와대를 드나드는 정치부 기자들도 그 검은 우물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제대로 보도하는 길은 정치부 기자들이 정치인의 입을 그만 쳐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기자를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활용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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