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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일 호주 공영방송 ABC(Australian Broadcasting Corporation)가 사내 인종차별 문제를 조사한 보고서 <Listen Loudly, Act Strongly>를 공개했다. 2023년 10월 호주연방의회 내에서 원주민 목소리를 대변하는 헌법 기구 보이스(Voice) 설립 방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그리고 그 직후인 10월 20일, 원주민 출신 변호사 테리 장케(Terri Janke) 박사가 이끄는 퍼스트 네이션 법률 기관이 독립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이 보고서는 ABC의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직원들이 경험한 인종차별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직원들이 경험한 일상적인 차별부터 구조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조직 내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보고서가 공개된 후, 호주 사회에 자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ABC 조직 문화의 광범위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호주 전역에서도 공정한 직장 환경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인종차별로 인해 경제적 손실 발생하는 호주
뿌리 깊은 백호주의와 이에 따른 원주민에 대한 차별 문제는 호주 사회 내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작년 10월에 치러진 보이스 설립 방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원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원주민과 다문화 출신 사회 구성원에 대한 인종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호주 사회 곳곳에서 인종차별 경험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는 호주 사회의 오랜 과제다.
ABC가 호주 국민 1만 7,28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1 호주대국민조사(2021 Australia Talks National Survey)>에 따르면, 응답자의 78%가 호주 사회 내 인종차별이 여전히 만연해 있다고 응답했다.1) 또한 호주 매쿼리대가 실시한 조사2)에 따르면, 88%의 원주민 출신 응답자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다른 원주민 출신 사람들을 향한 인종차별을 목격했다고 응답했으며, 그중 21%는 소셜미디어상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더 나아가 17%는 이러한 경험이 실제 오프라인상에서의 생활에 지장을 주었다고 응답했다.
비영리 단체인 올투게더나우(All Together Now)가 실시한 미디어 분석 결과, 원주민 및 다문화 커뮤니티에 대한 미디어 보도는 부정적인 시각에 더 치우쳐 있으며, 인종과 관련된 ‘오피니언’ 기사는 종종 인종차별적 내용으로 인해 언론 윤리 강령에 위반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3) 인종차별 문제는 사회적·문화적 영향뿐만 아니라 경제적 비효율성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호주 전체 경제에서 인종차별로 인해 연간 약 370억 호주달러(약 31조 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4)
비효율적인 문제 해결 절차와 경영진의 공감 부족, 문제로 지적돼
이번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현직 직원 120명이 제출한 진술 중 단 한 명만이 ABC에서 인종차별을 목격하지 않았다고 답했으며, 모든 원주민 출신 응답자는 ABC에서 일하면서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인종차별은 인종적 비방과 경멸적 발언 등 겉으로 드러나는 명시적 인종차별(Overt racism)뿐만 아니라, 잘 드러나지 않고 은연중에 가해지는 은밀한 인종차별(Covert racism)도 존재한다. 조사에 참여한 직원들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이러한 인종차별이 사내에 만연해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직원들에게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보고서는 임금 차별, 고용 조건, 경력 개발, 직원 지원 등의 차별뿐만 아니라 사내 따돌림·희롱, 직원 불만 해결 과정, 정책, 그리고 조직의 중간관리직·임원급에서의 원주민 및 다문화 배경 출신들의 대표성 부족 등에서 구조적 인종차별이 심각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보고서에서 지적한 중요한 우려 사항 중 하나는 직원 불만 처리 절차였다. 사내 인종차별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불만 제기 및 문제 해결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나, 인종차별 문제의 특성상 피해 직원이 이를 제기하거나 자신 있게 신고하기는 어렵다. ABC 내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는 인종차별 사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은밀하거나 구조적인 인종차별을 효율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로 인해 전반적으로 불만 보고 및 모니터링 접근 방식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가 부족하며, 대부분의 직원은 이러한 사내 시스템을 공식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조직 내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ABC 리더십 내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도 중요한 우려 사항 중 하나로 지적됐다. 이는 조직의 고위 간부급에서 원주민 및 다문화 배경 출신이 부재한 문제와 직결된다. ABC의 2023년 다양성 및 포용성 연례 보고서(Diversity and Inclusion Annual Report)에 따르면, 다문화 배경 출신 임원은 전체 임원의 11.9%, 원주민 출신은 2.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더십 내에서의 대표성 부족은 인종차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깊고 일관된 이해가 없을 때, 이를 해결하려는 조치들이 종종 단기적 해결에 그쳐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기에는 효과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인터뷰 참가자들이 보고한 또 다른 심각한 우려 사항은 일반 대중, 타 언론기관, 외부 개인들로부터 경험하는 외부로부터의 인종차별이다. 2023년 5월 ABC의 원주민 출신 대기자 스탠 그랜트(Stan Grant)의 사임 배경에도 소셜미디어에서 겪은 극심한 인종차별적 학대가 있었다. 그랜트는 방송에서 영국 군주제와 식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한 후 소셜미디어에서 극심한 인종차별적 공격을 당했고, 그로 인해 심각한 감정적 고통을 겪었다. 그는 기자로서 수년간 대중들로부터 인종차별적 학대를 당해왔음을 밝혀 충격을 주었으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공격을 받는 과정에서 ABC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랜트의 사임은 호주 내 구조적 인종차별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가 됐으며, 언론 기관들이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 보고서에 따르면 ABC는 관리하는 온라인 공론장을 모니터링하고 언론인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인종차별적 공격에 대응하지만, 조사에 참여한 직원 대부분은 이러한 대응이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으며, 많은 직원이 체계적이고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주민·다문화 출신 기자들만이 겪는 ‘문화적 부담’
이번 인종차별 보고서는 원주민 및 다문화 배경 출신 언론인들이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조사하고 분석했는데, 이중 언론계가 주목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러한 내부 직원들에게 가중되는 ‘문화적 부담(Cultural load)’이다. 문화적 부담은 비원주민 혹은 다문화 배경에 지식이 없는 기자들이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기자들에게 의존하게 되면서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기자들이 겪게되는 부담을 의미한다. 비원주민 기자들이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반면,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기자들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불필요한 추가 업무를 떠맡게 된다는 점에서 차별적인 부담이다.
호주다양성협의회(Diversity Council Australia)에 따르면, 문화적 부담은 직장에서 원주민 출신 직원들이 대표적으로 겪는 추가적인 업무 부담을 의미한다.5) 이들은 직장에서 유일한 원주민이거나 소수의 원주민 중 한 명일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담은 조직에서 이들의 목소리나 기여가 과소평가 되거나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보고서는 ABC 사내에 이러한 문화적 부담이 만연해 있음을 보고하는데,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기자들은 비원주민 동료들에게 원주민과 인종차별에 대해 교육하라는 기대, 모든 원주민과 자신의 출신 배경 문화를 대표해 발언해야 한다는 기대, 적절한 인정이나 보상 없이 문화적 자문, 인맥, 자료를 제공하리라는 기대로 부담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기자들이 지속적으로 직장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하며, 경력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개숙인 ABC 사장, 인종차별 문제 전략 부서 설립
데이비드 앤더슨(David Anderson) ABC 대표이사는 보고서가 공개된 후 인종차별을 경험한 ABC 직원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더불어, 제시된 15개의 권고 사항을 원칙적으로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했는데, 가장 먼저 새로운 전략 부서 및 상임위원회를 설립하고, 사내 다양성 및 포용성 증진을 위한 전략을 담당할 이사를 임명했다. 사내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 및 절차를 검토하고 지원할 인종차별위원회 위원을 고용했으며, 상주 자문위원으로 원주민 출신 저명한 학자를 채용했다.
그밖에 업무 보고 라인을 변경하고, 신설 부서와 관련 업무에 필요한 추가 예산을 배정했다. 보고서가 제시한 권고 사항에 대응하기 위해 ABC는 새로운 위원회, 직원 통합, 관리·보고 체계의 재배치 등 지금까지 발 빠른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보다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가 이루어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인종차별을 경험한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조직 전반에 포용적인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경영진의 명확한 의지와 책임 있는 행동이 필수적이다.
특히, 좀 더 중대한 문제인 원주민 및 다문화 출신 기자들을 향해 가해지는 외부 공격이나 사내에서 문화적으로 안전한 업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ABC 경영진이 실질적으로 어떠한 노력을 기울일지는 분명하지 않다. 보고서는 직원들이 외부 미디어 조직이나 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중앙집중 해결팀을 신설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지만, 이러한 제안을 수용하기보다 현재 ABC가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만을 표명했다.
호주의 대표 공영방송인 ABC는 호주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ABC는 공영방송으로써 법적으로 그 의무와 역할을 정하고 있으며, 공공의 신뢰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책임감 있고 투명하게 운영될 책임이 있다. 이번 ABC 인종차별 보고서는 호주를 대표하는 언론기관 내에서 발생하는 인종차별과 구조적인 차별 문제를 독립적인 기관이 조사·발행한 것으로, 이를 공개함으로써 공영방송으로서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호주에서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매우 높으며, ABC와 SBS 두 공영방송은 호주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방송사로 자리 잡고 있다.6) ABC가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영진이 단순한 정책적 대응에 그치지 않고,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여 모든 직원이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1) Crabb, A., <Australia Talks shows we agree there’s a lot of racism here, but less than half say white supremacy is ingrained in our society>, ABC, 2021.5.31, https://www.abc.net.au/news/2021-05-31/annabel-crabb-analysis-racism-australiatalks/100172288
2) Carlson, B. & Ryan Frazer, R., <Social Media Mob: Being Indigenous Online>, Macquarie University, 2018.3.,https://researchmanagement.mq.edu.au/ws/portalfiles/portal/85013179/MQU_SocialMediaMob_report_Carlson_Frazer.pdf
3) Renaldi, E., Nazli Bahmani, N., & Yang, S., <Muslims, Chinese Australians and Indigenous people most targeted in racist media coverage>, ABC, 2020.11.11, https://www.abc.net.au/news/2020-1111/australian-mainstream-media-often-perpetuate-racismreport-finds/12849912
4) Augustin, R., <Researchers say racism is costing the Australian economy billions>, ABC, 2021.6.3, https://www.abc.net.au/news/2021-07-03/racism-costing-the-australian-economy-billions/100252786
5) <Cultural load, it’s a real thing!>, The Australian Public Service Commission, 2023.8.8, https://www.apsc.gov.au/working-aps/diversity-and-inclusion/diversity-inclusion-news/cultural-load-its-real-thing
6) Park, S., Fisher, C., McGuinness, K., Lee, J., McCallum, K., Cai, X., Chatskin, M., Mardjianto, L. & Yao, P(2024), <Digital News Report: Australia 2024>, Canberra: News & Media Research Centre, University of Canberra



