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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리뷰]북리뷰: 《뽕의 계보》
미디어 리뷰 | 등록일 : 2024-10-25

 

《뽕의계보》 ⓒ팩트스토리

 

 

저널리즘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기사는 ‘이야기’다. 글말이나 입말로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에서 ‘기사’는 다른 장르의 이야기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 안에 사람이 있고, 사건이 있고, 갈등이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기사는 이야기라는 줄기로부터 갈라져 나온 가지이거나, 이야기의 일종이다. 그래서 영어에서도 둘은 한 단어(story)다.

 

그러나 한국어에서 ‘이야기’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기사’와 묘하게 다르다. 많은 기자가 기사는 오락을 위해 지어낸 문학적 이야기와 차별되는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다. 사적 재미보다 공적 가치를 좇고, 민주주의나 사회 정의에 기여한다는 자긍심과 사명감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저널리즘은 예능이나 드라마 같은 콘텐츠보다 중요하고 우월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자신이 쓴 기사를 ‘한낱’ 이야기와 똑같이 취급한다면 언짢아할지 모른다.

 

저널리즘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은 기사가 다른 이야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전해져야 한다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언론계에선 스트레이트라는 특유의 형식이 여전히 모든 분야 기사의 기본으로 여겨진다. 내러티브 저널리즘과 같이 뉴스 스토리텔링 방식을 바꾸어보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지만, 여전히 주변부의 실험에 머무를 뿐이다. 기사와 이야기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놓는 기자들의 뿌리 깊은 인식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물 안을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미디어 이용자에게 기사는 오히려 이야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게 현실이다. 넷플릭스, 유튜브, 틱톡 등의 플랫폼에 넘쳐나는 오락 콘텐츠 속에서 뉴스는 이미 경쟁력을 잃었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더없이 효율적이지만,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들과 비교할 때 이런 냉정하고 건조한 글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기자들이 믿는 것처럼, 사실(fact)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이 큰 힘을 갖더라도 기사가 읽히지 않아 그것이 독자들에게 가닿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기자들이 스트레이트라는 전형적 뉴스 형식을 고집하며 독자들이 기사를 읽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만 한다면 사실의 힘은 계속 빛이 바래질 뿐이다.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영문학자 존 닐(John D. Niels)은 인간이 이야기를 즐기며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능에 비춰볼 때 사실보다 이야기가 더 힘이 세다면, 언론인들이 신줏단지처럼 여겨온 스트레이트 형식은 사실 저널리즘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그리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전략적으로라도 취재한 사실을 다양한 ‘이야기’ 형식에 태워 전달하는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 뉴스의 창구가 다변화된 것처럼, 뉴스의 형식도 다양하게 바꾸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 저널리즘 콘텐츠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와 ‘계급장을 떼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오늘날의 냉혹한 디지털 환경에서 이러한 시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스트레이트’ 벗어나 ‘이야기’가 된 기사

 

이미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직 기자인 전현진이 쓴 《뽕의 계보》를 읽어보면, 이야기라는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은 저널리즘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쾌락과 욕망이 응축된 마약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일까? 일단 이 책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어떤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와도 어깨를 견주기 충분할 만큼 재미있다. 책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히로뽕이 탄생한 시점부터 21세기 초 한국에서 텔레그램을 통해 비대면 히로뽕 매매가 일상화·대중화되는 시점까지 마약 생산·유통 방식의 변천사를 흥미진진하게 쫓아간다. 그 안에는 히로뽕을 팔려는 자와 사려는 자, 그들을 검거하려는 자 등 히로뽕을 둘러싼 여러 인간 군상의 희비와 좌절이 담겨 있다. ‘상선(공급 역할을 맡는 총책)’, ‘지게꾼(운반책)’, ‘야당(수사기관의 정보원)’ 등 다양한 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히로뽕 비즈니스의 구조에 대한 밀도 높은 묘사는 호기심 많은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저자가 후기에 적은 대로, 이 책에는 아직 언론에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인물과 사건 등 종합일간지 사회부 기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제목에 ‘단독’ 말머리를 달고 나가기 충분한 기삿거리가 가득하다. 취재에 들인 공력도 만만치 않다. 수십 년 전 신문 기사와 재판 기록을 샅샅이 뒤졌고,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일본 경찰과 중국 마약 단속국이 발간한 보고서나 백서까지 살폈다. 교도소에 편지를 보내거나 찾아가 전·현직 히로뽕 공급책들과 심층 인터뷰를 하고 히로뽕 사건에 관여했던 변호사, 경찰, 검사를 만나는 등 총 42명을 취재했다. ‘1톱 3박(1면의 톱기사, 3면의 박스기사)’을 장식하는 탐사보도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셈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힘들여 발굴한 사실들을 스트레이트라는 낡은 거푸집에 쏟아붓지 않았다. 저자가 소속된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주간경향》에 내러티브 저널리즘 스타일로 먼저 기사를 연재하고, 취재 내용을 집대성해 책을 낸 것이다. 단독 스트레이트 기사가 가장 뛰어난 성과물로 인정받고,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부서의 기자들이 나름의 특권 의식을 갖기도 하는 언론사 조직 문화에서 흔치 않은 선택이다.

 

《뽕의 계보》가 전형적 기사가 아닌 이야기가 되는 길을 선택한 건 프로젝트의 남다른 출발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프로젝트는 웹소설 및 실화 소재 스토리 기획사 팩트스토리, 웹툰 제작사 엠스토리허브, 드라마 제작사 지앤지프로덕션 3개 사가 2022년 공동 개최한 MGF 메가fun 제1회 범죄 미스터리 공모전의 논픽션 부문 수상작으로 출발했다. 본격적 작업은 팩트스토리와 경향신문의 협업 아래 이뤄졌다. 경향신문 기자가 취재하고 콘텐츠를 생산하면 팩트스토리는 책을 출판하고 영상화 등 추가 콘텐츠 개발을 지원하며 수익을 절반씩 나눠 갖는 방식이다.1) 콘텐츠 생산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혼자 도맡아 하는 데 익숙한 언론사들이 눈여겨볼 만한 시도다. 생산 주체와 유통 창구가 다변화되면, 콘텐츠의 형식도 유연해질 수 있다.

 

저널리즘에서 엿보는 ‘한국형 논픽션’의 가능성

 

《뽕의 계보》가 콘텐츠로서 성공한다는 건 단지 한 권의 책을 많이 팔았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판에 박힌 스트레이트 기사 외에도 취재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창구가 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가 상업적으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는다는 걸 의미한다. 저널리즘 콘텐츠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변주되어 이용자들의 선택을 받는 기회가 생긴다는 건 위기를 맞아 새로운 활로를 모색 중인 저널리즘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뽕의 계보》는 ‘한국형 논픽션’ 장르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 한국에서는 기자가 쓴 논픽션이 화제가 되거나 성공하는 상황을 좀처럼 만나보기 어렵다. 다른 측면에서는 한국 저널리즘과 공통점이 많은 미국이나 일본에서 잡지와 서적을 통한 논픽션 저널리즘이 오래전부터 발달했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한국 논픽션의 지나친 저발전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뽕의 계보》는 기본적으로 ‘히로뽕의 문화사’ 같은 제목이 어울릴 만한 역사서의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의 논픽션 소설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를 연상케 하는 문학적 묘사가 뒤섞여 있다. 생동감 있는 묘사의 부분적 삽입은 처음에는 글이 방향성을 명확히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이 책이 갖는 실험적 성격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화에 바탕을 둔 논픽션 장르의 발달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발달을 견인할 수도 있다. 한국이 ‘논픽션의 불모지’였다 해도 기자가 쓴 탁월한 논픽션 작품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며 이들은 모두 뛰어난 대중 영화의 밑거름이 됐다. 공작원 ‘흑금성’을 세상에 알린 시사저널 김당 기자의 기사가 아니었다면 영화 <공작>은 없었을 것이고,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의 책이 아니었다면 이병헌 주연의 영화 <남산의 부장들>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뽕의 계보》의 뒤를 이을 논픽션 작품이 또 다른 영화의 원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 속에서 확인할 수 있듯, 현실 속 ‘마약왕’의 삶은 <극한직업>, <범죄도시3> 등 마약을 소재로 삼은 픽션 속 모습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논픽션이 담아낸 사실의 힘은 허구와 상상의 세계에 날개를 더해 K-콘텐츠의 잠재력을 높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저널리즘의 진화: 콘텐츠가 된 저널리즘

 

진화생물학은 유연한 변화를 통해 환경에 적응한 개체가 생존과 번식에 성공해 왔다고 말한다. 위기에 직면한 저널리즘은 지금 변화와 적응을 요구받고 있다. 생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저널리즘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바로 언론계 종사자들의 의식이다. 기자들이 교조와 아집에 빠져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의 유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면,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저널리즘은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언론사의 경쟁자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라는 건 이제 상식에 가깝다. 기자들의 경쟁자도 같은 출입처 기자실에 있는 동료 기자가 아니다. 이용자들이 종일 머무르며 콘텐츠를 소비하는 넷플릭스, 유튜브, 인스타그램이 저널리즘의 경쟁자다. 저널리즘은 판에 박힌 뉴스 형식에서 벗어나 이들과 경쟁할 수 있는 전략을 고안해야 한다.

 

전망이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저널리즘은 큰 힘을 가진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다룬다는 점에서 잠재력이 있다. 고객이 좋아할 만한 재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고, 재료를 다룰 요리 실력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고객의 입맛에 맞춰 요리법만 조금 바꾼다면 누구에게든 뒤지지 않을 수 있다. 머릿속의 무거운 걸림돌만 걷어낸다면 경쟁력은 충분하다.

 

좋든 싫든 저널리즘이 예능이나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콘텐츠의 한 장르로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의 책임과 본령을 정확히 이해하는 언론인들이 저널리즘의 ‘콘텐츠화’를 먼저 주도해야 한다. 편향과 왜곡을 무기 삼아 정치적 주장을 앞세우는 유사 저널리즘 콘텐츠가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해 전통적 저널리즘을 완전히 대체하기 전에 말이다. 양질의 저널리즘이 다양한 ‘이야기’ 형식을 품어 스스로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거듭나는 건 저널리즘의 변질이나 타락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진화다. 

 

 

 

 

 

 

1) 최승영, <현실 마약왕, 동네 사우나서 볼 법한 사람들이었죠>, 기자협회보, 2024.9.3,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6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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