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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7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 발표회가 열렸다. 이 가이드라인은 언론의 재난 취재·보도 과정에서 재난 당사자와 일반 국민, 언론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트라우마를 예방하기 위해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국립정신건강센터가 함께 만들었다. 이날 발표된 가이드라인 제작 의의와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앗아간 재난은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안긴다. 10·29 이태원 참사도 예외가 아니다. 생존자와 유가족, 구조를 위해 뛰어다녔던 경찰관과 소방관, 현장에서 상황을 목격하거나 심폐소생술에 나섰던 시민들은 참사가 지나간 뒤에도 크고 작은 트라우마와 싸워야 한다.
언론은 참사 소식을 뉴스 이용자에게 상세히 전달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사회적 공감과 조력을 끌어내지만,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유발하거나 자극하기도 한다. 참사 현장에 있던 이들은 참사를 다룬 뉴스를 보거나 언론의 취재 대상이 돼 기억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받을 때 재난을 다시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참사를 직접 겪지 않은 일반 시민도 트라우마를 겪는다. 뉴스 이용자로서 계속되는 특보를 통해 현장 영상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당사자에 버금가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재난을 취재·보도하는 언론인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끔찍한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반복적으로 당사자의 이야기를 청취하거나 영상을 편집하는 등 비극에 장시간 노출되면서 재난을 간접 경험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이 나오기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는 언론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언론은 재난과 관련한 사실을 최대한 빠르고 많이 전달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재난 당사자와 국민, 나아가 취재진이 재난 보도로 인해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체적 안전 못지않게 정신적 건강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 흐름과 동떨어진 인식이다. 이런 태도는 언론의 신뢰 회복에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국립정신건강센터는 지난 4월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을 공동으로 개발·보급하기로 했다. 지금의 언론이 트라우마를 자극해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동시에 언론이 트라우마를 예방 또는 치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반영된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국립정신건강센터 소속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중심이 돼 열 명의 전문가 추진단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가이드라인 제작에 들어갔다. 트라우마와 저널리즘 전문가들이 매달 자문회의를 열어 가이드라인의 방향과 내용을 토의하고 자구(字句) 하나까지 꼼꼼히 수정했다. 현직 경찰 출입기자들이 회람해 규범적 필요성과 현실 적용 가능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도 했다.
지난 11월 7일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 발표회’는 이러한 노력의 성과를 공개하고 의미를 논하는 자리였다. 박아란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는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위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트라우마 공감 언론’의 필요성에 관해 발표했고,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권영철 CBS 대기자, 김유나 국민일보 기자, 서수민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가 토론을 맡았다.
심민영 센터장이 발표한 가이드라인의 재난 보도 세부 지침은 준비·취재·보도 단계별로 발생할 수 있는 트라우마를 최소화하고 회복을 지향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담았다. 또한 언론인 개인이 유의해야 할 점과 언론사 조직이 취해야 할 조치를 나누어 명시했다. 트라우마를 예방하는 재난 보도는 언론인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개인과 회사 차원의 노력이 병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에서 눈여겨볼 곳은 취재 단계에서 기자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 지침들이다. 가이드라인은 재난 당사자에 대한 취재는 언제나 당사자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이뤄져야 하고, 인터뷰 전 반드시 취재원의 신체적·심리적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난을 겪은 이가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상황에 대한 통제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지 말고, 언론에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준비가 돼 있는 취재원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요구된다.
재난 당사자와 인터뷰하는 중간에 섣부른 위로를 하지 말고, 공감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이드라인은 기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취재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일 때 나타나는 반응을 소개하고, 인터뷰 때 조심해야 할 표현의 구체적 예시를 제공했다. 예컨대 “어떤 기분인지 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게 좋다”, “곧 좋아질 거다” 등의 표현은 삼가야 한다.
보도 단계에서는 재난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상 정보를 공개하거나 사생활을 노출함으로써 당사자가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유가족이 오열하거나 흥분하는 모습을 내보내는 건 재난 보도의 오랜 관습이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재난 당사자나 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부추기거나 낙인을 찍는 보도, 지나치게 공포심과 불안감을 자극하는 제목, 참혹한 장면을 여과 없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영상 역시 지양해야 한다.
건강한 기자가 건강한 뉴스를 만든다
가이드라인은 또한 언론인이 취재·보도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트라우마를 예방하는 지침도 제공하고 있다. 기자는 스스로 트라우마 고위험 직군에 속해 있음을 인지하고 자신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즉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조직에 알려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족과 친구, 동료 등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재난 상황이나 취재 대상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도 있다.
언론사 조직 차원에서 유의해야 할 일도 있다. 가급적 기자를 현장에 단독으로 파견하지 않고, 현장 기자에게 충분한 자율성을 부여하며, 기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상태를 계속 살펴야 한다. 취재가 끝난 뒤에는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고, 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자가 있을 때는 정신 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이날 발표에서 정찬승 위원장은 재난 현장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기자들이 직무상 트라우마에 노출될 위험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직무를 수행할 자질이 부족하다고 비난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정찬승 위원장은 뉴스룸 조직이 기자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수준을 높여야 조직원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정찬승 위원장은 “건강한 기자가 건강한 뉴스를 만들고, 뉴스가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하다”며 ‘트라우마 자극 언론’이 아닌 ‘트라우마 공감 언론’이 될 것을 주문했다. 트라우마 공감 언론은 잔혹한 트라우마 장면 보도를 자제하고 공감과 위로를 조성하며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마음과 사회를 치유하는 언론을 말한다.
시경 출입기자로 이태원 참사 현장에 후배 기자들을 보내고 취재를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김유나 기자는 참사 당시 가이드라인 속 권고를 따르고 싶었음에도 현실적 이유로 지키지 못했던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처음에는 끔찍한 영상을 기사에 쓰지 않았지만, 소셜미디어와 타사 보도를 통해 온라인에 ‘날것 그대로’의 사진과 영상이 올라오는 상황에서 계속 버티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유가족 취재도 최대한 자제했지만, 희생자 사연을 상세하게 쓴 경쟁사 보도를 보며 과연 올바른 판단이었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취재 기자들이 겪는 트라우마 현황도 소개했다. 김유나 기자는 “사고 후 나흘째 되는 날 몸이 이상하다고 토로하는 기자가 나왔다. 울컥 눈물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자꾸 비명이 들린다고 호소했다”고 밝혔다. 고통을 호소하는 기자들은 즉시 업무에서 배제하고 병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자 대체 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기자들이 더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하다는 공감대에 따라 회사가 적극적으로 대처했지만, 업무 공백 때문에 휴식과 치료를 보장하기 어려운 현실적 여건이 있다는 이야기다.
한편 권영철 대기자는 “재난보도준칙이나 자살 보도 권고 기준이 나온 뒤 오랫동안 현장에서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유명무실했다”고 지적하며 가이드라인의 빠른 정착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3년 자살보도 권고기준이 처음 제정됐지만, 뉴스 제목에서 ‘자살’이란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2018년 권고기준 3.0이 만들어진 뒤였다는 것이다.
또한 서수민 교수는 “미국과 한국 모두 언론인 훈련 시스템은 어디에든 던져놓더라도 기사를 갖고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처럼 견고한 기존 시스템의 관성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교육, 체크리스트 등 주입식 교육과 매뉴얼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온라인에는 제대로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은 채 도로 위 주검 사진을 담은 기사들이 마구 쏟아졌다. 장례식장에선 유가족에 대한 집요한 취재 경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경찰이 기자단에 취재 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방증하는 현실이다. 언론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하지만 최악으로 평가받았던 2014년 세월호 참사 보도와 달리 이태원 참사 보도는 어느 정도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참사 이틀 뒤부터 방송사들은 참사 현장 영상을 가급적 쓰지 않기로 했고, 언론 현업 단체들이 절제된 보도를 촉구하는 자정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몇몇 언론사는 취재진의 심리 상담과 치료 지원을 약속했다.
언론계 안팎에서 트라우마에 공감하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들이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이 현장에서 빠르게 수용되고 적극적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해본다. 대형 참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하듯,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보도 참사’도 두 번 다시 반복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